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흐아암~”
이디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발을 질질 끌었다. 불량 스크롤을 소각하고 이만 자러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한데, 열린 창문 너머로 마탑 뒷마당에 우두커니 서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저건?’
꽤 늦은 시각이었던 터라 이디스는 숨을 죽이며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입자면 곧장 때려눕힐 생각으로 한 손에 마법진까지 그러쥐었다.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 하아.’
이윽고 지척에 다다른 그녀는 야트막한 숨을 내뱉었다.
검은 인영의 정체는 도통 무슨 생각 중인지 모를 제 상관이었다.
“왜 나와 계세요, 탑주님? 전쟁도 끝났는데 좀 더 쉬시지 않고요.”
“…….”
루치펠은 묵묵부답이었다. 어색한 침묵만 적나라하게 흘렀다.
이디스가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침입자가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묻는 말에 대답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는 상관을 마주친 것이 과연 그보다 나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능력자답게 그녀는 익숙한 양 고개를 끄떡거렸다.
“예, 그럼요. 생각이 많으시겠죠. 그럼 전 이만 들…….”
“이디스.”
“네?”
“전쟁 때 말이야.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루치펠이 묘한 목소리로 자리를 피하려는 이디스를 붙잡았다.
이디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야밤에 혼자 청승떨고 있는 거로도 모자라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이라니. 하, 모른 척 그냥 올라갈걸. 차라리 침입자를 마주치는 게 더 나았겠어.’
이상한 건 탑주님이고요. 라고 답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하지만 즐거운 사회생활을 위해서 이 정도 자제력쯤은 거뜬하게 길러온 터였다.
이디스는 짐짓 궁금한 체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상한 거라면 어떤…….”
“꼭 데자뷰처럼 일전에 느꼈던 상황이 진짜로 벌어지는 거. 아니, 그게 일어나다 못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안 들었어?”
“음… 잘 모르겠는데요.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탑주님?”
더 영문 모를 소리에 이디스는 결국 상담사 역을 3분도 채우지 못하고 때려 쳤다.
그 끄트머리에 루치펠의 옅은 한숨이 걸렸다.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이내 벽에 등을 기댔다.
“이디스.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답을 알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음, 흠…….”
이번엔 그냥 발 닦고 잠이나 자지 뭘 더 고민해요,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꾹 눌러 삼켰다. 상담사는 때려 쳤다지만, 뛰어난 사회인 타이틀 만큼은 유지하고 싶었다.
이디스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다 적당한 답을 내놓았다.
“정확히 뭘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라면 아마 신을 찾을 것 같아요.”
“……신?”
“말 그대로 전지전능한 존재잖아요. 우리 같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쯤은 그 해답을 다 쥐고 있겠죠.”
“신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주로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죠…?”
“그럼 신이 와?”
“아니, 신이 옆집 아저씨도 아니고 그렇게 부른다고 어떻게 바로 나와요.”
“그럼 만날 수 없단 거야?”
누구보다도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분께서 오늘따라 왜 이리 집요하신 거람.
이디스는 부디 이 대화가 일 초라도 빨리 끝나길 빌며 어깨를 으쓱였다.
“신탁의 형태를 빌려서 음성이 들린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매우 드물어요. 국가에 자연재해 같은 큰 우환이 닥쳤거나, 혹은 그럴 예정이거나, 신녀를 내리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래?”
루치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의뭉스런 미소를 보는 순간, 이디스는 몹시도 불길해졌다. 불안할 일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그래, 그렇구나…….”
불안한 건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었으므로.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제 상관을 옆에서 봐오며 축적된 데이터가 외쳐댔다.
이 망할 마탑주가, 또 마구잡이로 일을 벌일 거라고.
그리고 그 예상은, 정말이지 슬프게도 적중했다.
“불러서 안 나오면, 나오게 만들면 된단 거네.”
휘익!
별안간 불어온 날카로운 칼바람이 이디스의 뺨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땐, 눈앞이 썰렁했다.
뒷마당에 늘어진 그림자는 오로지 자신의 것뿐이었다.
그녀는 바람결을 따라 하늘로 멍한 시선을 올렸다.
까마득한 창공에 작은 점이 반짝이다, 몇 초 지나니 그조차도 사라졌다.
‘뭐야, 설마 지금 무작정 올라간 거야? 신 만난다고?’
뒷골이 찡하게 땅겼다. 어이가 없어서 잠도 싹 달아났다.
이디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기가 막힌 탄성만 터뜨렸다.
“저, 저 미친 탑주…!”
* * *
대지가 주는 온기라곤 한 톨도 없는, 차원이 다른 한기가 사방에서 끼쳐왔다.
그럼에도 루치펠은 아랑곳 않고 허공에 서서 제 발밑에 펼쳐진 수많은 나라를 내다봤다.
이윽고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박혔다. 그는 지휘하듯 팔을 앞으로 뻗었다.
거대한 마법진이 손끝 움직임에 맞춰 한 도심을 덮었다.
그는 이디스가 말했던 자연재해를, 직접 만들 생각이었다.
신의 응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기이잉-
마법진에서 발한 빛이 까만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그가 주먹을 쥐는 즉시, 불에 단 운석이 무자비하게 지상으로 직격할 것이었다.
“자기 나라 망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하나쯤은 나오겠지.”
