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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29)화 (129/185)

#129

지나가는 투정처럼, 가볍게 흘리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안심해선 안 되었다. 농담 같은 진담은 언제고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더 말을 덧붙일까 딱 잘라 일갈했다.

“안 돼, 일조권 침해야. 그렇게 큰 탑이 들어섰다간 왕궁까지 그림자에 가릴걸.”

“……이유가… 고작 그거야?”

똑부러지는 내 답에 루치펠이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 날 응시했다. 황당하다는 듯 미간이 잔뜩 좁혀진 채였다.

물론 나는 개의치 않고 2연타로 거절을 날렸다.

“고작이라니. 일조권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게다가 나는 이 생태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피라미들이 사는 곳에 상어를 풀어 놓을 순 없지.”

“헤엄도 안 치고, 잡아먹지도 않고 가만히 있을게.”

“그런다고 연못이 바다가 되진 않거든. 연못에 산다고 상어가 피라미들이랑 같은 물고기가 될 수도 없고.”

잠자코 나의 생태론을 듣던 루치펠이 한 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넌 뭔데? 상어야, 피라미야?”

“나? 나야 당연히…….”

나는 손을 뻗어 루치펠의 가슴팍을 천천히 밀었다. 커다란 상어는 내 조막만한 힘에도 밀려 벤치에 드러눕는 자세가 되었다.

그 위로 상체를 겹친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어부지. 상어 낚는 어부. 어때, 걸렸어?”

루치펠의 눈이 요사스럽게 휘어지고,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곧 매력적인 음성이 그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완전 걸렸지. 제대로 월척 잡은 거 축하해, 메이블린.”

달큰한 숨이 불과 몇 마디 앞에서 터졌다.

가느다랗지만 힘 있는 손가락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기꺼이 내 손아귀에 들어온 상어의 저음은 느릿하게 귓바퀴를 핥았다.

“잡은 물고기, 지금 먹는 건 어때?”

날 직시하는 붉은 눈동자가 요요한 빛을 띠며 전신을 덮쳐왔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낑낑대며 생각했다.

잡은 건 난데… 왜 내가 잡아먹히는 기분이 드는 거지.

* * *

“하일, 여기서 내려요.”

“여긴 마을 광장 한복판이잖아. 좀 더 인적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아뇨. 여기서 내려요.”

단호한 내 어조에 하일이 마지못해 날개를 접었다.

길지 않은 하강이 끝나고 그녀가 발을 내딛은 곳은 이노아드 수도와 인접한 마을 한가운데였다.

한마디로, 사람이 제법 지나다니는 공간.

내가 하일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리자마자 그녀는 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물론 주위 시선을 피하기엔 이미 늦은 때였다.

“엄마, 저것 봐. 신룡님이야!”

“쉿, 들으실라. 조용히.”

“와, 소문보다 더 웅장한 걸.”

“저 은발 남자는 늑대 신수인가?”

광장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저마다 몇 마디씩 뱉어냈다.

나와 왕국 사람들 몇몇 외엔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신수들은 이 상황을 굉장히 못 견뎌했다.

이를 알면서도 나는 부러 인구가 많은 곳으로의 착지를 감행했고.

제국에 오는 것쯤이야 텔레포트 하는 게 기실 더 편하긴 했다.

그럼에도 굳이 하일을 타고 오는 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신수들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지.’

같은 사람일 순 없지만 적어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즐거우면 웃고, 짜증이 나면 화도 내고, 슬프면 이따금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같은 존재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랬다.

자주 봐야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더 이상 무작정 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테니까.

‘오늘로 이렇게 다닌 지 한 달 정도 됐나.’

사람들은 벌써부터 신수들을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선뜻 다가오길 두려워했지만, 이젠 아니다. 신비로움과 호기심이 깃든 시선들이 대다수였다.

이조차도 시간이 더 흐르면 평범하게 바뀔 것이다.

마치 옆집 이웃을 지나가다 마주친 것처럼.

“여기서부턴 교체할까요?”

수도 시가지에 들어서고 나선 말 대신 실버를 탔다.

하일과 마찬가지로 실버도 공평하게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복슬복슬한 은빛 갈기를 휘어잡고서, 대낮 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했다.

늘어난 인파에 따라붙는 술렁임은 더욱 커졌다.

“하일, 많이 창피해요?”

“실버보단 내 처지가 나으니 그냥 입 다물고 가는 거야.”

하일이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일이 자기는 일행이 아닌 척 떨어져서 걷겠다는 걸, 사정사정해서 같이 올라탄 상태였다.

늑대로 변신해 말하지 못하는 실버만 으르렁댔다.

빗발치는 시선을 뚫고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신수들의 얼굴이 군고구마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지나가던 시종에게 시원한 레모네이드 두 잔을 부탁했다. 그는 군말 없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내가 뭐 대단한 인물이어서는 아니고-물론 에임의 특사 자격으로 오긴 했다만- 이 으리으리한 궁의 주인이 내게 황궁 프리패스 이용권을 쥐여 준 까닭이었다.

몇 분 지나 시종이 트레이에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가지고 왔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이거면 충분해요. 고마워요.”

나는 신수들에게 잔을 하나씩 내밀며 앉아있던 분수대에서 엉덩이를 뗐다.

