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한편, 왕궁에서도 치열한 각개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파바바박!
화살이 장마철의 소나기처럼 빗발쳤다.
칼리안은 검기를 발하며 검을 비틀었다. 쏟아지는 화살이 날카롭게 휘두른 검기에 잘려나갔다.
“비켜라!”
국왕이 우악스럽게 병사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칼리안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 뒤편으로 향하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 복도만 지나면 곧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준비된 말이 있었다.
왕국의 몰락이야 안타깝지만, 지금은 자기 한 목숨 사는 것이 더 중했다.
그는 정신없이 내딛는 걸음에 속도를 가했다. 복도의 끝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막 모퉁이를 돌려던 찰나.
“이쪽이다! 여기 국왕이 있다!”
잠복하고 있던 군사 한 무리가 덮쳐왔다. 무자비하게 휘두른 검날이 쇄도했다.
“윽…!”
국왕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고 크게 휘청였다.
칼리안이 재빠르게 그 앞을 막아섰으나 이미 꽂힌 공격을 되돌릴 순 없는 법이었다.
국왕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이내 부질없이 고꾸라졌다. 발간 피가 천자락을 스미고 새나왔다.
“전하!”
그 사이 군사들을 전부 쓰러뜨린 칼리안이 국왕 곁으로 다급하게 뛰어왔다.
국왕은 되는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탓하길 멈추지 않았다.
“쓸모없는 놈…. 끝까지 날 실망시키는구나. 네 몸이 조각나는 한이 있더라도 날 지켰어야지!”
씨근덕대는 숨을 따라 배에 박힌 칼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칼리안을 자책하는 호통이 자꾸만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잔잔한 낯으로 다친 제 아비를 일으켜 기둥에 기대게 했다.
투박한 상처들로 덮인 두 손이, 국왕의 몸을 꿰뚫은 칼자루를 쥐었다.
“흐읍…!”
칼을 뽑아내자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곧바로 상처를 압박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왈칵 새나왔다.
호흡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국왕의 상태를 직감한 칼리안은 그와 두 눈을 마주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았던 눈을.
“전하, 이제 더 이상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을 듯해 말씀드립니다.”
“그 무슨 망발이냐. 나는 죽지 않는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국왕은 으르렁대며 바득바득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생명력이 꺼져가는 신체는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 높은 왕좌에서 언제나 내려다보고, 멸시할 줄만 알던 남자였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추하게 허우적대고 있었다.
칼리안은 상체를 기울여 국왕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은근한 말씨를 흘려보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이어서, 참으로,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삶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야 터져 나온 진심.
탁하게 흐려졌던 국왕의 눈동자가 찰나 또렷해졌다.
칼리안은 멈추지 않고 그의 신경을 더욱 뒤흔들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버지께선 저를 저 자체로서 보신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으시지요. 제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주신 적이나 있으십니까?”
“네가 감히…!”
“네. 제가 감히 불행했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이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불행했습니다.”
“이, 이 배은망덕한 놈…….”
국왕의 숨은 이제 경각에 달려 있었다. 칼리안은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완전히 눈을 감기 전에 해주고픈 말이 있었다.
자신을 그 오랜 시간동안 옥죄었던 남자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진눈깨비가 찰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단단한 목소리가 다시 그 위에 덮였다.
“당신이 없을 이 세상, 이제 제 뜻대로 한번 살아볼까 합니다.”
칼리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아주 잘, 살아볼까 합니다. 그러니 부디 평안히 가세요. 자식 된 마지막 도리로 안녕은 빌어드리겠습니다.”
“칼, 리안…….”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름이, 그토록 듣길 바랐던 사람의 목소리를 타고 나옴에도 기쁘지 않은 건 왜일까.
제 팔을 붙들었던 국왕의 손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끝까지 에임의 국왕이었다.
칼리안 드웨인 로마노프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 사실에 애석함은 없었다. 가슴이 아프긴커녕 감정이 동요하지도 않았다.
옛날의 그라면 커다란 갈고리가 속에 턱 걸린 것 마냥 평생을 견딜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칼리안은 달랐다.
오늘날의 칼리안에겐 아버지의 인정 말고도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결코 엮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한 여인이 보여준 행복은 너무도 눈부셔서, 이따위 우울에 얽매일 여유 따윈 없었다.
