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저하! 이쪽으로!”
슈타커가 문을 걷어차고, 노아가 커다란 통나무를 들어 걸쇠대신 문을 잠갔다.
궁지에 몰린 칼리안은 남은 기사들을 이끌고 최후의 전선인 헤스티아 궁으로 대피했다.
마지막인 만큼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죽음에 임하게 될 마음도.
“하아, 하…….”
저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숨이 상당히 지쳐있음을 알려줬다.
“이곳이다! 뚫어!”
밖에서 이노아드군들이 사정없이 검기를 쏟아 붓는 게 느껴졌다.
왕궁에 바로 침투할 정도니, 아마 최정예 기사들일 것이다.
두꺼운 철문은 금방이라도 열릴 듯 두근대는 심장처럼 박동했다. 이마저 뚫리면 전부 끝장이었다.
모두가 숨죽이며 곧 열릴 지옥문을 기다렸다. 칼리안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울렁였다.
손아귀에 땀이 차 검을 단단히 틀어쥐어야 했을 무렵.
쿠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이 일순 흔들렸다.
삐걱거리며 틀어진 철문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나왔다.
흉포하게 덮쳐오던 오러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두 동강내려는 기합으로 가득하던 밖은 어느덧 비명소리만이 낭자했다.
“저, 저게 뭐야!”
“으아악!”
거세게 흔들리던 문이 돌연 잠잠해졌다.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함정인가?”
노아와 슈타커가 검을 바짝 세우며 온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기묘한 적막이 공기를 한껏 조이고, 정지화면처럼 멈췄던 문이 벌컥 열렸다.
몇몇 병사들이 화살이라도 날아올까 칼리안 앞을 가리며 방패를 쳐들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것은 화살도, 검기도 아닌.
“제가 제때 왔나요, 누나 형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목소리였다.
커다란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고 나타난 소년.
그는 곧 검은 날개를 단 늑대가 되어 적군을 난장으로 휩쓸었다.
“가, 같은 편이잖아! 왜 우릴 공격하는… 커억!”
헤스티아 궁으로 달려오던 지휘대장이 콜린이 휘두른 앞발톱에 저만치 날아갔다.
벽에 처박힌 몸은 부질없이 주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눈두덩이에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분명 유폐된 황자 놈이 복종 주술을 걸었다고 하였거늘…!’
그 놈은 왜 안 보이고, 어찌하여 같은 이노아드 갑옷을 입은 군사들은 자신을 공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왕위 찬탈을 최우선으로 두고 신속히 움직였던 터라 이노아드군은 주술사도, 성기사도, 하다못해 화염 방어 마법이 걸린 무기조차도 없었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 확신했던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난장에 휘말렸다.
* * *
극적인 순간에 에임의 마지막 군대는 기사회생했다.
콜린이 이끌고 온 지원군의 개입으로 상황은 빠르게 종료되었다.
“콜린, 이노아드 사람이랑 끝까지 동행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슈타커는 한 숨 돌리며 콜린의 북실북실한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에 몇 번 머리를 문대던 콜린이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어요. 군대 반 딱 나눠서 에드먼드 아저씨는 경계로, 저는 여기로.”
“그럼 콜린 혼자서 이 일을 꾸민 겁니까? 너무 무모했습니다. 메이가 알면 어쩌려고…!”
“저… 그게 실은…….”
콜린이 머뭇대며 다리를 배배 꼬았다.
그는 차마 슈타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꿍얼거렸다.
“메이 누나는 이미 알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면 필시 말릴 거라면서 비밀로 하자고 했었거든요. 경계 인력도 부족한데 무슨 왕궁까지 보내냐 역성을 낼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맞아도 너무 딱 맞아서 문제였다.
격양되었던 슈타커는 체념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콜린은 메이블린에게 불똥이 튈까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메이 누나는 잘못 없어요. 제가 끝까지 우겨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 하면 안 돼요, 네?”