“하일, 실버. 오랜만에 구경하고 있어요. 영 껄끄럽다 싶으면 돌아가도 좋고요. 저는 전하랑 이것저것 정리 좀 할게요.”

곁에서 내 말을 듣던 시종이 눈치 빠르게 새로 건축한 정원을 안내해드리겠다며 신수들을 이끌었다.

다행히 말주변도 웬만큼 갖춘 사람이었는지 하일과 실버의 낯빛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안심하고 에드먼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내가 노크할 필요도 없게끔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날 맞이했다.

“잘 지내셨어요?”

“그대가 조금 그리웠단 걸 제하면, 나름 잘 지냈지.”

무슨 몇 달 만에 만난 것처럼 얘기하는데, 고작 사흘 전에도 만났었다.

나는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한 뒤 그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종전 후 에드먼드와 나는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오는 중이었다. 이노아드와 에임 사이의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고, 이노아드는 패전의 대가로 일정한 공물을 향후 십 년간 에임에게 바치기로 약조했다.

더해서 내가 강경하게 주장한 요건이 하나 있었다.

“속국들에겐 소식 잘 전달했어요?”

“직전에 대신들이 모두 당도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둔해 있던 군대는 열흘 전에 전부 물렸고.”

바로 제국의 정복 전쟁에 휩쓸린 속국들을 전부 해방할 것.

에임은 승전했음에도 굳이 이노아드를 지배하지 않았고, 그건 이노아드 역시 마찬가지여야만 했다.

다행히 에드먼드의 빠른 일처리 덕분에 이 문제는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확인할 건 이제 한 가지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대충 이런저런 얘기로 서두를 달구다, 본론을 꺼냈다.

“전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왜 아직도 즉위식을 올리지 않으세요? 이제 거리낄 것도 없잖아요.”

교황청과 황궁의 썩은 유착관계가 밝혀지자 민심은 빠르게 에드먼드 쪽으로 기울었다.

더불어 황제가 죽은 시점에서 황위를 이을 유일한 핏줄은 그뿐이었다.

황제가 그간 적수를 모두 없애고자 정통 혈통을 가진 이들을 전부 발아래 묻은 탓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 잔혹한 열망이, 되레 적을 황위에 올리게 될 줄도 모르고.

그렇게 모든 정황이 에드먼드가 황제가 되기까지 순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황관을 쓰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기꺼이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차일피일 즉위식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대체 무슨 생각 중인 거람.’

속모를 얼굴로 그가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무리한 전쟁으로 황폐해진 영지와 혼란스러운 내정을 수습하는 게 먼저라서. 일에도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지.”

“그래요? 근데 저는 왜… 전하께서 황위를 이어받길 거부하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거부한다고? 내가?”

“네.”

즉시 떨어진 대답에 에드먼드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 눈은 못 속이겠어.”

한차례 마른세수를 하던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자리 때문에 내 모든 가족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는데, 내가 어찌 편히 앉을까. 아직도 살려달라 몸부림치던 그들의 모습이 선명해. 나는 도저히 그들을 외면하고 홀로 안락을 추구할 수가 없어.”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에드먼드는 잠시 행간에 머무르며 침묵을 유지했다.

광활한 슬픔을 머금고 가라앉은 눈.

곧 그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인재가 있기도 하고.”

어둡게 침전했던 두 눈동자는 더 이상 옛 기억에 빠져있지 않았다. 묘한 기대감이 그 안에서 부풀었다.

반면 나는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옥죄는 듯했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는 거죠? 저 지금 상당히, 아니 매우 많이 불안하네요.”

“나는 그대만큼 황위에 적합한 사람도 없다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떤가?”

기어코 폭탄이 터져버렸다.

‘이,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포탄을 직격으로 맞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머리가 띵한 걸 넘어서 어질어질했다.

“하유, 아주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제가 아무리 관심을 좋아한다지만 그렇게 큰 거 먹으면 탈나요.”

“글쎄, 황관이 그대보다 작으면 작았지 결코 크다 보진 않네만.”

이런 간사한 뱀 같으니라고! 기어이 강행할 셈이다 이거지!

에드먼드는 쉽게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결국 별 수 없이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속이 안 좋네요. 송구하오나,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요?”

“벌써 일어났지 않은가.”

“당분간은 정신 건강을 위해 가급적 자주 보지 않는 게 현명하겠어요. 차 잘 마셨어요, 전하. 그럼 저는 이만.”

이 이상의 헛소리는 불허였다.

나더러 황제가 되라는 것 보다 더 황당무계한 소리가 있겠냐마는.

나는 그가 붙잡을세라 후다닥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문턱을 넘기 전, 에드먼드가 날 불렀다.

“메이블린.”

“왜, 왜요.”

“그래도 그 날에는 얼굴을 볼 수 있길 기대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에드먼드는 입을 다물었다.

감사하게도 황제 어쩌구 소리를 더 찌끄릴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 날이라면, ……하는 날이지.’

당분간은 에드먼드를 찾지 않겠다 일렀지만, 그날만큼은 결코 빠질 수야 없었다.

나는 문 밖에 다리를 걸쳐놓은 채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네, 네. 그럼 그 때 뵐게요. 좋은 오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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