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33)화 (133/185)

#133

나는 재빨리 푹 파묻혔던 몸을 일으켰다.

먹물을 뒤집어 쓴 듯 새까만 검신은 그칠 줄 모르고 검집 안에서 달각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나는 그 시선을 대표해서 한 발짝씩 내딛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하일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검.

나는 하일에게 어떠한 위험요소든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검을 없애기 위해 그간 무던히도 애써왔다.

‘……다 실패하긴 했지만.’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를 불러다 용광로에 녹여도, 황궁 전체가 날아갈 만한 마법을 때려 부어도, 란슬롯의 막대한 신성력으로 비틀어도.

검은 흠집하나 가지 않았다. 지나치게 멀쩡했다.

오죽하면 루치펠에게까지 방법을 강구했었다.

그러나 인간계의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론 부술 수 없다는 답만이 돌아왔다.

결국 자기 심장은 본인에게 맡기는 게 가장 나을 듯해, 하일에게 주려고 오늘 가져온 참이었다.

‘그런데 하일이 들어오자마자 저렇게 반응하다니?’

전엔 그런 적이 없어서 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검을 쥔 나는 조심스럽게 검집을 벗겨냈다.

웅웅 진동하며 희미하게 빛나는 칼날.

일자로 꾹 다물렸던 하일의 입술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단순한 이상 현상이 아니야. 동일한 결을 가진 힘의 파장끼리 반응하는 거야.”

한 마디로, 자석의 같은 극끼리 부딪혀서 밀어내는 거나 마찬가지란 소리였다.

‘근데 같은 힘끼리 부딪히는 거라면… 그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또 다른 근원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나만큼이나 동공을 커다랗게 확장시키고 있는 실버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이 부르르 떨리며 빛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안이.

나는 실버의 윗입을 들어 올리고 혓바닥 위에 얌전하게 놓인 것을 가리켰다.

“하일. 이 뼈다귀…. 어디서 가져왔다고 했었죠?”

“이노아드를 탈출했던 지하도에서. 왜, 뭐 문제 있어? 심각한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실버한테 해 될 건 없어요.”

내가 고개를 젓자 하일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무엇인지 모를 물체가 드래곤 슬레이어와 같은 힘을 가졌다 보니, 실버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까 봐 순간 속이 탄 모양이었다.

‘실버가 그 동안 어지간히 아끼긴 했지.’

실버의 전용 자양강장제라는 저것에선 그의 침이 마를 날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걱정할 것도 없었다. 방사능 같은 유해 물질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여태 들고 있던 그의 입을 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진단을 내리는 의원처럼 말했다.

“이거, 뼈다귀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

“악마 뿔이에요.”

“뭐?”

하일의 한쪽 눈썹이 이제껏 본 적 없는 높이로 올라갔다. 그녀는 곧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참……. 별일이 다 있네.”

드래곤 슬레이어를 만든 재료와 실버의 애장품은 같은 물건이었다.

마계 왕자님께서 이노아드에 잡혔을 당시 잘린 게 분명한, 악마의 뿔.

특히 슬레이어는 한 번 정제되었다지만, 자칫 뼈다귀처럼 보이는 실버의 프레셔스는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뿔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에 실버의 몸이 잠시 굳었다.

그는 성난 울음소리를 몇 번 긁어내다가,

퉷.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뼈다귀, 아니 악마의 뿔을 거칠게 뱉었다.

침이 흥건한 뿔이 러그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나는 샐쭉 웃으며 천으로 그것을 감싸 들었다.

“이거 이젠 필요 없는 거죠?”

실버가 눈에 담기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실버의 콧잔등을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 * *

“읏차.”

나는 한 손에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품에는 한때 실버의 애착인형이었던 뿔을 지니고 마왕성 앞에 착지했다.

아까는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죽을 뻔했는지.

실버의 그 황망한 표정은 박제해서 두고두고 보고 싶을 정도였다.

