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시간이 퍽 지났음에도 거센 함성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갈대밭처럼 물결치는 환호를 뚫고, 시스템 알림음이 선명하게 울렸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종류의 알림음이었다.
[지대한 관심으로 당신의 존재감이 널리 퍼집니다!]
띠링, 띠링, 띠링.
관종력의 단계 향상을 알리는 창이 연달아 떴다.
[관종력: ★★★★]
[관심 수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당신의 칭호는 ‘위대한 관종’입니다.]
[업적 정산을 위해 업데이트에 들어갑니다…….]
늘 그랬듯이,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시스템은 해제되었다.
다음 번 시스템은 아마 800%의 수치를 채워야 할 것이다. 몇 년 전이었으면 뒷목부터 잡고 쓰러질만한 수치였다.
그러나 지금의 내겐 하등 문제될 게 없었다.
그야,
“찬란하신 제국의 태양께!”
“여신의 은총이 언제나 함께하시길!”
숨만 쉬어도 내게 환호하는 사람들이 이리 많으니까.
죽지 못해 살던 내가, 여기까지 왔다.
수많은 죽음의 문턱과 고비들을 넘어, 마침내 이 자리까지 섰다.
‘관심 받지 못하는 관종’이나, ‘거슬리는 관종’은 더 이상 없었다.
‘사랑받는 관종’과 ‘잊히지 않는 관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게 붙여진 칭호였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이 시스템의 끝은 과연 어디일지.
알림창에 따르면, 관종력은 이제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끝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길.
그 여정의 종막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던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새삼스레 그 너머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종 단계에 다다르면 어떻게 될까. 그대로 시스템이 영영 사라질까. 아니면…….’
이 세계에 떨어진 후로 단 한 번도 담아본 적 없는 가정이 떠올랐다.
‘지구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
난간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한 때 불알친구였던 신제우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놈 딱 한 명한테만 미안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지구로 돌아가는 건, 미안해할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나는 그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지, 미안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되찾은 일상인데. 다신 잃고 싶지 않아.’
시스템의 끝은 반드시 이 세계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나는 티끌하나 없이 청명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신이랑 담판이라도 떠야지 뭐.’
그들에겐 고작 개미 한 마리가 발가락을 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가 내린 뿌리를 지킬 것이다.
* * *
쾅!
높다란 문이 거센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를 밀치고 한 여인이 성급한 걸음을 옮겼다. 퍽 성난 목소리가 매섭게 떨어졌다.
“모로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얼토당토 않는 신탁을 내린 거지?”
“언질도 없이 이리 쳐들어오다니. 마계 놈들도 그대 보단 체면 차릴 줄 알겠어.”
“한가한 소리는 집어치워. 죽여도 모자란 녀석에게 감히 황관을 씌워줘?”
에리스의 고함에도 모로스는 느긋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입매가 가늘게 늘어졌다.
“내 나라이기에, 내 뜻대로 하겠다는데. 왜 그리 열불을 내지? 그대가 노할 이유라도 있나?”
“네가 방종한 나비 한 마리가 태풍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은 못 해? 그 때가선 늦어!”
“방종이라…… 하.”
살얼음 같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실소가 찰나 터졌다.
분명 웃는 표정일진데, 에리스를 응시하는 눈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대가 이리 노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아, 혹 이런 흉심을 품고 있었나. 나 역시 티케처럼 추방되기만을 아득바득 고대했으나…….”
그녀는 실소를 지워내며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와 함께 응결되었던 공기에 파문이 일었다.
“상황이 틀어져서 초조한가 보지.”
“…….”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시선.
무지근한 위압감이 순식간에 공간을 지배했다.
말문이 막힌 에리스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허를 제대로 찔린 탓이었다.
모로스의 말마따나, 이노아드는 그녀의 관할이었다. 이노아드의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수호신이 모로스였다.
그러니 정복 전쟁이 일어났다 함은, 시나리오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에리스는 그 죄를 정식으로 따질 계획이었다.
이노아드가 대륙을 지배하면, 여타 수호신들의 시나리오까지 어그러질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모로스를 궁지로 몰아갈,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에리스는 티케를 닮아가는 모로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들을 시나리오에 욱여넣고 강제하지는 못할망정,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꼴이라니.’
그 한심한 작태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참에 같이 추방시켜 우환을 완전히 뽑아두고자 했다.
한데 메이블린 슈트레커. 그 교활한 계집이 또 끼어들어선, 판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도 모자라 정복한 속국들까지 죄다 해방시켰다.
황제가 되고서 부턴 도리어 사죄의 의미라며 공물을 바치기까지 했다.
동대륙의 모든 시나리오가 엉망진창이 될 뻔했던 사태는 그렇게 짧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간 준비해온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에리스만 속이 말이 아니었다.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모로스가 픽 조소를 흘렸다.
“퍽 입이 쓰겠군 그래.”
명백하게 비웃음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에리스의 고운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모로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에리스가 씩씩대며 몸을 돌렸다.
쾅! 문이 거칠게 여닫혔다. 모로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잔을 들었다.
붉은 포도주가 원을 그리며 넘실댔다. 고요한 적막 끝에 그림자 몇 개가 어른거렸다.
