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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34)화 (134/185)

#134

겉으로 티는 안 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만, 내 눈에는 다 보였다.

아가레스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그를 입증했다.

곧 그에게서 듣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던 대답이 툭 떨어졌다.

“고맙다.”

“네, 그럼요. 당연히 고마워하셔야… 예에?”

방금, 방금… 고맙다고 했어? 고구마가 아니라?

차라리 땅끝마을 고구마 좀 캐달라고 하는 게 더 신빙성 있게 들릴 판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영상구를 꺼냈다.

“마왕님, 방금 그 말… 다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찍어놓고 두고두고 보게요. 저의 넘버원 활력소가 될 것 같은데.”

“시끄럽다.”

“아이, 야박하게 구시지 마시고 한 번만, 딱 한 번 만요, 네?”

“볼 일 끝났으면 썩 가거라.”

“에잉…….”

그 뒤로도 퍽 오래 매달렸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비장의 무기로 안마까지 선사해드렸지만 과연 마왕이었다. 아가레스의 스톤하트는 꿈쩍도 안 했다.

쩝. 나는 하는 수 없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아무리 마계의 공기에 익숙해졌다곤 하나,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짙은 마기를 견디기엔 인간의 몸이 꽤 얄팍한 탓이었다.

아가레스도 이를 알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서 가라 종용했다.

퍽 퉁명스러운 말투와, 전혀 그렇지 못한 얼굴로.

지금 역시 썩 꺼지라 말하지만 묘하게 찌푸린 표정에서 아쉬워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비실비실 히죽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강인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마왕님께서 절 이리도 박대하시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누가 박대하였다고…….”

아가레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나는 막 지상으로 연결되는 포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참. 그, 뿔은… 한 번 씻어서 쓰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

“그냥 뭐, 위생상의… 그런 청결 문제죠. 하핫. 하.”

나는 어정쩡하게 시선을 피하며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아가레스의 눈썹 사이가 거리를 좁혔다.

그렇다고 실토할 순 없었다.

당신 아들의 힘이 축적된 뿔이, 몇 달이나 늑대의 입 속에서 굴렀노라고.

지엄하신 마왕님께서 더 의심하시기 전에 나는 포털로 몸을 무너뜨렸다.

* * *

산란하는 빛이 가라앉았을 때는, 다시 에임에 있는 신수들의 집안이었다.

굳이 에임에 있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까닭은 그들의 거처가 제국에도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신수들은 더 이상 숨어살지 않았다.

이노아드 수도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고는, 자유롭게 쏘다녔다. 에임과 이노아드를 마음껏 오가며 교류를 즐겼다.

저주는 없었고, 사람들은 그들을 스스럼없이 일상으로 초대했다.

실버와 하일은 요즘 하도 이런저런 파티에 끌려 다니는 통에 피곤할 지경이라고 했다.

그리 투덜거리는 표정은 퍽 행복해보여서, 나는 더 피곤하길 바란다고 놀려주었다.

“에엣취! 콜록, 콜록!”

갑자기 요란한 재채기를 동반한 기침이 터져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더 맛깔나게 놀려주었을 것이다.

“아, 왜 이렇게 으슬으슬하지.”

은근한 오한이 들고 열이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얼른 누워.”

“이 정도는 괜찮은…….”

“당장.”

하일이 매섭게 눈을 번뜩였다.

그녀의 눈짓 한 번에 실버가 날 답삭 안아들어 침대에 눕혔다.

아주 마님 명령이라면 껌벅 죽는 돌쇠다웠다.

“진짜 괜찮…….”

“꼼짝도 하지 마. 내가 감시할 거야.”

하일이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곧 두꺼운 이불이 몸을 폭 덮었다.

이 정도 두께면 따듯하고도 남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전신이 계속 오들오들 떨렸다.

기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왔지만, 애초에 기력이 좋지 못한 몸뚱아리긴 했다.

황제가 되고서부터 선황이 싸질러놓은 폐정을 이것저것 뒤집고 갈아엎느라 바쁜 탓이었다.

누굴 책망할 건 아니었다. 내가 제일 신나서 온갖 일에 달려들었으니까.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날 말렸다. 몸이 이 상태인 걸 알면서도 쉬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휴일에도 몰래몰래 쉬는 척 일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똥은 빨리 치워야 냄새가 안 나는 걸 어떡해.’

그렇게 매일, 온종일을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미처 스스로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거기다 다소 지친 몸으로 마기에 오래 노출되어서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엣취! 엣취!”

내가 침대가 들썩이도록 재채기를 하자 하일이 혀를 쯧 차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어쩐지, 아까 골목을 지나가던 똥개 한 마리가 절 비웃는 거 같더라고요.”

나는 코맹맹이 소리를 달고서도 꿋꿋이 대꾸했다.

때마침 하일이 내 옆에서 감시하는 동안 나갔던 실버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해열에 좋다는 약초를 달인 물이 뜨끈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말은 그만 하고 이거나 쭉 들이키거라. 다 마시는 거 보고 나가겠다.”

으, 엄청 써 보이는데.

“얼른.”

신수들은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고야 마는 으으리의 종족이었다.

내가 오만상을 쓰며 잔을 비우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들은 겨우 물러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품에서 뭔가를 꼼질꼼질 꺼냈다.

란슬롯이 급할 때 언제든 쓰라고 신성력을 담아준 성서.

