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루치펠인지 루시퍼인지, 생긴 건 요사스러워가지고 우리 메이를 아주 단단히도 홀렸어.’
그래서 구태여 구혼 경쟁 심사위원을 자처한 것인데.
얄궂게도, 혹은 누군가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럴만한 재목은 보이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현재로선 그 시커먼 놈이 그나마 메이블린 곁에 설 자격이 됐다.
노아는 메이블린의 아름다움을 장장 16장에 걸쳐 노래한 서사시를 읽다가 짓무른 눈을 문질렀다.
“어차피 메이도 아직까진 그 놈이 좋은 것 같고…. 솔직히 지금 어느 놈을 봐도 눈에 차진 않잖아요. 이거 다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그냥 메이가 좋아하는 대로 두는 게 최선이겠죠, 아버지?”
“……그래. 그리하자꾸나.”
“그럼 혼서가 와봤자 소각밖에 더하겠네요. 메이가 알아채기 전에 이만 무슨 조치라도 취하는 게 좋겠어요.”
노아가 윌리엄을 힐끔거리며 조용히 뇌까렸으나, 그는 다 읽은 혼서를 묵묵히 정리하기만 했다.
그러자 미하일이 반문했다.
“뾰족한 수라도 있으신 겁니까, 형님?”
“글쎄다…. 그만 보내라고 으름장을 놓기엔 인원이 너무 많고. 설령 강행한다 쳐도 메이의 귀에 반드시 들어가게 될 거고. 으으, 이런 거 알아서 처리해주는 상단 같은 건 없나?”
노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봉투를 던지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지만 확실하게. 비밀 유지는 필수지만 또 적당한 선은 지키면서 이만한 인력을 감당 가능한 뭐 없나?
‘당연히 없지. 있을 리가.’
노아의 미간에 팬 주름이 깊어졌다.
동시에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다니엘이 움직였다. 그는 천천히, 손깍지를 끼고 상체를 기울였다.
윌리엄을 비롯해 두 형제는 큰형이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몰라 잔뜩 집중했다.
반복되는 업무에 지친 나머지, 또 공주-공포의 주둥아리- 상태로 변신하면 어쩌나 내심 노심초사까지 했다.
모두가 그의 입술에 주목하던 찰나.
“있다, 그런 상단.”
번번한 어조로 흘러나온 말은, 퍽 뜻밖의 것이었다.
“끈질기게 연서 보내는 놈들을 해치워… 아니. 연서를 처리해주는 상단이 있다고? 처음 들어보는데.”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 아니냐.”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형님.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노아와 미하일이 안달 나 다니엘을 재촉했다.
다니엘은 안경테를 바로잡으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말았다.
“우리는 움직일 필요도 없다. 대신 일을 해줄 유능한 인사들이 수다한데, 무엇하러.”
“……?”
다니엘을 제외한 세 남자는 여전히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답을 주듯, 다니엘은 무더기로 쌓인 편지봉투를 네 구역으로 나누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길에 세 남자 앞으로 무더기가 하나씩 밀어졌다.
“미하일은 에임의 국왕에게, 노아는 던켈하이트의 수장에게, 아버지께서는 교황에게 이 연서들을 보내십시오.”
일련의 분할 작업 끝에 마지막 무더기가 남았다.
한눈에 봐도 가장 많은 양. 그는 아랑곳 않고 제일 큰 더미를 자기 앞으로 쓱 가져갔다.
의아한 시선들이 그쪽으로 모인 가운데, 다니엘이 짙푸른 녹안을 싱그럽게 빛냈다.
“저는 마탑주에게 보내겠습니다.”
‘과연, 형님.’
미하일은 손 하나 까딱 않고도 코 푸는 책사다운 방법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 * *
“흐음…….”
나는 펜촉을 의미 없이 굴리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딱히 걱정거리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불안할 정도로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딱 한 가지 우려했던 문제라면 루치펠의 전쟁 난입이었는데, 이조차도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자칫 큰 불로 번질 수 있었던 마탑의 개입은 각국의 질타를 빗겨갔다.
