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신이 사라지고, 창공에 홀로 남은 루치펠은 멍하니 발아래를 응시했다.
먹물이 끼쳐든 밤이었으나 별가루가 떨어진 듯 온통 반짝이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메이블린이 제국의 폭주를 멈춰준 덕분에 속국이 될 뻔했던 나라들이 저마다 축제를 벌이는 중이었다.
퍽 아름다운 장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치펠은 쓰게 웃었다.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는 이 모든 순간이, 그녀의 희생을 밟고 피어난 시간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모진 시간들을 홀로 어찌 견뎌냈을까.
견디다 못해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무수한 나날들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러고도 넌,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웃었지.’
자신 역시 이 현실을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루치펠은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메이블린은 텅 빈 눈으로 테라스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가슴이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할 만큼 욱신거렸다.
루치펠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그녀를 마주했다.
“너, 시간을 몇 번이나 돌린 거야.”
“……뭐?”
“대체 몇 번이나 죽은 거냐고.”
온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대도 이보다 아프진 않을 터였다.
* * *
‘말도 안 돼. 루시가 이걸 알 리가 없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사람처럼 우뚝 서있었다.
속이 울렁이고 사방이 일렁였다. 커다란 뱃고동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어깨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루치펠이 양 팔을 붙잡고 안달난 목소리로 날 마주하고 있었다.
“나, 다 들었어. 전부 다 봤다고.”
“……뭐를?”
“네가…, 네가 지나온 모든 시간들을. 끊임없이 죽고 또 죽으면서도… 어떻게든 사람들을 살리려했던 널 봤어.”
나는 그의 말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꿈에서라도 본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정이었다.
물론 그런 적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굉장히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몇몇 사람들은 얘기하곤 했다.
이상하게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꿈을 꾸었다던가, 묘하게 그런 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루시, 그게 무슨 소리야. 꿈이라도 꾼 거야? 내가 불사신도 아니고 어떻게 그래.”
“메이블린, 제발…!”
루치펠이 괴로운 숨을 터뜨리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동안 루치펠이 이토록 아파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어느 상황에서든 그는 고통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심지어 3년의 기다림 끝에 재회했을 때조차도 이런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거의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인 사람처럼 날 몰아붙였다.
“신한테 다 봤다고! 네가 그 빌어먹을 시스템에 걸려있는 것도, 그걸 이용해서 시간을 몇 번이고 되돌렸던 것도!”
“뭐…?”
“대체 얼마나 그 지옥을 거쳐 온 거야? 그렇게나 아팠으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내가 끝까지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어? 왜, 도대체 왜…!”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분개하고 있었다.
분통을 터뜨리고 화를 내다, 끝내는 눈가를 발갛게 물들였다.
항상 정갈했던 호흡은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나직하고 듣기 좋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메이블린…. 대체 왜 그랬어…….”
지극한 괴로움에 물든 숨소리가 나를 잠식했다.
신의 단순한 변덕인지, 그의 강력한 의지에 그저 답해준 것인지는 몰라도.
루치펠이 알아버렸다.
여태 나만이 알았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가장 깊고 심오한 비밀을.
“루시, 일단… 읏.”
나는 그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루치펠의 억센 악력이 날 끌어당겼다.
애달프게 허덕이는 포옹이 날 더 옥죄고, 어깨 위로 무언가 연달아 떨어졌다.
붉게 젖어든 그의 두 눈은 결국 흰 뺨에 눈물 줄기를 만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아래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쏟아졌다.
나는 그 울음을, 소나기처럼 맞고 섰다.
“……루시.”
피할 생각도 못하고, 몰아치는 태풍 속에 기꺼이 발을 들였다.
“나는 내가 거쳐 온 모든 일들을 후회하지 않아.”
“그걸 말이라고 해? 한 번만으로도 끔찍한 죽음을 무수하게 맞닥뜨렸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메이, 나는 그런 네가 정말…!”
나는 그가 더 말을 잇지 못하도록 두 팔을 뻗었다. 한 팔은 그의 목에 감고, 다른 한 팔은 뒷머리를 지그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루치펠이 막 토해내려던 단어는 내 입맞춤 속으로 먹혀들었다.
녹아내릴 듯한 열기와 함께 입술이 짓뭉개지고, 내 허리를 감은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는 더 진한 숨으로 내 호흡을 받았다. 거친 숨소리가 온정신을 붙들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태풍의 눈 속에서 우린 무언의 대답을 나누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들이 격렬하게 오갔다.
서로 나누는 온기에 한겨울의 날씨도 잊었다. 꼭 그와 나만이 다른 계절에 떨어진 듯했다.
요동치던 감정이 교류 끝에 잔잔한 물결처럼 가라앉았을 즈음, 나는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
“그 시간들이 좋았다곤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옥도 아니었어. 나는 그저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야. 만약 다시 돌아간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오직 그뿐이야. 나는 괜찮아, 정말로.”