물러나 있던 모로스 산하의 천사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모로스님. 어찌하여 그런 신탁을 내리신 겁니까. 메이블린 슈트레커를 다들 전염병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에임의 시나리오를 망친 걸로도 모자라, 이노아드까지 침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자를 제위에 올리시다니요. 다른 수호신들께서도 언제까지고 가만히 계시진 않으실 겁니다.”
“시나리오가 완전히 엉켜버려서,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천사들의 보고가 끝났음에도 머리가 소란스러웠다. 금전의 앙칼진 목소리가 모로스의 귓가를 맴돌았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모로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에리스가 다소 과격하게 반응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메이블린의 신속하고 현명한 전후 처리로 대륙 전반의 시나리오는 지켜냈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가 처리하게 둔 것이 문제였다.
메이블린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조차 모르게 지나가야 할 작은 왕국의 엑스트라였다.
시나리오의 소모품으로나 쓰여야 하는 엑스트라.
그런 그녀가, 제국의 황제가 되어버렸다.
이노아드의 시나리오가 제대로 꼬인 것이다.
그 탓에 모로스는 에리스를 비롯한 다른 수호신들에게까지 점차 압박을 받고 있는 추세였다.
현 시나리오를 중단하고 다음 시나리오에 들어가거나, 최악의 경우 에임처럼 타신들의 손에 시나리오를 위탁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모로스는 여상하게만 굴었다.
“우리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이 걱정이느냐.”
천사들의 낯빛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결국 그들 중 한 천사가 용기를 내 물었다.
“모로스님….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가, 인간들이. 모로스님께서 이런 치욕과 불화를 감내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
어색한 침묵이 사이를 갈랐다.
묵언이 길어질수록 천사들이 날개를 접고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열렸다.
“나도 한때는… 그리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내 나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왕국을 보살피는 한 신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지.”
허공에 머무르던 모로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에리스를 대할 때와는 달리 소담한 온기를 품은 시선이었다.
“그 신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나라를, 사랑했다. 그 나라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그들이 사는 세상까지 사랑했다.”
그 신이 누군지는 굳이 지칭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최후가 어땠는지도.
“……그 끝은 결국 추방이었잖습니까.”
천사들이 탄식 섞인 답을 흘려보냈지만 모로스의 태도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무슨…….”
모로스의 빛나는 두 눈이 인간계를 향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 역시, 그들의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 * *
“하, 힐링 된다. 완전 좋아.”
나는 황제의 체면도 잊고 도톰한 러그가 깔린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거렸다.
위엄은 대신들 앞에서 차리는 걸로 충분했다. 어차피 지금 보는 눈이라곤 딱 네 개 뿐이었다.
비록 그 눈들이 내 머리통만하긴 했지만.
“아, 폭신폭신해.”
나는 현재 커다란 두 늑대 사이에 끼어서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봐야 하는 정무는 에드먼드가 대신 맡아준다기에 냉큼 맡기고 피신했다.
그는 오후까지만, 이라는 조건을 붙였지만 저녁에 돌아가도 괜찮을 것이다. 라고 나는 혼자 결론을 내렸다.
에디는 광활한 인내심과 훌륭한 일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이제 대빵인데 뭘 뭐라 하겠어? 황제를 혼낼 거야 꾸짖을 거야 뭐야.’
어떻게 봐도 그림이 안 나오는 짓은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는 그간 깃털처럼 날라 다니는 내 이미지에 어떻게든 엄숙함을 실어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따로 둘만 있을 때 한탄을 쏟아낸다면 몰라도, 곁에 사람이 있을 땐 깍듯이 예의를 차릴 테다.
‘돌아가면 꼭 시종 하나는 끼고 다녀야지.’
그리 전략을 짜며 나는 팔을 뻗었다.
“여기가 기분 좋아요? 여기?”
내가 말랑말랑한 목덜미 살을 긁어주자 실버가 그르릉거렸다. 콜린은 고로롱거렸고.
지금쯤 에드먼드의 미간에 깊게 자리 잡고 있을 주름을 걸고 단언하건대, 신수들의 털에 폭 파묻혀 그 촉감을 만끽하는 것만큼 황홀한 힐링은 없었다.
나는 얼굴을 부비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들 털 손질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서로 해주나? 엄청 부드럽네. 향기도 나요.”
“너 온다기에 정성스레 몸단장 한 거다, 그거.”
때마침 문이 벌컥 열리고 하일이 들어왔다.
그녀는 거침없는 폭로와 함께 작은 뼈다귀를 하나 던졌다.
실버가 그것을 덥석 받아 물었다. 내게도 익숙한 뼈다귀였다. 실버가 맛이 좋다며 자주 물고, 빨고, 핥았으니.
그러나 나는 휘둥그레 뜬 눈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다.
갑작스런 하일의 등장도, 실버와 콜린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게 내 방문 때문이라는 것도, 그리 말하는 하일에게서도 똑같은 향이 난다는 것도. 딱히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었다.
다만,
‘저게 왜 저래?’
방구석에 세워두었던 검이 별안간 진동하며 검푸른 빛을 뿜어내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쟁 통에 가이즈에게 빼앗은 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