‘무자비했던 제국의 야욕을 막는데 큰 공헌을 한 건 사실이니까. 그 후로 뭔갈 딱히 취하려 들지도 않았고.’
그 결과로, 대륙은 이전처럼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마탑은 견제의 대상이 되는 대신 도리어 그 위치가 더욱 공고해졌다.
고고하고, 위대하고, 정의로운 마탑.
그 누구도 쉬이 침범할 수 없는 아성.
정작 루치펠은 어떤 위명이 붙는지도 잘 모를 테지만, 나는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애인이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데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모두에게 적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던 상황이었는데.
나는 펜을 내려놓고 손깍지를 낀 채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최근에 국혼 관련해서 대신들에게 이따금 몇 마디씩 듣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마탑이랑 동맹관계 맺는 척 루시랑 확 결혼해 버릴까?’
“메이블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호랑이보다 더한 마탑주가 나타났다.
“루시!”
나도 모르게 반가운 포옹이 먼저 나갔다.
요 근래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얼굴 보기가 좀처럼 힘들었었다.
지금도 품에서 익숙하지 않은 이국적인 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어디 갔다 이제 와?”
“미안. 할 일이 좀 있어서.”
“미안할 것까지야. 중요한 일이었어?”
“응. 가족 같은 분이 맡기신 일이었거든.”
“가족 같은 분? 너한테 그런 분도 계셨어?”
천하의 루치펠이 존대까지 써가며 깍듯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웠다.
그는 저의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입가에 덧그렸다.
“뭐… 어쩌면 곧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이리 말하니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었는데.”
“졸부님 남친으로서 마땅한 일을 하고 왔지.”
대답을 듣긴 들었는데 영 시원찮은 답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의뭉스러운 미소만 되레 더욱 짙어졌다.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저래?’
끝까진 그 속을 알 순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묘한 난조 속에 빠졌다.
침울할 것까진 없지만, 조금은 섭섭하면서도 께름칙한 기분이랄까.
그를 기민하게 알아챈 루치펠이 팔을 벌렸다. 나는 쪼르르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긴 소파 옆으로 다리를 쭉 뻗고, 사랑해 마지않는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여느 때처럼 시종들은 전부 물린 후라 루치펠이 자연스럽게 날 감싸 안았다. 꼭 따듯하고 커다란 담요 속에 폭 파묻힌 느낌이었다.
물론 이 담요는 탁월한 센스까지 겸비한, 메이블린 맞춤 특급 담요였다.
“왜 기분이 안 좋아?”
“그게…… 흠. 아냐.”
“괜찮으니까 말해 봐. 알고 싶어.”
“흠, 흠. 그럼 오해하진 말고 들어. 뭐… 내가 딱히 기대한 건 아닌데…. 원래 혼담이 이렇게나 없을 수가 있나?”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칼리안을 보면 진짜 저게 산이야 바다야 싶을 정도로 쏟아지거든. 근데 난 혼담은 고사하고 연서조차 편지봉투 하나 안 보인다고. 어떻게 정치적으로 좀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했는데, 쳇.”
내 툴툴거림에도 루치펠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하러 그런 것들을 들여. 여기 기꺼이 이용당해줄 최강의 마법사가 있잖아.”
“너무 자신만만한데?”
“게다가 그 마법사는, 황제 폐하 전용이라는데.”
“오, 그래?”
눈썹 하나 까딱 않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장난기가 조금 발동했다.
근래 너무 심심하게 놀긴 했지. 나는 능청스럽게 미끼를 던졌다.
“근데 그거 알아?”
“뭘?”
“황제는 그 마법사를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데?”
“……왜?”
일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한 표정이 조각 같은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살짝 당황하면서도 어딘가 애타고, 조금은 침울해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나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완벽한 결정체.
