#139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이곳에 온 이유가 다 있었다.
“마왕님. 마왕님은 오랫동안 마계를 지키셨으니 천계의 존재들도 많이 보셨겠죠.”
“갑자기 그놈들은 왜 묻는 것이냐.”
아직 본론은 시작도 안 했건만 줄곧 덤덤하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천계라는 단어 하나에 이토록 반응할 줄이야. 골이 어지간히도 깊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일어난 성마대전이… 벌써 천 년도 더 전이랬나.’
당시 대전은 천계의 승리와 함께 천마휴전협정을 맺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마계와 천계는 서로를 향해 짙은 증오심을 표해오는 중이었다.
아가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의도 모르는 빌어먹을 것들’이 바로 천족이었다. 기실 이것도 상당히 순화시킨 호칭이었다.
그에게 천상의 존재들은 비오는 날 침대 밑에서 튀어나온 바퀴벌레만도 못했다.
오죽 싫었으면 그가 올라타 있던 사다리에서 찰나 뿌득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까.
물론 으름장 좀 놓았다고 내 호기심을 철회시킬 순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요. 천사는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요.”
패기 넘치는 물음과는 달리, 곧바로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지만.
아가레스는 흉흉한 인광을 쏘아대며 타박했다.
“궁금할 것도 참 없다.”
“제가 학구열이 보통 뛰어나야지요. 그래서, 천사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쓸데없긴. 그저 날개 달고 푸드덕거리는 비둘기 떼지 무어야.”
“그 발언, 지상에서 하셨으면 신성 모독죄로 무기징역 살게 되셨을 걸요.”
“흥, 그러니 내가 인간들에게 통 정을 붙일 수가 없어. 고작 비둘기 새끼들을 떠받들고 추앙하는 한심한 작태나 보이니, 원.”
영 못마땅하다는 어조였다. 반듯한 눈썹이 잔뜩 구겨진 얼굴은 더 그러했고.
와삭, 사과를 베어 무는 소리가 잠시 사이를 갈랐다.
그 소리에 아가레스가 퍼뜩 하던 일을 멈췄다.
그는 사과를 우물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아, 너는 예외다. 한심하지 않아. 넌 꽤 재밌는 인간이야.”
왜 갑자기 제 발 저린 도둑이 되신 거람?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크흠, 흠.”
“지금 제 눈을 피하시는 건가요? 왜죠?”
“내가 언제 그랬다고. 커험, 험.”
나는 짓궂은 미소를 걸치고서 끈덕지게 그를 응시했다.
아가레스는 연신 헛기침만 터뜨렸다. 꼭 매캐한 먼지에 사레라도 들린 양.
그에겐 마왕성 뒤뜰의 공기가, 태백산 옹달샘 뺨치게 상쾌할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이야, 이거 장관인데.’
내 집요한 시선을 못 견뎌하는 모습이 퍽 볼만 했다.
딱밤 한 번이면 머리통을 으스러뜨리고도 남을 양반이 좀 쳐다봤다고 쩔쩔매다니!
마음 같아선 돌아갈 때까지 몇 시간이고 감상하고 싶었지만, 나도 도의란 게 있었다.
‘수줍음 많은 우리 아버님, 내가 좀 봐줘야지 뭐.’
나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 천사들 말이에요. 날개가 대부분 하얗죠? 튼튼하고.”
“……튼튼하긴. 악마의 뿔이 박히면 단숨에 찢어질 것들이야.”
신랄한 평가가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우리 마왕님께서 와중에 마계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그 허여멀건 거 별로 예쁘지도 않다는 둥, 종잇장 같아서 바람 한 번 불면 다 쓸려나간다는 둥. 연신 궁시렁댔다.
나는 발치에 무서운 속도로 쌓이는 잘린 가지를 보며 넉살좋게 끼어들었다.
“아이, 어쨌든 그렇다는 뜻이죠?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형상과 비슷하다, 이거죠? 하얗고 반짝반짝한.”
“……그래.”
아가레스가 마지못해 답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니 못마땅해 하면서도 답은 착실히 해줄 심산인 듯 보였다.
나는 그 기세에 힘입어 계속 종알거렸다.
“근데 그 날개가, 좀 온전치 못한… 그런 경우도 있어요? 마왕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막 여기저기 찢겨있고, 색도 까마귀처럼 검고.”
