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38)화 (138/185)

32. 진실과 진심

#138

‘이게…어떻게 된 거지?’

나는 눈앞의 풍경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분명 잠에서 깼다고 생각했는데. 싱그러운 아침햇살 대신 꿉꿉한 공기가 훅 끼쳐들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도, 커다란 침대도, 시중을 들러오는 시종들도 없었다.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둡고 퀴퀴한 내 자취방 안이었다.

좁디좁은 방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심지어는 내 자세마저도.

나는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중이었고, 창밖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내 불알친구 신제우 놈도 보였다.

그는 딱딱한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폰… 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두꺼운 종이책을, 세상 진지한 얼굴로.

‘저 뺀질이가 웬일이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했다. 이쪽이 진짜고, 메이블린의 삶이 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어느새 이 상황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갔다.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거짓이든 진짜든 상관없었다.

연기를 마신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저 숨을 쉬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감각.

이것만이 겨우 떠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정상적인 사고였다.

“메이블린. 책 읽을래?”

그래서 제우가 갑자기 뒤돌아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갑기만 했다.

그가 내민 책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몇 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나선 뭔… 게다가 성경책?”

“지구의 신들이 말하는 루시퍼 이야기도 재밌더라고. 세계선 차이가 있어서 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직접 만나보니 어땠어?”

“뭐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최 알 수 없는 소리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그러나 제우는 태평하게 제 할 말만 쏟아냈다.

“루시퍼. 책이랑은 많이 다르지?”

“네가 뭐라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 악마를 어떻게 만나.”

“악마라…… 보통 인식이 그렇긴 하지.”

다소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를 맴돌았다.

내가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쓴웃음을 지워낸 그는 다시 쾌활하게 물었다.

“메이블린. 생각해 봐. 루시퍼의 본뜻이 뭐였지?”

“뭐야. 너 자꾸 왜 그… 잠깐만.”

나는 문득, 이 상황이 굉장히 모순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장소나 기묘한 분위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배경이 비오는 밤의 꼬질꼬질한 내 자취방이란 걸 제하고서라도, 뭔가가 굉장히 아귀에 맞지 않았다.

그야,

“너 어떻게 나를 메이블린이라 부르는 거야?”

제우는 한해원으로서의 나를 알지, 메이블린으로서의 나는 몰라야 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순간 제우의 얼굴에 아차, 싶은 기색이 퍼져나갔다.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빠르게 갈무리되었지만, 분명히 보았다.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그러나 굳었던 안색은 가면을 쓴 것 마냥 순식간에 바뀌었다. 늘상 봐온 빙글거리는 웃음만이 빤질한 낯짝을 덮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이런. 다음에 봐.”

“야, 어디가!”

“그땐 모든 걸 되찾게 될 거야.”

“잠깐…!”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아귀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얗게 물든 공간에 헛손질만 계속했다.

곧 사방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완전히 꿈에서 벗어났다.

“으음…….”

가득 잠긴 내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걸 느꼈을 땐, 정말로 아침이었다. 쨍한 햇살이 눈가를 파고들었다.

먹먹한 시야에 적응하기도 잠시.

요란한 알림음이 연달아 머리를 강타했다.

[■■■의 몽현을 자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히든 스킬 ‘진실의 눈’이 활성화 됩니다!]

[진실의 눈 Lv.??(히든): 5초간 상대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 쿨타임: 없음.]

[제한 횟수: 1회]

몽현이고 뭐고 스킬이 터진 건 좋은데….

‘꼴랑 1회? 딱 한 번이면 끝난단 말이야?’

의도치 않게 생긴 일회성 스킬은 새로운 메시지창을 연이어 띄웠다.

[스킬을 사용할 대상을 지정해주세요.]

마우스 커서처럼 글자가 눈앞에서 깜박였다.

그와 동시에, 창문이 덜컥 열렸다.

“메이. 좋은 아침.”

“으앗.”

시스템창에 집중하고 있던 참이라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루치펠 녀석이 워낙 기척을 지우고 다니는 데 능하기도 했고.

평소였다면 작게 타박 한 번 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아, 안 돼!”

루치펠의 등장에 놀란 손가락은 하필이면 참으로 엄한 곳도 짚었다.

엉겁결에 대상을 지정한 확인 창이 사라지고, 새 창이 떴다.

[5초간 ‘루치펠 럭스’의 본모습이 나타납니다.]

아악, 이게 아닌데! 귀한 스킬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버릴 줄이야!

‘쟤 본모습이래봤자 뭐 잘빠진 근육만 보이겠… 어?’

나는 절망하다 말고 뭔가에 홀린 듯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창가에 앉은 루치펠 뒤로 갑자기 뭔가가 펼쳐졌다.

길고 커다란 날개 같은 게… 아니, 날개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날개였다.

거칠게 찢긴 것처럼 너덜너덜하고, 때가 탄 듯 얼룩덜룩하고, 뼈대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긴 했지만 분명한 날개의 형태.

눈을 비비적거려도 날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 발짝씩 루치펠 앞으로 다가간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익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힘이 손끝을 감돌았다.

‘이 힘은… 이노아드 황궁 지하에서 느껴본 적 있는 힘인데.’

아가레스의 아들을 가두어놓았던 감옥. 그 창살을 뒤덮은 결계와, 악마 왕자님을 얽은 사슬에서 느꼈던 힘.

이물질이 섞인 듯 온전치 않은 결이었으나 분명히 그 힘이었다.