나는 작품을 감상하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이용 말고, 사랑할 거라고 들었지.”
끌어당기는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루치펠의 숨결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고개를 살짝 꺾어 입술을 부딪쳤다.
몇 번의 입맞춤이 오간 끝에 눈을 떴을 땐, 루치펠의 낯빛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주인이 떠날까 봐 낑낑대는 강아지는 어디 가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맹수 한 마리만 남았다.
번득이는 붉은 눈과 함께 그보다 더 요망한 입술이 더운 숨을 불어넣었다.
“메이. 지금 많이 바빠?”
나도 모르게 눈이 도르륵 돌아갔다.
“급한 건 다 끝냈는데… 왜?”
쇄골을 따라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꼼짝없이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렸음을 직감했다.
귓바퀴를 열띤 숨소리가 휘감았다.
“잠깐 시간 좀 같이 보내는 건 어떤가 해서.”
일순 정신이 아찔하다 못해 아득해질 정도로 달콤한 음성이었다.
‘아유, 아주 선수 다 됐어. 그렇게 나오면 내가, 어? 뭐, 어? 넘어가기라도 할 거 같아?’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콜. 가자.”
당연히 넘어가지.
책상 위에 끝을 모르고 쌓여있는 서류더미들이 잠깐 걸렸으나, 지금은 황제 모드에서 잠시 로그아웃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 * *
메이블린이 루치펠의 무릎에 안착한 순간부터 라파엘은 스크린을 껐다.
그는 밤이 찾아와 모두가 잠들 때까지도 쉽사리 스크린을 다시 띄우지 못했다.
“으으, 켜면 또 무슨 장면이 나올까 무서워요. 더는 못 보겠어요. 너무 괴로워요. 여기가 정녕 천계가 맞나요? 마계의 환각 지옥에 제가 떨어져버린 것은 아닐까요?”
“보기 좋구만, 뭘.”
진절머리를 치는 라파엘과는 달리, 옥좌에 늘어진 남자는 관자놀이에 괸 손을 떼지도 않은 채 읊조렸다.
라파엘은 참지 못하고 톡 입을 비죽였다.
“관음증 변태.”
“정말 지옥으로 떨어지고 싶은 모양이지, 라파엘.”
남자의 기울어졌던 고개가 그제야 똑바로 돌아왔다. 뚜둑, 뼈마디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라파엘은 후다닥 작은 날개를 부채 마냥 살랑이며 아양을 떨었다.
“아버지 제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아시죠?”
“지금은 알아도 모르고 싶네.”
“아잉.”
“……티케가 왜 널 역겹다고 했는지 알 거 같다.”
“그렇게 심한 말은 안 하셨거든요! 귀엽다고 하셨지.”
“이제 보니 환각 지옥이 아니라 환각 천국에 사는구나. 어서 정신 차리길 바란다.”
남자는 라파엘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러내린 겉옷을 추스르는 모습에 라파엘은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가세요? 저번엔 말도 없이 루시퍼 녀석을 만나시더니.”
“오랜만에 꿈 좀 타보려고.”
신들은 종종 인간의 꿈에 개입해 시나리오를 원하는 방향대로 조종하기도 했다.
남자 역시 꿈을 조작하는 경우는 옛적에도 몇 번 있었다.
메이블린이 시스템 초반 왕궁 행정시험을 봤을 당시. 칼리안의 꿈에 회귀 전 기억을 흘려보내 그가 그녀를 돕게 만든 것도 남자의 소행이었다.
가장 최근을 꼽자면 달리아에게 메이의 귀환소식을 슬쩍 귀띔해준 것이고.
그러나 아예 꿈을 통해 인간계에 내려가는 건 이번 대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나서 처음이었다.
이를 아는 라파엘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네…? 누구의 꿈에 가신다는 말씀이세요?”
남자는 구체적인 답 대신 시원스레 웃기만 했다.
“이제 슬슬 길의 끝이 보여서. 좀 도와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