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때 아닌 소란에 실버가 화들짝 잠에서 깼다.
그와 대충 눈인사를 하고서 슈타커는 평소답지 않게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습니까?”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 별 거 아니에요. 요즘 잠을 좀 못 잤더니 피곤해서 그랬나 봐요. 아주 가벼운 감기예요. 푹 자서 지금은 말짱하고요.”
슈타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거두진 않았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꿀잠을 자서 그런지 몸이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상쾌했다.
‘근데… 아프다고 ‘들었다’는 건, 누군가 말해줬다는 소린데.’
오랜만에 보는 슈타커의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조금 불안해졌다.
“저기 슈타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내가 감기 걸렸다는 것까지.”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답했다.
“그것이… 신룡께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메이가 자기 집에 머무르고 있으니, 병문안을 오고 싶으면 와도 좋다고.”
“무슨 병문안씩이나…….”
“아마 다른 이들에게도 알리셨을 겁니다.”
“네?”
나는 여태 없는 사람처럼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실버에게로 시선을 박았다.
그는 시치미를 떼며 내 눈을 피했다.
그 이유를 알려주듯, 문이 또다시 벌컥 열렸다.
“주군! 아프시다면서요!”
“비켜!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잭, 재키. 큰소리 내지 마. 주군께선 안정을 취해야 해.”
쌍둥이를 대동한 셀턴이 둘을 제지하며 들어섰다.
그 뒤론 잭의 디저트 가게 상표가 붙은 케이크 상자를 한아름 안고 걸어오는 클라인도 보였다. 가히 천장에 닿을 높이였다.
“저기 혹시… 케이크로 성 쌓는 임무가 들어왔나요?”
“주군께서 이보다 효과 좋은 약은 없다고 늘상 말씀하시다 보니……. 죄송합니다. 너무 과했나 봅니다. 바로 돌려보내겠습니다.”
클라인이 금방이라도 사랑스러운 예쁜이들을 내버릴 태세를 취했다.
으아니, 이 양반아. 내가 잘못했어. 내 사전에 과유불급은 없어. 다다익선뿐이야. 그러니까 돌아와!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정확히는 그와 사랑스러운 17개의 예쁜이들을.
“아뇨, 아뇨! 너무 좋아서요. 클라인의 센스에 완전 치얼스. 역시 클라인. 센스남의 정의를 뒤집어 놓으셨다. 호우!”
몇 번의 박수 끝에 엄지손가락까지 척 치켜들었다. 그러자 클라인의 귓불이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그 사이 쌍둥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양 옆을 각자 차지하고 앉았다.
썰렁했던 방은 어느새 북적거렸다.
“주군, 주군!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항상 주군께서 오시기만 했지, 저희가 먼저 주군을 뵈니까 너무 좋아요.”
“신수 꼬맹이가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와서 알려 주더라니까요. 의리 있는 녀석이에요.”
“하하, 하…. 그래?”
‘의리는 개뿔! 분명 어제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모자가 쌍으로 뒤통수치기 있어? 이럴까봐 조용히 있다 가려고 한 거라고!’
나는 거의 무너지듯 침대헤드에 털썩 몸을 뉘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나!”
멀쩡한 문 놔두고 굳이 창문으로 뛰어 들어온 콜린도 이 북새판에 가세했다.
신수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탐스런 꼬리를 살랑이며 마구 어필을 해댔다.
이렇게 귀여우니까 화낼 수도 없고, 참.
나는 천장에 시선을 붙인 채 손만 들어 머리맡에 누운 콜린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다 어느새 구석에 얌전히 서있는 실버와 눈이 마주쳤다.
다소 죄책감이 깃든 듯한, 께름칙한 눈빛. 순간 무척이나 불안해졌다.
콜린은 돌아왔는데, 왜 같이 파발 역할을 했던 하일은 보이지 않는지. 궁금하면서도 더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실버. 혹시나 해서 말인데…….”
묻는 말끝이 불안하게 떨렸다.
“이제 다 끝났죠? 더 올 사람 없죠?”
“…….”
실버가 구석으로 몸을 더 욱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더 남았다.”