나는 좀 더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그물처럼 얽힌 깃에 막 닿으려던 찰나.

[스킬이 종료됩니다!]

[진실의 눈 Lv.??(히든): 루치펠(루시퍼) 사용]

날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금 요상한 꿈을 꾼 탓일까, 아니면 정말로 스킬이 내게 뭔가를 보여준 것일까.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기만 했다.

그 사이 허공을 방황하는 손가락 사이로 루치펠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메이.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메이블린.”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더는 혼자 짊어지지 않기로 했잖아. 너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다고.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이걸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걱정이 반 정도 섞인 의문이 들었다.

나만 꾼 꿈이고, 나만 볼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가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를 보는 눈이 바보 같을 정도로 한결 같아서,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라면 내가 사실 신이었다고 농을 쳐도 믿어줄 것 같았으니까.

“이번엔 내가 아니라 너와 관련된 거야, 루시. 갑자기 괴상한 날개가 네 등 뒤로 펼쳐지더니, 네가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어. 아니,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까 내 말은….”

“천천히 얘기해도 돼.”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는지 루치펠이 다정하게 내 등을 쓸었다.

나는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그 손길에 안정을 얻고 숨을 골랐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네가 순간 다른 존재로 보였어. 인간이 아닌 무언가. 네 본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능력이 어쩌다보니 잠깐 발현되었거든. 딱 한 번밖에 기회가 없어서 더는 쓸 수 없고.”

“그럼 괴상한 날개가 보였다는 건… 내가 악마라든지, 그런 존재 같다는 거야?”

“비슷해. 하지만 그렇다기엔 느껴지는 힘의 결이 완전히 정반대였어. 아가레스를 만나러 종종 마계에 가 봐서 아는데, 확실히 달라. 악마의 힘은 아니야.”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 넌 이미 답을 어느 정도 내린 상태 같아서.”

하여간, 눈치 하난 기가 막히지.

속으로 감탄한 나는 요요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비록 성녀도 타락시킬 법한, 객관적으로 이미지만 놓고 보자면 악마에 가까운 외양이긴 했으나….

“천사.”

“뭐?”

“아무래도 루시는 천사 같아.”

악마보다는 천사라는 결론이 냉큼 나왔다.

뿔 없고, 깃털이 좀 까맣긴 했지만 그래도 날개는 날개고.

순간 느껴졌던 신성한 힘까지 더하면 천사 말고 딱히 떠오르는 인외적인 존재는 없었다.

게다가 루치펠은 전적이 있었다. 매번 뭔가를 알려주는 듯했던 꿈에서도 천사의 모습으로 나왔지 않았나.

“…….”

자신만만하게 떨어뜨린 답이 퍽 생뚱맞았는지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아서, 나는 잠자코 그의 상념이 끝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날 깨우러 오는 시녀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워질 무렵.

“메이. 하나만 물을게.”

루치펠이 진득하게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 사랑해?”

얘는, 이것도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그걸 말이라고. 당연하지!”

“내가 천사든, 악마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네 정체가 사실 인간으로 변장한 마물이래도 난 사랑할 수 있어.”

일순 눈앞이 환해졌다.

내 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조라도 되는 양, 루치펠이 아침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웃었다.

“그럼 됐네. 심각해질 필요가 뭐 있어.”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치펠이 팔을 당기자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이마에서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지그시 눌렸다가 떨어지는 입술이 보였다.

잔잔한 숨이 머리 위로 단비처럼 쏟아졌다.

그 한결같은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달라지는 건 없으리란 걸.

루치펠이 천사든, 악마든, 설령 마물이든.

그는 언제고 내 곁을 지킬 것이고, 나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은 맹세할 수 있을 만큼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그러게. 됐네.”

* * *

나는 나무 사이 빼꼼 튀어나온 악어 꼬리를 따라 잰걸음을 옮겼다.

아가레스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반려동물 에르제베트 2세가 보인다는 건, 아가레스도 그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마왕님~ 며칠 전에 봤던 딸내미 죽지도 않고 또 왔어요~!”

산뜻한 외침이 마왕성 뒤편에 자리한 뜰을 한가득 메웠다.

메아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인영이 사과나무의 가지를 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또 어딜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녔기에 그 모양이냐.”

내 얼굴을 확인한 아가레스가 혀를 쯧, 차며 꾸지람했다.

현재 나는 아침 조회를 마치자마자 마계로 달려온 터였다. 발갛게 물든 코를 부여잡고서.

‘루치펠의 미모를 감상하다 그만 쌍코피가 터졌노라곤 죽어도 불 수 없지.’

나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아가레스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오랜만에 편안한 차림이었다. 셔츠를 걷어붙인 우람한 팔뚝이 가지 사이를 능숙하게 누볐다.

울끈불끈한 근육은, 아니 아가레스는 가지치기에 열중한 채 툭 말을 던졌다.

“아침부턴 웬일이냐.”

“꼭 일이 있어야만 오나요, 그냥 올 수도 있는 거죠.”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이었다. 아가레스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딱히 상관없어하기도 했다. 대신에 그는 갓 딴 사과를 내게 내밀었다.

“먹어라. 아침에 사과는 좋아.”

“주신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과일이나 음식을 먹으면 마계의 공기에 대한 저항력이 세졌다.

지난 번 감기에 걸렸다고 스치듯 얘기한 후로, 그는 이따금 내게 먹을거리를 챙겨주곤 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먹고서, 나는 슬쩍 서두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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