“원래부터 그리 태어나는 천사들은 없다. 특히나 그 색이 검다면 더더욱.”
“그럼 천사가 아니라는 소리예요?”
“천사는 맞다. 다만.”
아가레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제일 먹음직스럽게 생긴 사과를 뚝 따 던졌다.
나는 먹던 사과도 엉겁결에 떨어뜨리고 그를 받았다.
한여름의 장미보다 더 붉고 탐스러운 사과는, 표면까지 흠 하나 없이 매끈매끈해 은은한 달빛에도 광이 났다.
절로 손이 가게 만드는 자태와 향이 꼭 성서에 나오는 선악과 같았다.
너무 완벽해서 덥석 먹기가 조금 망설여졌으나, 이내 한가득 이를 박아 넣었다.
정말 선악과도 아니건만 한번 발을 들인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의 늪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날 잠시 돌아본 아가레스는 다시 솜씨 좋은 정원사처럼 비실비실한 과실을 솎아냈다.
“신의 뜻을 저버리고 타락한 천사지.”
“타락… 천사요?”
“그래. 천계에 속해 누릴 수 있는 권능을 기꺼이 저버리길 택한, 어리석은 존재.”
아가레스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천족 관련 얘기를 하는데 이 정도나마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난 그 어리석음이 싫지 않아. 도리어 박수라도 쳐주고 싶군. 어느 천사가 감히 신에게 대항하는 무모한 짓거릴 벌일까.”
“그럼, 그럼 그 타락천사를 보신 적 있으세요?”
“직접 본 적은 없다만… 300년 전 쯤 인가, 한 놈이 인간계로 떨어질 거란 소문은 들은 적 있었다.”
감감한 시선이 과거를 회상하는지 허공을 맴돌았다.
드디어 실마리가 조금 잡히는 듯 했다. 나는 조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300년 전이요? 그럼 지금은 다시 천계로 돌아갔나요?”
“형벌의 기간에 따라 달라. 그 기간을 채우기 전까지는, 끝없이 환생을 반복하며 인간계를 떠돌지.”
“여전히 벌을 받고 있는 중이란 건가요?”
“그건 아무도 모른다. 창세신이라면 모를까, 형벌 집행자조차도 알 수 없어. 벌레인지 가축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혹은 다음 생을 기다리는 중인지. 하나 천계 놈들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아직도 돌아갈 날은 멀었을 게다.”
그새 나무 하나 작업을 끝마친 그는 사다리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한데 이런 건 왜 묻느냐? 타락천사라도 만났느냐? 아침잠을 깨우는 새가 타락천사처럼 보이던?”
장난조로 던진 말처럼 들려도 본질을 파고드는 물음이었다.
‘내가 너무 끈덕지게 들이댔나.’
지금이야 사과장수인 체 한다지만, 아가레스의 본업은 마왕이었다. 서둘러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관련된 신화를 재밌게 읽어서요.”
루치펠이 정말로 타락천사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기도 했고.
안 그래도 아가레스에게 미운털이 콕 박혔는데, 굳이 더 꽂아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아무리 타락천사에겐 유하다 해도 천사는 천사였으니까.
나는 몸을 슬 물리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책에서 본 천사들 삽화가 예쁘기도 하고, 미지의 존재들을 향한 자연적이고도 당위적인 인간의 본능이랄까요… 뭐 그런 거죠, 하하.”
“그런 비둘기 떼가 뭐가 좋다고.”
“아이, 그림이니까 예쁘다 예쁘다 한 거죠. 실물은 당근 마계가 훨 낫죠.”
다행히 아가레스는 내 기행에 더 의구심을 표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천계만 언급하는 걸 언짢게 여겼을 뿐.
그렇다고 쫄 건 없었다. 자칭 아가레스의 딸내미 경력이 어느덧 반년을 넘었다.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법 정도야 책 한 권으로도 펴낼 수 있었다.
“그 비리비리한 천계를 으딜 마계에 비빈답니까? 마계의 명물 앞에선 신들의 후광도 반딧불만 못할 겁니다!”
“……명물?”
아가레스의 한 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치켜 올라갔다.