수없는 죽음과 회귀를 반복하면서, 그만 둘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홀로 꾸역꾸역 걷고 있는 기분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비참했다.
하지만 마침내 터널을 빠져나왔고, 그런 날 반겨준 건 찬란한 빛이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 주는 빛.
그거면 충분했다. 그 모든 괴로움을 감내하고서도 난 웃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만든 이 전쟁의 결말이었다. 그러니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그러나 루치펠은 여전히 애달픈 눈으로 날 쓰다듬었다.
“네가 혼자서 그 모든 고통을 이겨냈을 걸 생각하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을 만큼 가슴이 조여 와서 미치겠어.”
“미안해, 루시…….”
“미안해하지 마. 이건 나한테 화가 난 거야. 그런 널 미리 알아채고 감싸주지 못한 내가 너무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죽겠다고.”
“알아챌 수 있는 일이 아니었잖아.”
나는 눈물이 진하게 자욱을 남긴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그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루치펠은 제 손을 그 위에 올리고 고개를 슬쩍 돌려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곧 쓰게 일그러진 입가가 자책했다.
“그 어떤 것도 나한텐 변명밖에 안 돼. 너를 더, 더… 사랑했어야 했어. 너를 더 안아줬어야 했어. 그래서 네가 홀로 싸우고 있단 걸, 알았어야 했어.”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한 걸. 이젠 짐을 같이 나눠줄 사람도 생겼고.”
“내가 안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널 그런 구렁텅이에 다신 빠뜨리지 않아.”
루치펠이 나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귓가에 뜨거운 숨이 맴돌았다.
“그러니까 더 이상 도망치거나 뭐 숨길 생각 하지 마. 난 치사하고 비열해지더라도 널 잡을 거고, 숨기는 게 사과 한 알이라도 같이 들 거야. 널 공격하는 게 무엇이든, 세상에서 가장 잔악한 인간이 돼야만 한대도 널 지켜낼 거야. 이 세계가 네가 없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면, 난 기꺼이 세계를 멸하고 널 구하겠지.”
속삭이듯 흘려보낸 문장이 마침표를 찍었을 땐,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그 눈 안에서 타올랐다.
스쳐 지나갈 줄만 알았던 우연이 인연이 되고, 끝내 운명이 되어버린 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을 담아, 그가 내게 고백했다.
“나는 널 숨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할 거고,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야. 이런 나를, 너도 여전히 사랑해?”
똑, 호수에 파문이 인 듯한 말끝이 맞닿은 온기를 통해 스며들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 역시 그 만큼이나 떨고 있단 걸, 알까.
나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속을 꾹 누르며 루치펠의 눈을 마주했다.
“나는 언제고 이번 전쟁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몸을 날릴 거고, 내 사람들을 지킬 거야.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게 될 수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슨 고집을 부려서라도 해낼 거야.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확신이 없는 길이라도 주저 없이 몸을 던지겠지. 이런 나를, 계속 사랑할 수 있어?”
어떤 식으로든 그와 내가 추구하는 길이 매번 같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그를 말리고, 그가 나를 붙잡아야 하는 상황은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겠지.
그 때가 되어서도 우린 이별이 아닌 서로를 택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 긴장감을 갖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하. 메이블린.”
상대는 도리어 그 반대의 반응을 보여줬다.
굳어있던 루치펠의 얼굴이 봄눈 녹듯 사르르 풀렸다.
“단 한 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일월이 수천 번 지고 떠오른대도, 내 답은 같아.”
곱게 휘어진 입술 끝에 그제야 웃음이 걸렸다. 눈은 아직 우는데, 입은 웃었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그의 두 뺨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내가 줄 답도 애초부터 하나였다.
“나도 그래.”
그러자 루치펠이 기쁘게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나는 보금자리를 찾는 새처럼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더욱 파고들었다.
우리는 언제 울었냐는 듯 그렇게 한참을 꼭 끌어안고 웃었다.
요동쳤던 감정이 잔잔해지고, 나는 그의 품에 등을 기댄 채 테라스 밖 하얀 풍경을 내다봤다.
눈송이가 조금씩 떨어졌다. 머리 위로 루치펠의 따듯한 숨이 느껴졌다.
“근데 있잖아, 루시. 방금 한 거 프러포즈야? 좀 이르지 않나. 나중에 정식으로 한 번 더 고백해 줄 거지? 아니면 내가 먼저 선수 칠까?”
“가끔 잊는 거 같은데, 졸부님 남친이 나름 마탑주라는 위명을 가지고 있어서. 나중에 내가 어떻게 나올지 감당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그는 미세하게 벌어진 내 입술을 지분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시원한 박하 향이 났다. 또다시 고개를 내리는 그 뒤로 눈이 내렸다.
한두 송이 떨어지던 눈은 차츰 발치에 쌓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이, 아주 펑펑 내렸다.
겨울의 마지막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