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웬일로 빨리 나왔네? 저번엔 시간 좀 걸리더니.”
“그럴 만한 일이 좀 있었어요. 어유, 아직도 소름이 다 안 가셨네. 얼른 가요.”
메이블린이 팔을 벅벅 문지르며 하일을 재촉했다.
하일은 영문도 모르고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해 날개를 펼쳤다.
냉큼 올라탄 메이블린은 실버에게도 얼른 올라오라고 손을 팔랑였다. 이윽고 강풍과 함께 하일이 날아올랐다.
때마침 황궁에 물자를 상납하러 온 상단주와 일원 몇몇이 그 옆에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창공을 가로지르는 드래곤이 까만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보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저분이… 그 분이시지? 지상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이 유일하게 등을 허락한 인간.”
“이노아드를 정복할 수 있었음에도 삼키지 않으셨지. 대륙 토벌 중에 이노아드에게 정복당했던 속국들까지 전부 본래의 이름을 지키게 해주셨다 던데.”
“천하의 마탑주도 저 분 앞에선 꼼짝도 못 한대.”
“세간에 은밀하게 도는 소문으론, 태자 전하께서 다음 대 제위에 올릴 인물로 정해두었다고도 하죠.”
상단일을 하고 있는 만큼 그들은 셈속이 빨랐다. 무수한 이해관계를 되짚어 본 끝에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그분이 만약 이노아드를 다스려 주신다면, 정복욕에만 눈이 멀었던 전대 황제와는 달리 정말로 이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주시지 않을까?”
“그동안 무리하게 영토만 넓히느라 많이 황폐해지긴 했지. 우린 꼼짝없이 황제와 교황청에게 속아 넘어갔고.”
“이젠 단비를 내려줄 현인이 필요해.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만큼 강인하고, 어진 사람이.”
곁에서 단원들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상단주가 눈살을 슬 찌푸렸다.
“그러니까 너희들 말은 지금… 아까 그 분이 그 사람이라는 게냐? 큰일 날 소리들을 하는구나. 여긴 황궁이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쩌긴 뭘 어쩝니까. 그냥 듣는 것이죠 뭐. 요즘 제국 전역이 이미 그 분으로 떠들썩하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살던 귀족 놈들이야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평민들은 다들 벌써부터 동조하는 분위기고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도 있잖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단주도 목소리를 낮추라 종용하기만 할 뿐 단원들의 언행을 딱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내심 동조하고 있을뿐더러, 틀린 말도 아니었다.
드래곤의 씨가 마른 고대부터 공공연하게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드래곤이 등을 내준 인간은, 이노아드를 통치할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메이블린의 행보는 그 자격을 거머쥐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메이블린 일행이 자취를 남긴 구름길을 보며 아쉬운 듯 눈을 빛냈다.
* * *
‘또 헛소리하면 황태자고 뭐고 입에 당근부터 쑤셔 넣어줘야지.’
그리 굳게 다짐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먼드를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3주 전이었다.
그에게 청천벽력을 들은 뒤론 제국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앞으로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날이었다. 그것도 에임의 거대 인사들과 같이.
“실버, 하일! 준비는 다 끝났어요? 켈른이랑 칼리안은 먼저 보냈어요. 식 시작하기 전에 란슬롯이랑 인사라도 짧게 나누라고.”
재상은 물론이고 에임의 국왕까지 참관하는 식.
실버와 하일은 그 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을 예정이었다.
“누나!”
내 목소리를 듣고 콜린이 드레스룸에서 뛰쳐나왔다. 날 보자마자 덥석 안긴 품에서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이야, 이렇게 보니까 아주 신사가 다 됐네.”
“헤헤.”
감탄 섞인 칭찬에 콜린이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콜린은 평소와 다르게 멀쑥한 모습이었다.
머리도 단정하게 손질해 넘기고, 깔끔한 블랙 수트에 크라바트까지 맸다.
나는 살짝 흐트러진 크라바트를 매만져주며 물었다.
“엄마랑 아빠는 어딨어?”
“여깄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버와 하일이 드레스룸에서 마저 나왔다.
“와.”
둘의 모습을 보는 순간 금전보다 더 깊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비단 같은 은발을 단정하게 묶어 내린 실버는 그만큼이나 새하얀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로열블루 색의 긴 띠가 왼쪽 어깨부터 사선으로 상체를 가로질렀다.
화룡점정은 하일이었다. 자칫하면 못 알아볼 정도였다.
발끝까지 늘어진 검은 드레스는 그녀의 큰 키와 체형에 딱 맞게 어우러졌고, 그 위를 덮은 긴 케이프가 움직임을 따라 바람처럼 너울거렸다.
나는 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야, 신수들이 아주 훤하네요. 진짜 신수여서 그런가? 완전 빛이 나요. 밤에 등불 안 켜도 되겠어요. 둘 다 수여식 한다고 너무 빼입은 거 아니에요?”
내가 입도 못 다물고 연신 칭송을 쏟아내자 하일이 멋쩍게 미간을 좁혔다.
“……별로 안 어울려?”
“아뇨, 아뇨.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애초에 그러라고 디자이너도 보냈었고.”
오늘을 위해서 이들의 옷에 저택 한 채 값을 녹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나는 끝내주는 두 미인 사이에 팔짱을 끼고 섰다. 콜린도 실버의 손을 잡았다.
“어서 가요. 지금쯤이면 개회사가 시작했겠네요.”
발 아래로 마법진이 푸른 장미처럼 피어났다.
그 푸른빛이 사라졌을 땐, 이노아드의 교황청 앞이었다.