나는 아랑곳 않고 자랑스레 팔을 뻗었다. 그리고 힘줄이 불끈 돋아난 팔뚝과 꽤나 벌어진 셔츠자락 사이를 가리켰다.
“마왕님의 이 치명적이고도 섹시한 이두박근과 대흉근!”
“……뭐?”
“그런 마왕님을 닮아 다들 한 미모씩 하는 악마부대! 웅장하고 아름다운 마왕성! 마지막으로…….”
쪼그리고 앉은 나는 딱딱한 악어의 등가죽을 마구 쓰다듬었다.
녀석은 금전에 내가 떨어뜨린 사과를 콧등으로 굴리고 있었다.
“최고로 귀엽고 깜찍한 에르제베트 2세까지! 꽃보다 남자? 꽃보다 천계? 으음, 노노. 요즘 대세는 꽃보다 마계죠!”
마구 볼을 부비고 쓰다듬는 손길에 에르제베트 2세가 기분 좋은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털레털레 꼬리까지 흔들자, 아가레스가 픽 웃었다.
“천계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그런 소릴 지껄이는구나.”
“때론 안 봐도 아는 게 있는 법이잖아요. 장인이 한 올 한 올 뽑아낸 실크자락보다 제 심성이 더 고운 것처럼.”
“원, 말이나 못하면. 용암지옥에 빠져도 넌 입부터 뜰 게다.”
말은 험해도 내심 뿌듯해 하는 게 보였다. 주체하지 못한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그를 입증하듯, 그는 소담하게 핀 사과꽃 하나를 따 내 귓가에 꽂아주었다.
동시에 인간계로 통하는 포털이 열렸다.
“저번처럼 아프고 싶지 않거든 어서 가기나 하거라.”
투박하면서도 세심한 손길이 머리를 쓸었다. 그 손길에서 전해오는 안온함이 좋았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과 얻어먹으러 자주 올게요. 우리 마왕님 또 쓸쓸한 홀애비 되시면 안 되니까.”
포털에 몸이 완전히 빨려들 때까지, 달큰한 사과나무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 * *
어둠이 달마저 삼킨 깊은 밤.
루치펠은 긴 창 앞에 서서 그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했다.
아무리 고요를 가장하려 해도 머릿속은 혼잡스러웠다. 메이블린과 아침에 나눴던 대화가 자꾸만 맴돌았다.
‘이번엔 내가 아니라 너와 관련된 거야, 루시. 갑자기 괴상한 날개가 네 등 뒤로 펼쳐지더니, 네가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어.’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네가 순간 다른 존재로 보였어. 인간이 아닌 무언가. 네 본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능력이 어쩌다보니 잠깐 발현되었거든.’
‘아가레스를 만나러 종종 마계에 가 봐서 아는데, 확실히 달라. 악마의 힘은 아니야.’
‘아무래도 루시는 천사 같아.’
뜬금포가 따로 없는 말들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흘려 넘기기엔 영 꺼림칙했다.
눈으로 볼 순 없어도 루치펠은 메이블린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가 광신도를 자처할 정도로 메이블린을 믿을뿐더러, 신까지 직접 나서서 제게 확인시켜준 능력이었다.
그러니 그 때의 이질감은 결코 헛된 반응이 아니었을 것이다.
메이블린이 유난히 묘하게 빛나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순간.
맹렬한 감각이 전신을 강타했다. 두꺼운 껍질 따위가 한 꺼풀 벗겨지는 느낌.
꼭 점점 잊혀 가던 메이블린의 존재를 불현듯 자각한 순간과도 비슷했다.
‘대체 무슨 진실이 숨겨진 건지…….’
아무리 파고들어봤자 답을 낼 수 없다는 것까지도.
루치펠은 더 고민하길 관두고 이만 잠을 청했다.
피로했던 지라 눈꺼풀은 금세 내려앉았다. 곧 긴긴 수마가 그를 지배했다.
꿈속에서, 무수한 장면들이 도미노처럼 차르르륵 넘어갔다.
어지럽게 돌던 장면 조각이 멈췄을 땐 작은 신전 안이었다.
일렬로 늘어진 기둥 가운데 두 여자가 팽팽하게 대치중이었다.
관망하듯 허공에 떠있던 그는 돌연 그 사이에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원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제 뒤에 있는 여인을 보호하려는 양, 몸이 저절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