뜨아! 대체 언제 끝나? 아침 댓바람부터 다들 이렇게나 할 일이 없다고?
어처구니를 상실함과 동시에 또 문이 덜컹거렸다. 기껏해야 길드원 몇 명 정도나 오겠거니,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시커먼 인영들이 안으로 발을 들이기도 전에 빼액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감기! 감기감기! 저스트 콜드! 빨개 벗고 눈밭을 굴러도 이제 끄떡없을 감기!”
그러나 새로운 불청객들을 시야에 담자마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외침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칼리안과 켈른이 서있었다.
달리 말하면 에임의 국왕과 재상이.
몹시도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허겁지겁 최대한 예를 차려 둘을 맞이했다.
“저…, 전하. 국왕이란 자리가 고작 감기 걸린 사람 하나 보자고 돌아다닐 만큼 한가하진 않은 걸로 아는데요…….”
“고작이라니요. 섭합니다, 폐하. 저희 사이가 겨우 이밖에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으, 오글거리니까 제발 원래대로 편하게 대해주세요. 사석에선 그러기로 약속했잖아요.”
“제가 어찌 폐하께 말을 낮추겠습니까. 폐하께선 드높은 제국의…….”
“아! 됐어, 됐어요. 내가 말을 말지.”
나는 귀에 무슨 언사가 쑤셔 박힐지 몰라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칼리안은 몇 주 안 본 사이 뭘 먹어도 단단히 잘못 주워 먹은 모양이었다. 사람이 여간 능청스러워진 게 아니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아무래도 에드먼드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칼리안은 에드먼드가 달나라에 가재도 흔쾌히 나설 것만 같았다.
나는 별 수 없이 칼리안을 포기하고 켈른을 쏘아봤다.
“보좌관은, 아니 이젠 재상이지. 아무튼! 안 말리고 뭐했어요?”
“말려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왜죠?”
켈른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정신머리가 한 차례 더 은하수 구경 갈 줄도 모르고, 감히 답을 구한 나만 머저리가 되었다.
여기서 속이 타들어가는 건 나뿐인 듯했다.
‘돌겠네, 진짜.’
이들의 근무태만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감당이 안 돼서가 아니고, 진짜 도의적인 차원에서다. 변명하는 거 아니다.
나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다들 엄청 바쁜 때 아닌가요? 슈타커, 이번에 잉가시안 왕국이랑 하는 교역. 슈타커가 총책임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선박 재정비하고 물자 확인하려면 시간 없잖아요. 어서 가 봐요.”
“괜찮습니다. 메이와 함께할 시간 정도는 있습니다. 지금을 위해서 어젯밤을 새워 오늘 할 일을 전부 마쳐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이럴 때조차 빈틈이 없는 거죠, 공작님? 가끔은 인간적인 면모도 좀 보여줄 법 하지 않나요?
첫 타자는 글렀다. 나는 재빠르게 두 번째 타자들을 타일렀다.
“클라인, 셀턴. 곧 암흑가의 수장과 가장 큰 길드의 보스가 될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되죠. 잭과 재키도 이제 새 주군을 잘 모셔야지.”
“하지만 한 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인걸요?”
“클라인님이 직접 말씀해주신 거예요. 비록 주군께서 자신에게 수장 자리를 넘겼다곤 하나, 던켈하이트의 진정한 주인은 주군이다. 라고요.”
퍽 자랑스러워하는 종알거림 끝에 클라인이 묵례했다.
“주군의 빈자리를 어쩔 수 없이 제가 채우게 되었지만, 저의 주군은 폐하뿐이십니다. 이 사실은 제가 죽는 날까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느긋하게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셀턴도 나섰다.
“이만 포기하세요, 주군. 국왕전하께서도 행차하신 마당에 저희가 물러날 수야 있나요. 던켈하이트 광장에 파란 깃발 올려놓고 왔으니 저희를 찾을 일도 없을 거예요.”
‘내가 미쳐.’
파란 깃발은 일명 코드 블루였다.
정말 위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쓰는, 잠시 출타하겠다는 의미.
셀턴의 설명에 칼리안이 반갑다는 듯 말을 이어받았다.