교황청 내의 성 헤르스만 광장은 수다한 인파로 북적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깍듯한 동작으로 안내했다.
판테온과 비슷한 구조의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시끌시끌하던 소란이 조금 잠잠해졌다.
거대한 붉은 융단 끝 제대 뒤에는 귀빈석이 늘어져 있었다. 칼리안과 켈른은 그곳에 앉아있었다.
신수들은 제대 앞에 서고, 나는 칼리안 옆에 앉았다.
칼리안이 내 쪽으로 고개를 슬 기울였다.
“딱 맞춰 왔군.”
“제 특기죠. 그나저나 국왕 전하께서 참석해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한때 도움도 받은 입장으로서, 여기에 몇 시간 앉아 앞날을 빌어주는 건 일도 아니지.”
“전하는 참 너무 반듯하셔서 문제예요.”
“그대보다야 더 할까.”
나는 그의 팔꿈치를 툭 밀치는 것으로 짧은 담소를 마치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분주하게 식을 지휘하는 에드먼드가 보였다.
지난 번 만남에서 에드먼드를 조금 타박하긴 했다만, 그가 바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종전 이후 교황청의 실체를 낱낱이 알리기에 분주했다.
내가 실비아로 지내면서 착실히 모았던 각종 자료와 증거들도 그에 한몫했다.
추악한 진실이 세상에 까발려지자 분노한 국민들은 저마다 교황청에 돌을 던지기 바빴다.
결국 교황을 비롯해 그의 썩어빠진 정치질에 동참한 신관과 사제들은 전부 참수 당했다.
탁 트인 광장,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교황이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 했던 죽음이었다.
란슬롯은 그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전장에서 교황을 죽이지 않고 끝내 살려둔 것이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나머지 응징도 마쳤으면 좋았을 텐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신녀였다.
그 사이 어디로 몸을 숨긴 건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르고 도망갈 꼬리 역할까지 철두철미하게 남겨두었다.
각종 음모와 사건의 뒤를 끈질기게 추적해봤자 나오는 건 삶의 끄트머리까지 몰린 가련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돈과 권력으로 매수하거나 협박하기 쉬웠을 테니.
악마 카임을 소환한 이도 신녀임이 분명하건만, 되레 자기가 한 것이 맞다며 나서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그들조차 하등 조무래기들뿐이었고, 주요 인물들은 자살하거나 의문의 사고로 명을 달리한 처지였다.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내며 씁쓸한 속을 애써 달랬다.
‘그게 좀 아쉽긴 해도 더 이상 나타날 순 없을 거야. 당분간은 한시름 놔도 되겠지.’
그렇게 일련의 징벌 기간이 끝나고. 추락한 신권의 위세를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란슬롯을 교황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가장 먼저 일었다.
그는 신권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교황, 헤르스만의 피를 이은 유일한 자였으므로.
더불어 그의 직계 혈통에게만 전해진다는 빛나는 청발.
그것은 막강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는 확증이기도 했다.
“정말 이 날이 되어서야 얼굴을 비출 줄은 몰랐네만.”
“이렇게라도 절 다시 본 것에 감사하세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네만. 별로 안 느껴지는 모양이지.”
어느새 일을 마치고 내 옆자리를 채운 빤질한 인영이 말을 걸었다.
일전에 에드먼드가 말했던 ‘그 날’은 오늘이었다.
바로, 란슬롯이 본래의 자리를 찾는 날.
“쉿, 들어오네요.”
내가 검지를 입술에 붙임과 동시에 술렁임도 잔잔해졌다.
눈부신 청발을 흩날리며 한 남자가 융단의 끝에서부터 걸어왔다.
교황만이 입을 수 있는 대례복은 원래부터 그의 옷이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어울렸다.
흰색 영대가 천장을 맴돌고 나가는 바람에 이따금 펄럭였다.
그가 떼는 걸음마다 금실로 휘황찬란하게 짠 망토가 은은한 조명 아래 빛났다.
꼿꼿하지만 결코 오만하지 않은 기세.
그 오묘한 분위기를 이끈 채 제대 앞에 다다른 란슬롯이 고개를 숙였다.
인간과 섞일 수 없는 짐승이라 손가락질하며 모두가 기피하고 꺼렸던, 신수들에게.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선을 긋고 일상에서 밀어냈던 신룡이, 교황의 머리 위에 관을 얹었다.
늑대 신수가 대대로 전해오는 성유물 지팡이를 란슬롯의 손에 쥐여 줬고, 그 둘의 아이가 성배를 내밀었다.
새 교황이, 신수들에게 성유물을 하사받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수가족이 더 이상 배척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수들의 지위 회복은 물론이고, 우리와 같은 친밀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복기시켜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란슬롯은 한 손엔 화려하게 장식된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엔 성배를 들고 숙였던 상체를 들었다.
실버와 하일, 콜린이 란슬롯과 마주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어쩐지 가슴 한켠이 빠듯해졌다.
오로지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신수들이 예전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고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나는 란슬롯의 교황 즉위식 때 신수들이 반드시 서줄 것을 부탁했었다.
‘에드먼드와 란슬롯은 흔쾌히 수락했고, 오히려 실버랑 하일을 설득하느라 애먹었었지.’
그래도 지금 이 모습을 감상하고 있자니 그 정도 노력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치형으로 길게 난 창에서 희부연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가 새 교황의 탄생 앞에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했다.
“이로써 란슬롯 러셀 헤르스만이 20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음을 공포한다.”
단단한 하일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찬란한 그 분위기 속에서, 란슬롯과 찰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모양으로 자그맣게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분홍색 눈이 사붓이 휘어졌다.
나 역시 그저 온 힘을 다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