“뭘 뭐라 하면 안 돼?”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양반은 못 되는 메이블린이 콜린의 뒤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전후처리를 암흑가 일원들과 신수들에게 맡기고 오는 길이었다.
슈타커는 그녀를 잠시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꼬질꼬질한 볼을 꼬집었다.
“아야.”
메이블린이 눈썹을 찡그렸지만 슈타커는 태연한 낯으로 볼을 주욱 늘였다.
“더 세게 꼬집고 싶은데, 아플까봐 이쯤만 하는 겁니다.”
“그럼 꼬딥는 의미가 없디 아나요?”
“적어도 내가 메이의 결정에 조금 심통이 났다는 의사표명 정도는 해줄 수 있겠죠.”
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잡아당긴 볼을 놓아주었다. 대신 숨 쉬기도 힘들 만큼 격한 포옹이 이어졌다.
“지금이야 잘 끝나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지만, 메이가 혹여라도 잘못됐을 걸 생각하면…. 나는…….”
슈타커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젖어들었다.
마냥 안겨있던 메이블린은 두 팔을 들어 그녀를 꼬옥 마주 안았다.
“글쎄요…. 만약 콜린까지 우리 쪽으로 왔으면, 여기가 박살났을 걸요. 저는 그게 더 끔찍해요. 그걸 막으려면… 콜린은 왕궁으로 보내야만 했어요.”
다행히 그게 맞았고요. 조그만 속삭임이 여린 풀잎처럼 슈타커의 귓가에 팔랑였다.
메이블린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울 듯 발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 아픈 얼굴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메이블린은 순식간에 울음을 지워내며 슈타커의 품에서 나왔다.
“칼리안…, 저하는 어디 계세요?”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때마침 노아가 건물 뒤편에서 나왔다.
그는 메이블린이 말짱하단 걸 확인하고서, 말없이 자신이 나온 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덤덤한 그의 표정은, 뭐랄까. 단순한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이어서 메이블린 역시 숨을 죽이며 뒤편 복도로 다가갔다.
“……왔군.”
인기척을 느낀 칼리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시선은 여전히 기둥 한구석에 고정한 채였다.
메이블린은 그 시선의 각도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형용 못할 눈동자가 닿아있는 곳엔 한 남자가 고개를 푹 떨군 채 축 늘어져있었다.
미동도 없는, 싸늘한 주검.
곧 병사들이 흰 천으로 그를 덮으며 조심스레 들 것에 옮겨갔다.
“유감이에요, 저하.”
칼리안의 곁에 선 메이블린이 그의 어깨에 올린 손을 다독이듯 천천히 쓸어내렸다.
칼리안은 제자리에 뿌리 내린 나무인 양 서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실소가 흘렀다.
“유감이라…… 난 괜찮네.”
“하지만 전하께서 운명을 달리하셨는데…….”
“남들이 보면 매정하다 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아버지는 내게 딱 이만한 감상만 보일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는 기둥에 번진 핏자국에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더욱 또렷해진 연보라빛 눈동자가 메이블린의 모습을 담았다.
칼리안이 탁 트인 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후련하군. 줄곧 나만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그림자가 사라진 기분이야.”
“…….”
그 그림자가 이제껏 얼마나 그를 좀먹었는지 알기에, 메이블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두워진 낯빛을 본 칼리안은 다감한 목소리를 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렇게 좋은 날, 그렇게 우울할 건 뭔가.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애초에 내가 이 전쟁에서 바라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어.”
“그게… 뭔데요?”
칼리안의 상체가 살짝 기울었다. 가볍지만 충분히 따듯한 포옹이 메이블린을 감쌌다.
“그대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야.”
안도감, 고마움, 불안함, 상실감, 자책, 친애…….
그가 이제껏 그녀에게 보였던 애정을 제하고도 수많은 종류의 감정이 고스란히 몰아쳐와, 메이블린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때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녀는 다만 가득 차오른 숨을 나지막하게 터뜨렸다.