손을 얹음과 동시에 푸른빛이 일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별 효과가 없었다.

상극인 마기에 몸이 절여져 있던 탓인지 잘 들지 않았다.

란슬롯에게 직접 찾아가면 이보다야 낫겠지만, 그 역시 내가 피해야 할 감시원 중 하나였다. 이런 모습을 들킬 순 없었다.

절로 끙, 소리가 나왔다.

‘이 상태로 돌아가면 아빠랑 오빠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 같은데. 미하일도 난리법석을 떨 테고.’

드넓은 황궁에 어느 날 쏠랑 떨어지게 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슈트레커 일가 역시 나를 따라 황궁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덕분에 나는 별다른 향수 없이 황제로서 맡은 소임을 해낼 수 있었다.

던켈하이트나 에임 왕궁이야 뭐, 평소에도 텔레포트해서 갔던지라 특별히 아쉬워할 건 없었다.

비록 그 거리가 좀 늘어나고, 바빠진 탓에 자주 방문하진 못했으나 나름 만족스러운 일상이었다.

일단 내 가족들이 여전히 함께한다는 것만은 큰 위안이 되었고.

‘가끔…. 아니 종종 너무 과로하는 것 아니냐며 일과에 브레이크를 박아 넣기도 하지만.’

분명 그들 앞에서 밭은기침이라도 한 번 터뜨렸다간 당장 내일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할지도 몰랐다.

해야 할 업무가 태산인데, 그럴 순 없었다.

그럴 만한 증상도 아니었고. 하룻밤 푹 자면 금방 털고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눈치를 보다 후다닥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법으로 전령새를 만들어 에드먼드에게 보냈다.

오늘 하루만, 이곳에서 자고 가겠다고.

어차피 잠이야 거기서 자나 여기서 자나 같은 잠이지 않은가.

포로롱. 전령새는 예상보다 빠르게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파랑새의 입에서 에드먼드의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 핑계를 대시고 지난번처럼 몰래 혼자 잠행을 갔다 오시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하나 거짓이라면, 마시다스는 황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마시다스는 내게 없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신의 손을 가진, 황실 최고의 요리사.

금은보화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어도 마시다스만큼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 했다.

내 속을 훤히 아는 에드먼드는 잔악한 술수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명심하십시오. 제 눈을 피해 무리하신다면, 당분간 페하의 식탁에 치즈케이크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딸기 타르트도, 초코 머핀도, 시나몬 푸딩도 말입니다.」

이런 파렴치한 같으니라고. 사람을 못 믿고 말이야. 치사하게 마이다스를 걸고 협박해? 어쩌다 딱 한 번 그런 거 가지고 참 빡빡하게도 굴어.

‘그렇게 큰 잘못도 아니었잖아!’

나라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큼 탁월한 게 없었다.

올라온 서류더미만 주구장창 읽는 것 보다야 훨씬 나아 나는 이따금 잠행을 나가곤 했었다.

선황이 영토를 넓히기에 급급해 신경 쓰지 못한 마을들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지원해줄 영토를 내 나름대로 선별한 것이다.

밤에 정체를 숨기고 몰래 다니니 혹여 자금을 빼돌릴 우려가 있는 영주 놈도 잡기 쉬웠다.

‘들켰을 때 에드먼드랑 가족들한테 호되게 한 소리 듣긴 했지만.’

황제씩이나 되는 몸이 어딜 혼자 돌아다니냐, 요즘 수면시간도 줄였으면서 과로로 쓰러지고 싶어 작정했냐, 감히 멀쩡히 살아있는 아비 앞에서 단명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냐 등등.

내가 웬만한 악마들이 덤벼도 꼼짝 못하는 마법사다, 아무리 설명해도 잔소리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셨습니까, 폐하? 절 속이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날엔, 그대로 폐하의 부친께 아뢸 것입니다.」

지금도 벌써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마시다스의 디저트 50일치를 걸겠다는 서명까지 보내고서야 에드먼드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목 뒤가 서늘하지?’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히익.”

실버와 하일, 콜린이 삼각형 모양으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대체 언제 온 거람.’

날 보는 시선들이 하나같이 게슴츠레 했다. 셋은 순서라도 정한 것인지 차례차례 대사를 내뱉었다.

“한시도 가만히 누워있질 못하네요, 누나. 이럴 줄 알고 다시 올라왔어요.”

“잠행이라니. 너… 또 일을 사서 했어?”

“걸린 게 한두 번이면 실제론 열 번 넘게 저질렀겠군.”

아니, 어떻게 알았지? 어찌 생겨먹은 눈치야?

“안 되겠다. 실버, 콜린. 돌아가면서 감시해.”

“자, 잠깐…!”

내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두 돌쇠가 마님의 명령에 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교체는 두 시간 간격으로 하도록 하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한껏 울상을 지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팔을 한 쪽씩 잡힌 채 침대로 질질 연행되었다.

* * *

“으음…….”

나는 오랜만에 개운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끼쳐들었다.

상체를 일으키고 앉으니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실버가 팔짱을 낀 채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지막 불침번이 실버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그냥 침번인 것 같다만.

나는 그가 깨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나 고도로 집중을 기울였던 내 노력은 단박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

“메이블린!”

문이 벌컥 열리고, 얼굴 가득 근심을 올린 늘씬한 인영이 들어섰다.

“슈타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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