“아, 나 역시 오후 일정은 전부 밀어버리고 왔네.”
“뭐, 뭐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시는데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내가 이겼으니 지금 여기 있는 것 아니겠나. 대신들과 마찰 하나 없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도 꽤나 권태로운 일이야. 가끔은 이렇게 충돌도 있어야지. 그러니 신경 쓸 것 전혀 없네, 메이블린.”
이거 완전히 권력남용이네, 이 양반! 와중에 호칭은 정상적으로 돌아온 걸 감사해야 하나?
다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그냥 막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저히 자의로 펴지지 않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손을 내저었다. 훠이, 훠이.
“아, 몰라몰라. 저 환자예요, 환자. 안식을 취해야 해요. 그럴 수 있게 다들 제발 돌아가 주세요, 네? 푹 쉬어야 빨리 낫죠.”
환자라는 한 마디에 모두 흠칫 몸을 떨었다.
쌍둥이가 벌떡 일어나고, 실버가 콜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콜린은 양몰이를 하는 늑대처럼 사람들을 몰아 밖으로 내보냈다.
처음부터 이 방법을 쓸 걸, 싶을 정도로 허무한 마무리였다.
‘어휴, 나 하나 보자고 멀쩡한 자리들을 비워둬선 안 되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난간을 타고 내려가는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제 정문을 나서는 울림이… 느껴져야 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조금 더 숨을 죽이고 청각을 극대화시켰으나 기다리는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집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아,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들릴 법한 소리였음에도 그랬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이불을 홱 걷고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부러 기척까지 지우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 응접실처럼 꾸며진 공간에 막 다다른 순간.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을 목도했다.
“씁, 동작 그만. 다들 손바닥 펼쳐요. 그리고 머리 위로 손.”
툭, 툭. 저마다 들고 있던 물건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졌다.
내 명령을 모두가 착실하게 따라줬다.
하려했던 짓과는 참 배반되게도.
“슈타커…. 그 밧줄 애저녁에 버린 거 아니었어요?”
“언젠가 또 필요할 것 같아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당당하게 말하지 마, 이 사람아. 색도 빨개서 이상해. 어디서 저런 걸 다 구해와선…. 아니, 잠깐만.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 중 은색의 뭔가가 반짝였다.
“저거, 저거… 수갑 아니야?”
내가 기함하자 클라인이 은근슬쩍 몸을 움츠렸다.
못 살아, 진짜. 그런다고 당신이 안 보이겠어?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무리들인 양 떨어져있던 칼리안도 만만찮았다.
그의 발밑에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마도구가 있었다.
원래 반듯한 사람이 돌면 더 헤까닥 한다더니. 단단히도 미친 게 분명했다.
“그대가 이렇게라도 붙잡아두지 않으면 떠날 사람이란 걸 다들 알아버려서 말이네. 자업자득인 셈이지.”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나는 끙끙대며 다소 엄한 물건들을 마법으로 들어올렸다.
공중분해 된 도구들이 허공에서 별가루처럼 부서져 비산했다.
대신 나는 양 팔을 한가득 벌렸다.
“자, 진하게 포옹 한 번씩 하고 깔끔하게 헤어집시다. 방금 건 못 본 척 해드릴게요.”
“하지만 메이…!”
“제한시간 스타트! 하나, 두울…….”
카운트다운이 떨어지자마자 쌍둥이가 질세라 달려들었다.
나는 한 사람 당 평균 다섯 번 이상의 포옹을 나누고서야, 겨우 황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 * *
“뭐 해?”
루치펠이 불쑥 나타나 메이블린의 어깨 위로 상체를 숙였다. 메이블린은 서류를 넘기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집무실 내엔 메이블린을 포함에 사람이 여럿 있었으나,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종들은 이제 루치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주저앉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들은 메이블린이 눈짓을 보내기도 전에 알아서 몸을 물렸다.
보는 눈과 듣는 귀들이 사라지자, 메이블린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일하잖아.”
쭉 뻗은 팔을 위로 더욱 당겨주며 루치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관종력인가 뭔가, 그거 안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