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28)화 (128/185)

30. 모든 것은 제자리로

#128

겨울 끝자락의 사붓한 햇살이 에임의 왕궁 위로 내려앉았다.

궁전은 처참했던 흔적은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말짱한 모습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메이블린의 지휘 아래 왕궁은 빠르게 복구되었다. 마탑주가 그녀의 명이라면 꼼짝없이 다 들어준 덕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리안과 대신들은 전보다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치자, 각 부처의 인사들이 회의장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메이블린과 켈른 역시 정무를 마치고 느적느적 나왔다.

“하암~”

나른한 햇살 탓인지 하품이 절로 나왔다.

깍지 낀 손을 하늘로 쭉 올리며 메이블린이 별안간 픽 웃음을 흘렸다.

“켈른. 요즘 전하 말이에요. 좀 귀여워 보이지 않아요?”

호칭이 저하에서 전하로 바뀌었다지만, 칼리안은 여전했다.

선왕과는 다르게 대신들의 능력을 곧잘 인정해주었고, 우수한 인재를 발견하면 즉시 발탁해 곁에 두었다.

사려 깊고 자애로운 왕. 국민들은 선왕의 부고 소식도 빠르게 잊고 새로운 국왕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물론 여전한 건, 켈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체 눈을 어떤 모양으로 떠야 지엄하신 국왕이 귀여워 보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켈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해대는 메이블린을 구석구석 살폈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관찰하던 그는 동조해주는 대신 딱 잘라 답했다.

“그 무슨 해괴한 소린가.”

“아니 왜, 아까 졸고 계신 거 못 봤어요?”

“잠깐 봤긴 했다만… 그 사실과 귀여움의 상관관계는 대체 어찌 생각해야 발생하는 것이지?”

다소 질책하는 어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메이블린은 당당했다.

도리어 칼리안의 귀여움을 반드시 전파해야한다는 의무라도 있는 양, 쉼 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휴, 제대로 안 보셨구나. 저처럼 방심하지 않았으면 그 절경을 공유할 수 있었을 텐데. 요즘 우리 전하께서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하긴, 국왕 되신 후로 일이 좀 많이 밀려야죠. 매일같이 밤새시잖아요.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회의 도중에 갑자기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시는 거 있죠? 다행히 대신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하기 바빠서 저밖에 못 본 것 같지만. 아, 켈른도 잠깐 보긴 했다고 말했었나요?”

잠시 키득거리던 메이블린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다시 종알거렸다.

“여기서 화룡점정은, 회의 종료 10분 전이에요.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눈이 침침해서 보고서 가까이 본 척, 일명 ‘나 안 졸았다’ 티를 내시는 거예요. 진짜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생전 안 그럴 것 같은, 아니지. 생전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더 귀여워 보이더라구요. 아, 내일도 이 시간쯤에 회의하면 안 되나? 한 번만 더 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은데.”

이쯤에서 켈른은 생각했다.

귀에서 피가 나나?

그는 괜스레 귓바퀴를 더듬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계속 이대로 두었다간 정말로 피가 날 것 같았기에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그러니까 대체 어디가… 흐악!”

그러다 느닷없이 펄쩍 뛰었다.

“지금 내 앞에서 그런 얘길 해도 되는 거야?”

분명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부터 뒤쫓은 거지?

불쑥 나타난 루치펠이 메이블린과 켈른 사이에 껴선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의 묘행에 완벽하게 적응한 메이블린만 태연스레 몸을 돌렸다.

“언제 왔어? 내가 간다니까.”

“아무래도 한눈팔까 불안해서 매일 와야겠어.”

“내가 무슨 한눈을 팔았다고.”

“그럼 누가 그렇게 귀여웠는데. 응? 말해 봐.”

“아이,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실까.”

“아니, 말해보라고. 그래야 앞으로 네 취향에 맞춰서 나도 귀여운 짓 좀 해보지.”

곁에서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켈른은 입을 떡 벌렸다.

귀에서 피가 나는데 이어 턱이 빠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마탑주… 맞아? 저 당장이라도 쓸개 하나 빼줄 것 같은 놈이 그 냉혈한이라고?’