루치펠은 천천히, 펼친 손을 그러쥐었다.
마법진은 금방이라도 운석을 쏟아낼 듯 폭발적인 마력을 퍼뜨렸다.
하늘이 우르릉 떨리고 눈부신 빛이 비산했다.
막 생성된 운석 하나가 떨어지기 직전.
“과연, 신을 협박하다니. 대담한 건 여전하구나.”
루치펠의 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그를 덮쳐왔다.
“스스로 블로킹을 깨서 ■■의 힘도 이제 느껴지는 모양이지. 아, 아직 ■■의 이름은 안 들리려나. 뭐, 걱정 마. 블로킹을 깬 이상 곧 네 존재도 점점 자각하게 될 거야.”
“넌 누구지?”
“답을 얻고 싶어서 날 찾았으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인간과 다를 바 없던 음성이 사그라들고. 흡사 천둥 같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듣고 있음에도 존재에 확신이 서지 않는 형체.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루치펠의 마법진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무효화시켰다.
“넌 내가 나온 걸 정말 행운으로 여겨야 해. 다른 놈들이 먼저 널 발견했으면 이미 끝장났어.”
“당신이 내 앞에 이렇게 순순히 나타난 이유가 뭐지?”
“퍽 고전하고 있는 문제가 있는 거 같기에 도와주려고.”
“자기들밖에 모르는 족속이 이리 쉽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대가도 없이?”
“뭐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긴 한데, 이래봬도 난 한때 널 귀여워했었거든.”
“같잖은 수작은 집어치워.”
루치펠이 이를 보이고 으르렁대는 짐승처럼 잔뜩 날을 세웠다.
그럼에도 남자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를 유지했다.
“■■한테 빼고는 건방진 것도 여전하네. 뭐, 나는 네 그런 점을 좋아했었지. 어차피 지금은 얘기해도 모를 테니 묻어두고, 본론으로 넘어가자. 내가 몰래 나온 거라 시간이 별로 없어. 네가 막무가내로 올라온 것도 아무도 못 보게 결계 쳐놓느라 진땀 뺐다고.”
남자가 다소 과장된 행동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신이라기엔 그 특유의 엄숙함이라던가, 근엄함이라던가. 그 흔한 후광조차 쥐뿔도 보이지 않았다.
낭창거리다 못해 유들유들한 작태를 보며 루치펠은 의심을 표했다.
“정말 신이 맞긴 하나?”
남자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창세신이나 돼서 신이 맞느냐는 질문을 듣게 될 줄이야.
그는 유쾌한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진언을 흘려보냈다.
“메이블린 슈트레커. 그 아이 때문에 날 찾았지?”
단번에 나온 이름에, 루치펠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남자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는 듯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주신들이 쳐놓은 블로킹을 깬 게 너니까, 말해줄게. 그녀는 지금 상당히 지친 상태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래서 나는 네가, 그 아이를 다독여줬으면 좋겠어. 물론 혼자서도 털고 일어날 애지만, 아파하는 시간이 이왕이면 짧은 게 좋잖아?”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그녀가 마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다 아는 것처럼 전쟁을 이끌었단 건 알거야.”
남자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너 역시 같은 사건과 하루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듯한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을 테니까. 안 그래?”
“……메이블린이 뭔가 숨기는 게 있단 소린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너는 모두 믿어야만 해.”
남자가 오묘한 빛깔을 띠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럴 수 있어?”
콰릉!
별안간 남자의 등 뒤로 샛노란 번개가 내리쳤다.
루치펠은 꼭 물이 한계까지 불어난 강을 건너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잠식당할 것 같지만, 반드시 반대편에 도달해야만 하는 진실의 강.
곧 그 날선 번개처럼 허공에 획을 긋듯, 루치펠의 고개가 끄덕였다.
“메이블린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 나는 네 이런 맹목적인 점도 좋아했었지.”
한차례 감탄사를 내뱉은 남자가 손을 뻗었다.
활짝 펼친 손바닥 위로 커다란 스크린이 띄워졌다. 직사각형의 화면은 피와 흙먼지가 낭자한, 익숙한 전쟁터를 비췄다.
신룡과 늑대신수가 포효하고, 못마땅한 암살자 놈이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노란 콩도 왕국을 지키겠다고 끝까지 발악하고, 그리고…….
“왜, 왜… 메이블린이 죽어.”
사랑해 마지않는 제 연인이 죽었다.
화면 속에서 메이블린은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참 다양하게도 죽었다. 적군의 공격에 꿰뚫리고, 발밑으로 훅 꺼진 거대한 구멍에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전쟁이 승리했음에도 스스로 심장에 칼을 박아 넣기도 했다.
끊임없이 죽음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루치펠은 침음을 삼켰다.
왜 같은 전쟁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이지?
저 고통의 연속이 대체 무얼 줄 수 있지?
메이블린은, 어째서 저런 선택을 한 것이지?
끝도 없는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쏟아졌다.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야 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는, 이내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아.
저 미련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이타적인 여자는, 모두가 사는 이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저 지옥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구나.
온몸이 으스러지고, 산산조각나고, 찢기더라도. 기어이 그 불구덩이를 뚫고 나왔구나.
비로소 깨달은 듯한 루치펠의 모습에 남자가 슬프게 입매를 비틀었다.
“이게, 그 아이의 비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