“아하하, 아학, 하하하하!”

보는 눈이 없는 마계에 오자마자 나는 숨이 넘어갈듯 시원스럽게 웃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소악마 하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날 주시하기만 할 뿐,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는 않았다.

마계에서 나란 인간이 더 이상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 인식된 덕분이었다.

“쓰읍, 하. 이것도 이제 맡을 만하네.”

웃음을 추스르고서 나는 마기가 녹아있는 텁텁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처음엔 고산지대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개운하지가 않았었는데.

이조차도 이젠 적응된 것인지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거리낄 것 없는 걸음으로 마왕성 대전을 가로질렀다.

그 끝에는, 아가레스가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엄숙하기 그지없는 위엄을 뽐내면서.

“마왕님~ 오랜만이에요~ 예쁜 메이가 왔어요~”

이보다 더 산드러질 수 없는 말씨로 아양 좀 떨어봤건만. 아가레스는 썩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화색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반겨는 줄줄 알았던 터라 나는 살짝 당황했다.

그는 내가 엊그제 태워먹은 쿠키보다 더 딱딱한 낯으로 핀잔을 주었다.

“봄기운 가득 안고 온다더니, 벌써 여름이 코앞이다. 왜 이리 늦었느냐. 게으름이라도 피운 게지, 쯧.”

묘하게 투정이 실린 어투였다.

호옹, 설마 이렇게 까칠하게 구시는 게…….

나는 샐샐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래저래 일이 좀 많았거든요. 여간 바빠야지요. 근데 마왕님 있잖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그리 음흉한 낯으로 보느냐.”

“설마 저 기다리신 거예요? 네?”

나는 눈을 가늘게 접고 그를 올려다봤다.

놀리듯이 빙글거리는 내 상판 위에 아가레스의 못마땅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는 대답 대신 왕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눈 깜짝할 새 나는 널따란 대전이 아닌 아가레스의 서재에 서있었다. 휙 뒤집힌 시야 탓에 몸이 조금 흔들렸다.

한데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눈앞으로 시커먼 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아야!”

별이 번쩍이는 꿀밤이 이마에 직격했다.

아가레스가 여전히 꿍꿍한 낯으로 손을 거두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녀석이 괘씸했을 뿐이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가레스의 손바닥은 이마가 아니라 모가지까지 당장에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래서 그가 나름 힘 조절을 하여 굉장히 살살 때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나는 다소 분에 찬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자꾸 이렇게 나오시면 선물 없어요.”

“……선물? 선물… 이 있느냐? 나한테?”

포악한 곰 같던 아가레스의 기세가 삽시간에 누그러졌다.

으르렁거리던 이빨은 어디가고, 쫑긋 솟은 토끼 귀가 보이는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나는 노련한 조련사라도 된 양 드래곤 슬레이어를 그 앞으로 내밀었다.

품에 고이 챙겨온 뿔도 함께였다.

“짜잔-!”

내가 내민 당근을 확인한 우람한 토끼가 드물게 눈을 홉떴다.

나는 입꼬리를 산뜻하게 말아 올렸다.

‘후후, 트리플 에이플러스 등급의 당근 맛이 어떠십니까! 아주 끝내주지요, 네?’

“…….”

뭐야, 왜 말이 없어.

아무래도 특급 당근의 맛이 너무 황홀했던 모양이다.

답지 않게 동그랗게 뜨인 눈은 꿈벅거리기만 할 뿐, 그 외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그의 눈앞에 당근을 흔들었다.

“저… 마왕님? 이거 댁 아드님의 뿔인데요?”

* * *

아가레스는 득의양양하게 검과 뿔을 내밀고 있는 메이블린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모습이 꼭 비축해둔 도토리 중에서 가장 커다랗고 예쁜 걸 내놓는 다람쥐 같았다.

‘……어쩌다 이리 된 게지.’