그는 턱을 부여잡으며 둘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왠지 이곳에 더 발붙이고 섰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 * *

“달리아 선배. 곧 티타임인데, 차랑 디저트를 내올까요?”

“그래. 지금쯤 래디쉬가 사과파이를 굽고 있을 거야. 가서 도와줘.”

“넵!”

싹싹하게 대답을 한 사용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의 이름은 엘. 오늘부터 슈트레커 자작가에서 일하게 된 신참이었다.

이렇게 큰 귀족들의 저택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라며 떨던 그는, 제법 잘 적응해나가는 중이었다.

엘은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달리아를 가장 잘 따랐다.

첫날에 그녀에게 들은 이상한 말엔 아직도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신참. 노파심에 말해두는 건데, 우리 아가씨한테 반하지 마. 힘들겠지만, 아무튼 반하면 안 돼. 알았지?

그녀는 무척이나 중요한 사항인 듯, 이 말을 몇 번이고 거듭 반복했었다.

엘은 정말 의아했다. 메이블린 아가씨는 아름다우신 분이긴 하나, 절세가인이라 칭할 정도까진 아니었으니까.

굳이 제 취향을 꼽자면…….

“앗, 뜨거!”

그만 놓쳐버린 장작더미가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 화덕의 불이 거세진 지도 모르고 있었다.

엘은 발을 동동 굴렀다.

‘곧 친키 부인께서 오실 텐데, 어떡하지? 들어온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쫓겨나고 싶진 않은데!’

그는 발등이 까진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사고를 수습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차에, 상냥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읏차,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마.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서투른 게 당연하지.”

자신보다도 작은 한 여자가, 너무도 가뿐하게 장작을 들어 올렸다. 주운 장작들을 한데 쌓아두고선 다친 제 발까지 살폈다.

그녀의 손길 몇 번에 흐르던 피가 멀끔하게 멎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처를 보며, 엘은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내가… 한낱 사용인인 내가 아가씨의 손길을 받다니!’

이런 기상천외한 일이 제 생에 일어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당장 금전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 이상형은 오늘부터 아가씨다.’

취향이란 건 언제든 개조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치료를 마치고서, 메이블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를 떴다.

그러나 엘은 여전히 입술을 다물 생각조차 못한 채 한참을 서있었다.

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퍽 우스우리란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침 주방에 들른 달리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해. 왜 멍하니 서있어.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엘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선배…. 이건 정말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저것 좀 보시라구요.”

엘이 울상을 지으며 앞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달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선 메이블린이 또 다른 가여운 희생자를 탄생시키는 중이었다.

“왜 붕대를 감았어, 많이 다쳤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붕대를 왜 감아. 한 번 보자.”

“정말 별 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씁, 이리 내봐. 어쩌다 다쳤는데.”

“그, 그게…. 제가 칼질에 아직 서툴러서요…….”

엘의 동료, 래디쉬가 마지못해 팔을 내밀었다. 그녀 역시 엘 못지않게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메이블린은 베인 상처는 물론이고 붕대까지 꼼꼼하게 둘러주고서 빛나는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사실 그냥 미소 지은 것뿐인데, 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다음부턴 조심해. 또 다치면 언제든 말하고.”

“가, 감사합니다…!”

래디쉬가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메이블린은 엷은 웃음을 흘리며 주방 구석에 놓인 쿠키를 몰래 몇 개 집어서 나갔다.

엘의 심장박동이 더욱 거세졌다.

‘어쩜, 마지막까지 내 심장을 이리도 두드리실까. 혼자서 멋있었다가 귀여웠다가 다 하신다니까!’

엘은 달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것 보란 듯이 외쳤다.

“선배, 저러시는데 어떻게 안 반해요…!”

“불쌍한 녀석, 그렇게 일렀는데…. 결국 빠졌구만.”

달리아가 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주방을 나섰다. 엘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달리아 뒤에 붙었다.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따라가는데, 달리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별안간 엘의 어깨를 다독였다. 은밀한 속삭임이 그 위로 흘러나왔다.

