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승전보 아래에서 그녀는
#125
완벽하게 종전 선언이 떨어진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제국은 승리를 코앞에 두고 처참하게 패했고, 정복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현재는 황제의 빈자리를 대신해 에드먼드가 임시적으로 이노아드를 추스르는 중이었다.
체감 상 죽기 살기로 황무지에 뛰어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등바등 거렸던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까마득하게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 주군께서 똬악! 검을 들고! 모두 진격하라아-! 외쳤는데!”
“하, 정말이지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니까. 너희들은 평생 그 기분 모를 거다.”
잭과 재키가 던켈하이트의 꼬맹이들에게 무용담을 줄줄 읊지만 않았더라면.
굳이 내 면전에서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꼬맹이들은 저마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쌍둥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잭과 재키는 열렬한 청자들에 힘입어 더욱 신나게 떠들었다.
처음에 마물부대를 이끌고 이 몸들이 멋지게 등장했다는 둥, 내가 또 죽은 척을 해서 신룡이 폭주에 가까운 성장을 했다는 둥, 어디선가 나타난 신관이 엄청난 신성력으로 적국의 교황을 압살했다는 둥.
음유시인으로 전직한 것인지 이야기가 쉬지도 않고 줄줄 나왔다.
‘벌써 몇 번째야. 애들은 왜 그걸 또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는 거람.’
결국 귀에 딱지가 앉고만 첫 번째 희생자는 내가 되었다.
나는 어서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며 아이들을 얼렀다.
“자자, 암살자 꿈나무들. 시간이 많이 늦었어. 어서 집에 들어가서 자.”
“하지만 암살자는 달이 떠야 돌아다니는 걸요.”
“아직은 아니잖니. 일찍 자야 키가 크고, 그래야 훌륭한 암살자가 될 수 있어. 저기 클라인 아저씨 봐. 엄청 크지?”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석에 잠자코 앉아있던 클라인에게로 쏠렸다.
그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뒷목을 쓸었다.
저게 움츠린다고 쪼그라들 덩치도 아니고, 참.
나는 내 쪽으로 주의를 다시 집중시키기 위해 손뼉을 짝, 쳤다.
“봤지? 저렇게 되려면 일찍 자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어서들 돌아가세요~?”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몇몇 얼굴들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메이 누나는 재키 누나보다도 작잖아요. 근데도 수장님이잖아요.”
이런, 아이야. 사람은 겉모습이 다가 아니란다.
나는 문가 쪽으로 가다 말고 멈춘 아이들을 타일렀다.
“나는 마음의 키가 커서 그래. 이건 수장님 말씀을 잘 들어야 커지는 거야.”
그러니 어서 내 말 듣고 집 가서 자, 란 의미였는데.
“하지만 메이 누나는 말 안 들었을 것 같지 않아?”
“맞아, 맞아! 맨날 땡땡이 쳤을 것 같아!”
“막 거짓말도 엄청 하고 사기도 치고!”
도리어 아이들의 새로운 수다에 기름만 부어준 꼴이 되어버렸다.
이것들이. 씁, 다 큰 어른 뼈 때리는 거 아니야. 이미 6번 갈비뼈 바사삭 됐다, 얘들아. 그만 때려.
시시콜콜 다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도 못했다.
그러던 차에 구석에서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클라인이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그는 가장 크게 깔깔대는 아이를 목마 태우고는 나머지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아이들은 제가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주군께선 더 쉬다 가십시오.”
짤막한 말과 함께 그의 커다란 등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은 여전히 조잘대며 클라인 옆에 딱 붙어 걸었다. 와르르 웃는 표정들이 해맑기 그지없었다.
해질녘의 무지근한 공기가 그들 위로 내려앉았다.
지키고자했고, 지켜냈기에 거리에 맴도는 일상.
유리창 너머로 그 따스한 풍경을 잠시 눈에 담다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새 빈 찻잔을 채우고 새 케이크를 내온 쌍둥이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둘은 금전의 아이들처럼 눈을 한가득 빛내고 있었다.
“주군. 저희가 진짜 궁금한 게 좀 있는데요.”
“어떻게 그 모든 걸 예측하시고 준비하셨어요?”
조금 전에 신나게 떠들었던 무용담의 실체가 퍽 궁금한가 보지.
하기야, 전쟁이란 게 아무리 대비해도 필시 사소한 것 하나 둘쯤은 엇나가기 마련인데.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진 상황들이 놀라울 법도 했다.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넘겨 목을 축이고,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수십 번을 겪어봤으니까.”
“……네?”
잭과 재키가 동시에 반문했다.
나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답을 살짝 고쳐 되풀이해 주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은 더 연습해 봤다고.”
그러나 쌍둥이의 의아해하는 낯은 가시질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연 현상 같은 건 어찌 못하는 거잖아요. 처음으로 부대가 부닥쳤을 때 말이에요. 그 지대가 쉽게 무너질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셨어요?”
그게 솔직히 말하면 싱크홀인데… 음. 나는 하는 수 없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주변, 석회암이 많았어. 옆을 흐르는 강에서도 석회질이 상당히 묻어나왔고.”
“석… 그게 뭔데요?”
“아, 석회 어쩌구는 그냥 무른 암석이라고만 알아둬. 그 뭐냐. 너희들한테 대기하라고 했던 동굴, 고드름 같은 게 위 아래로 주렁주렁 붙어 있었지?”
“네.”
“겨우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지반에, 상당한 무게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어? 거기다 너희들이 아래에서 충격파까지 주며 뚫고 올라온다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 말고 더 있나.”