“저하께서도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 더 반복할 뻔했는데.”
“……? 뭘 반복하단 말인가?”
칼리안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물었지만 답은 얻을 수 없었다.
“거기 노란 콩. 떨어져.”
인기척도 없이 훅 나타난 루치펠이 둘 사이를 확 갈랐다.
뒤에서 빠르게 메이블린을 끌어안은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올리고 사납게 쏘아붙였다.
“얘는 나만 안을 수 있어.”
왜 자신의 여자친구는 이리도 예뻐서, 이리도 인기가 많은지.
호시탐탐 노리는 녀석들에게서 지켜내느라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루치펠은 메이블린을 거의 제 품으로 가두듯이 꽉 안고 으르렁댔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죽일 것처럼 구는 태도에, 칼리안은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고 물러섰다.
“……실례했군. 사과하지.”
* * *
나는 막 끓인 차로 속을 달래면서 꽃가루처럼 휘날리는 눈싸라기를 구경했다.
아직 전쟁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춥지는 않았다.
한겨울의 날씨에도 얼어붙지 않은 입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어, 그거 좀 더 뾰족해야 하는데. 장식도 훨씬 화려하고.”
눈앞에선 왕궁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약해진 뼈대 때문에 건물이 추가로 무너질 위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명피해를 발생시킬 우려가 있는 것들만 급하게 재건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이 정도면 돼?”
“음… 이거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을 만큼이면 딱 적당할 거 같아.”
“알았어.”
쿠구궁.
짤막한 내 첨언에 루치펠이 만들던 지붕을 곧장 무너뜨리고 다시 짓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와해되었던 왕궁은 차츰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다 능력 좋은 남친을 둔 덕분이었다. 후후, 아주 훌륭한 일꾼이야.
그럼에도 노아는 루치펠을 시종일관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갑자기 나타나 내 옆에 찰싹 붙어 다니는 게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오빠, 방해되니까 저리 가 있어. 좀 쉬던가.”
물론 내 입김이 더 쎄니 상관없지만.
노아가 댓발 나온 입으로 궁시렁거리며 구석으로 멀어졌다.
그러나 뒤통수는 여전히 따가웠다. 나는 노아의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차를 한 모금 더 홀짝였다. 속을 뜨끈하게 덥히는 게 아주 일품이었다.
본궁의 3층이 쌓일 때 즈음, 나는 허공에 떠서 복구 마법을 퍼붓고 있는 루치펠에게 물었다.
“근데 루시. 이디스가 같이 오겠다고 고집 부리지 않았어?”
내가 전쟁 나간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 얼마나 고생했던가.
자기도 함께하겠다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뺀 게 무려 일주일이었다.
그것도 고집을 끝내 꺾지는 못했다. 도리어 내가 꺾이는 척을 했다.
나는 참전을 포기하겠다고 거짓으로 각서까지 쓰고서야 겨우 그녀를 떼어낼 수 있었다.
루치펠은 지휘하듯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엄청 부렸지. 원래 같이 오려고 했었고.”
“근데 왜 안 왔어? 물론 나야 이런 진탕에 안 껴들게 해서 마음이 편하지만, 이디스가 얌전히 있진 않았을 텐데.”
“따로 맡긴 일이 있었거든.”
“무슨 일을 맡겼길래?”
“음…… 어쩌고 있으려나 한 번 보긴 해야 안심이 될 일?”
“그러니까 그게 뭔데.”
안달난 내 어조에 유려하게 허공을 휘젓던 손이 뚝 그쳤다.
지상에 강림하는 천사처럼 허공에서 내려온 루치펠은 그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같이 갈래?
땡땡이를 치시겠다…. 그걸 말이라고.
어려서부터 땡땡이 무늬보다 그냥 땡땡이를 더 좋아했던 나는 찻잔도 냉큼 뒤로 던져버리고서 내밀어진 손을 덥석 잡았다.
“당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