그는 뻑뻑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처음엔 마계의 군주 앞에서도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다는 게, 또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가졌다는 게. 신기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까마득한 옛날, 불쑥 쳐들어와 깽판을 치던 용사 나부랭이도 그녀만큼은 못했다.

그러니 며칠 지켜보는 것쯤은 퍽 괜찮은 유흥거리가 될 듯했다.

-신이 뭐 별건가요. 알량한 권위 내세우며 전지전능한 것처럼 구는 게 뭐 그리 잘난 거라고. 가끔은 우습다니까요.

그녀는 지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경외해 마지않는 신에게 감히 비난을 토해내기도 했다.

스스럼없는 그 모습이 기꺼웠음은 굳이 부정하지 않아도 확실한 감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구석에 메이블린의 자리가 생겨버렸다.

당연한 일상에 당연하지 않게 스며들어선, 어처구니없게도 빈자리를 느끼게 했다.

그녀는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저주하기 바쁜 악마들 사이에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섞였고, 마왕인 제 눈을 똑바로 맞추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아가레스는 유쾌했다. 그것도 몹시.

다음엔 언제 마계를 방문할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시간을 다시 자각하게 될 줄이야.’

똑같은 천 년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시간이란 게 무엇인지조차 잊었을 즈음.

메이블린은 기대와 기다림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무료하기만 했던 하루하루가 그 아이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라 생각하면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전장에 뛰어든다는 소식을 듣곤 부디 메이블린이 무탈하길 빌기도 했다.

매일 밤 두 개의 붉은 달 아래에서, 참 간절히도 빌었다.

‘내가 미쳤었지.’

이제 와 한탄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따분하고 흑백이었던 삶은 그녀를 만난 뒤 완전히 뒤바뀌었다. 판에 박혔던 일과가 다채로운 색상으로 물들었다.

메이블린이 뛰어듦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버린 색이었다.

아가레스는 지금 무사히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본 것 자체만으로도 안도했다. 기뻤다.

그런데, 왕자의 잃어버렸던 힘까지 되찾아 오다니.

시키지도 않은 짓을 곧잘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다.

‘힘 조절 못한 딱밤 한 번에, 목이 부러질 게 분명한 녀석한테 말이지.’

그는 아무도 던진 적 없는 그물을 저 스스로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그래 달라 종용한 적도 없건만 혼자 알아서 걸린 듯했다. 바보처럼.

“뭐하세요, 안 받으시고. 나름 전리품이라고 가져온 거란 말이에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내미의 성의를 무시하실 거예요?”

무릇 인간이란 종족은 마계를 헐뜯고 비난하기 바빴다.

그들에게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하늘은 마땅히 우러러 보지만, 땅을 밟고 다니는 건 의당 순리인 것처럼.

아가레스 역시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자연스러운 현상일 터였다.

하지만 메이블린은 너무도 가뿐하게 그 정상이란 경계를 지워버렸다.

‘이토록 진심으로 우릴 위해준 이가, 지난 생 동안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아가레스는 자잘한 흉터가 난 손을 들어 검과 뿔을 받아들었다.

그제야 메이블린의 하얀 뺨 위로 웃음꽃이 배시시 피어났다.

“어때요, 저 완전 짱이죠. 아, 우리 마왕님 이제 어째. 왕자님이 힘 되찾으셔서 긴장하셔야 되는 건 아닌지 몰라.”

티 없이 맑은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메이블린 본인이 던진 줄도 모르고 널어놓은 그물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고.

빠져나갈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마계의 군주가, 완벽하게 걸려들어 버렸다고.

아가레스는 메이블린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스스로를 지칭하곤 하는 ‘딸내미’. 그 이름에 걸맞는 힘을 보태줄 심산이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녀가 가진 신념과, 그에 따라 앞으로 펼쳐나갈 소신 있는 행보를 지켜주고 싶었다.

아가레스가 수천 년 만에 새로이 갖게 된, 믿음이자 확신이었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고, 내가 따르고자 하는 의지다.’

그만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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