긴긴 설명에도 궁금증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워낙 기행이 많았던 탓에 잭과 재키의 질문공세는 계속되었다.
“그럼 신룡의 2차 성장은요? 그것도 예측할 수 없는 거였잖아요.”
“자식을 눈앞에 두고 태연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아.”
“주군께서… 자식은 아니지 않나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일이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되게 정이 많은 성격이거든. 말만 맨날 투덜거리지 실은 나 되게 좋아해.”
“검에 가슴까지 박아가며 죽은 척하셨잖아요. 만약 신룡이 성장에 실패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결국 안 죽었잖아. 손해 볼 건 없었는걸.”
“아, 네…….”
내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자 쌍둥이가 짜게 식은 표정을 띠웠다.
‘뭐야, 그 표정. 나 다 알아. 옛날에 많이 봤어. 메이블린이 또 메이블린 했다는 그런 거지, 어?’
이젠 이름이라도 붙여줘야 할 그 표정은 다행히 오래 가진 않았다.
내가 케이크를 조각내던 포크질을 멈추니 잭이 고개를 슬 기울였다.
“근데 가장 궁금했던 건 따로 있어요. 대체 마탑주는 왜 갑자기 끼어든 거래요? 주군 혹시 마탑주 약점이라도 잡았어요?”
루치펠이 등장하던 당시, 쌍둥이는 나와 꽤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날 애인이라 칭하던 그의 폭탄선언을 듣지 못했다.
내 연인이 그라는 걸 아직 모르기에 재키가 형편없는 질문이라며 잭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면서 마탑주가 약점 잡혔다고 어디 순순히 이끌려줄 사람이냐며,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사람을 죽이고 마는 쪽을 택할 인간이라고 타박했다.
나는 둘의 실랑이를 구경하다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글쎄…. 오지 말라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와주길 바랐나봐. 그냥… 그래, 믿었어.”
“네?”
두서없는 내용에 재키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명확한 답을 바라는 눈치였으나, 나는 그저 감감한 목소리를 다시금 흘려보냈다.
“와줄 거라고 믿었다고. 그게 다야.”
그저 믿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 * *
이후로도 나는 전쟁 필승법에 대해 속속들이 떠벌렸다.
클라인이 돌아왔을 땐 루치펠과의 공개연애를 밝혔다.
선언하자마자 쌍둥이가 천장에 머리가 닿을 만큼 펄쩍 뛰는 바람에, 거의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피신해야 했지만.
그렇게 슈트레커 가족들과 평범한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하늘에 어둠이 깔렸다.
나는 숄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갔다.
“하아…….”
가라앉은 한숨이 차디찬 밤공기 사이로 피어올랐다.
‘드디어 다 끝났나.’
쌍둥이에게 실컷 말은 그렇게 했다만. 사실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원인은 따로 있었다.
나는 예지 능력 따윈 없는 평범한 인간이어서, 예지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방식으로.
반복되는 회귀,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들.
첫 번째 죽음에서 싱크홀에 빠져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던 건 에임군이었다.
이후 이노아드군을 유인하는 타이밍을 맞출 때까지 총 3번의 죽음이 필요했다.
스물두 번째 죽음엔 왕궁이 몰살당했다.
경계에서 싸우는 우리도 밀리지 않고, 왕궁도 지킬 수 있는 적당한 군사량을 분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7번의 죽음이 지나갔다.
마흔 다섯 번째 죽음엔 하일이 역린을 찔렸다.
‘란슬롯에게 넥타르를 달라고 찾아간 게 아마 그 시점이었지.’
그나마 다행히 하일은 두 번 만에 2차 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란슬롯이 전방에서 날 지키다가 자꾸 죽어서 쉰 두 번째 즈음부턴 후방으로 보내버렸다.
그렇게 수없는 죽음을 반복하며 전쟁의 승패를 조절했다.
승리의 깃발을 우리 쪽으로 기울이기 위해 목숨을 부질없이 내던져가며 전략을 짜고, 변수를 통제했다.
전쟁이란 거대한 혈투를 하나의 내 판으로 만들었다.
내 죽음은 수십 번의 반복 끝에 익숙해졌지만, 타인은 죽음을 보는 것은 몹시도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클라인과 실버가 6번 죽었고, 슈타커가 17번 죽었고, 쌍둥이가 25번 죽었으며, 칼리안과 노아가 30번 죽었다.
매번 가슴을 생채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전승을 거두어도. 희생자는 반드시 나왔다.
그러나 나는 모두가 사는 결말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약속한 내 사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죽고, 또 죽었다.
하지만 그 모든 죽음에도 한결같았던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루시.”
언제 온 것인지 루치펠이 발코니 난간 위에 떠있었다.
그는 내가 포기했던 모든 회차의 전쟁동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나타났다.
노상 중립을 유지해오던 마탑의 금기를 어기고.
“갑자기 여긴 왜 왔어?”
루치펠은 내 앞에 착지하지 않고 계속 허공에 머물렀다. 나는 입김으로 녹이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한데, 그의 얼굴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극도의 괴로움과 고통이 빈틈없이 점철된 표정.
어디 아프냐고 입을 떼기도 전에 그가 먼저 폭탄을 던졌다.
“너, 시간을 몇 번이나 돌린 거야.”
“……뭐?”
“대체 몇 번이나 죽은 거냐고.”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물들었다.
쿵, 쿵. 몹시도 진탕되는 심장박동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음도 와 닿지 못했다.
식은땀이 등뼈를 하나하나 훑으며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루치펠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