“신참, 아가씨에게 반하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저거야. 죽고 싶지 않으면 이만 포기해.”

달리아가 가리킨 곳엔 메이블린이 여태 본 적 없는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 웃음소리.

엘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서 상황을 살폈다.

분위기 상 아가씨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때문인 것 같았다.

여느 귀족들처럼 옷을 정갈하게 갖춰 입은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마치 초식 동물들만 사는 작은 우리에 맹수가 뛰어든 느낌이랄까.

어려서부터 촉 하나는 뛰어났던 엘은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그건 제 길지 않은 인생 중 참 탁월한 선택이었노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야,

‘저 남자가 그 마탑주라는 거지? 어휴, 하마터면 첫 월급도 못 타보고 죽을 뻔했네.’

그는 사랑이 아무리 좋아도 아직 제 목숨이 더 소중한 나이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불나방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슈트레커 영애! 엊그제 제가 보낸 선물은 잘 받으셨나요? 답장이 없어 무례를 무릅쓰고 직접 찾아왔습니다!”

요 며칠 끈질기게 아가씨한테 구애하던 뉘집 영식이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만. 또 온 모양이었다.

“레이디 메이블린! 나오실 때까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안 들여보내 주니까 아가씨의 방아래서 꽃다발을 들고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잔뜩 쫄아 조마조마한 엘과는 달리 달리아는 평온한 낯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 목숨이 열 개쯤 되나 보지. 게다가 하필 와도 이 때 오다니.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네.’

그녀는 익숙한 듯 경건한 자세로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주님, 한 놈 더 갑니다.”

달리아의 조용한 기도가 끝나자마자 주님이 직접 움직였다.

“저건 또 뭐하는 머저리야?”

탑주님이.

* * *

“잘 타일러서 보냈어?”

“응. 신사답게 처리했어.”

“아니, 처리하지 말고 알아듣게 얘기했냐고.”

“…….”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루치펠을 쏘아봤다. 루치펠의 눈동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이동했다.

못 살아, 저번처럼 또 공중에서 몇 바퀴 돌리다 날려버린 건 아니겠지?

내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자 루치펠이 변명하듯 토로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데 뭘 더 얼마나 친절하게 설명해 줘야해. 원래 말보단 한 번 보여주는 게 더 확실하고 빨라.”

“그래서 뭘 보여줬는데.”

“감히 선 넘으면 귀하의 앞날은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걸 공손하게 보여줬지.”

“퍽도 그랬겠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벤치에 엉덩이를 털썩 붙였다. 요즘 이만저만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왕국이 다시 평화를 되찾고 전쟁을 이끌었던 사령관이 나라는 게 알려지자, 내로라하는 가문들에서 수다하게 혼담을 넣는 탓이었다.

물론 슈트레커 자작이 가만히 있진 않았다.

아빠는 평소 잘 나가지도 않는 사교계에까지 얼굴을 비춰가며 딱 잘라 엄포를 놓았다.

딸아이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으니, 들어오는 모든 혼담에 무조건 거절의 답만을 보낼 것이라고.

단호한 비혼 선언이 떨어지자 빗발치던 구애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긴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포기하지 못한 구혼자들이 찾아오는 날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아주 끈질기고 집요해서, 탁월한 껌딱지 제거기가 필요했다.

마침 나는 대륙에서 가장 효과가 좋을 것이 분명한 제거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저번처럼 굴리진 않았어. 겁이 어찌나 많던지 뭘 하기도 전에 내빼더라고. 아무튼, 다신 안 올 테니 더 신경 쓰지 마.”

이러한 이유로, 가족들은 루치펠을 고깝게 여기면서도 그의 방문을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난 루치펠을 매일매일 집에서 볼 수 있었고.

“신경 안 쓰니까, 이리 와서 앉아.”

나는 벤치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자 루치펠이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와서 붙었다.

내 어깨에 옆으로 머리를 기댄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마탑을 여기로 옮길까 봐.”

이, 이놈이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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