그는 미련 없이 국왕의 부릅뜬 눈을 쓸어 감겨주었다.
뒤늦게 칼리안의 행방을 찾은 슈타커와 노아가 따라붙는 병사를 쳐내고 달려왔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칼리안은 말없이 국왕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제 아비의 죽음을 목전에서 겪고도 동요 한번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묵묵히. 선혈로 절여진 칼날을 툭 털뿐이었다.
이윽고 담백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떨어졌다.
“남은 병력은 얼마나 되나.”
칼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슈타커와 노아가 번갈아 보고했다.
“제1기사단과 3기사단이 본궁에서 격돌 중입니다. 헤스티아 궁에서도 적군이 몰려오는 걸 보아, 주둔해 있던 2기사단은 완전히 패한 것 같습니다.”
“추가로 진입하려는 부대를 막는 게 고작입니다.”
“……그렇군.”
칼리안은 덤덤하게 답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저하…?”
칼리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잠시.
촤악! 국왕의 도주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말이 단말마의 울음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칼리안은 발 아래로 고이는 피웅덩이를 피하지도 않은 채 입을 뗐다.
“에임의 왕이 운명을 달리한 이 시점부터, 그의 대리인으로서 명령하겠다.”
선명하고도 확고한, 까만 밤 속에서 제 길을 찾은 목소리.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에임을 지킨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찾은 길을 따라 거침없이 첫 발을 놓았다.
첫 발이나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곁을 충직한 두 기사가 같이했다.
슈타커와 노아가 말간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명하시는 대로.”
* * *
콰앙! 콰콰쾅!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폭격음 사이로 이노아드 병사 몇몇이 질린다는 듯 경악을 쏟아냈다.
“아무리 마탑주라도 그렇지…!”
“같은 사람이잖아… 저게 가능해?”
“저건 괴물이야!”
짤막한 감상을 마지막으로 땅이 뒤집혔다.
불기둥이 치솟고, 광포한 바람이 달려드는 적군을 쓸어갔다.
‘……미쳤네.’
인정하긴 싫었지만, 루치펠은 가히 괴물이라 불릴만했다.
한계를 모르고, 끝을 모르고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되는 마법들.
그의 공격 사이사이엔 여백이 없었다. 그야말로 자비 없이 몰아치는 재앙이었다.
제국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탓에 약점을 공략하기 쉬운 하일과 실버와는 달리, 루치펠은 약점이랄 것도 없었다.
‘나를 제외하면, 말이지.’
루치펠이 공공연하게 내가 연인임을 발표한 뒤 적군은 나를 사로잡으려 혈안이 돼있었다.
나를 인질로 붙들고 협박하면, 마탑주가 횡포를 멈출 것은 당연하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인질로 겁박하는 것은 틈이 있는 상대한테나 통하는 거고.
‘우리 루시는 틈이 없는데.’
완전무결한 상대에게 거는 도발은 결국 스스로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나를 노리는 적군의 작전에 루치펠은 더욱 격노했다.
“지금, 내 앞에서 주제넘게 누구한테 손대는 거야.”
감히 군림하는 맹수의 코털을 건드린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콰르릉! 쾅!
금전보다 강도가 더욱 높아진 마법이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세세하게 컨트롤할 자신이 없어서 광역 마법은 못쓰고 있었는데.’
자칫하다간 아군까지 휘말리게 할 수도 있었을 뿐더러, 당장 목전으로 날아드는 날들을 피하고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루치펠은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듯 보였다. 어떤 훼방에도 구애받지 않고 본인의 역량을 완벽하게 발휘했다.
방금 구현된 광역 마법도 적군만 어찌 쏙쏙 알고 뇌전을 때려 붓는 중이었다.
허공에서 가볍게 착지한 그는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누구든 간에 침범하는 순간 죽음을 각오하라는 영역 표시를 남기는 짐승처럼.
나는 생채기가 난 그의 볼을 조심스레 문질렀다. 품에서 거친 혈향이 났다.
“루시, 오지 말랬잖아.”
“근데 왜 내 눈에는 네가 기뻐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뺨의 상처 위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뗐다. 여린 속삭임이 그 사이로 흘렀다.
“어쩌면 네가 와주길 기다렸나봐.”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루치펠의 얼굴을 보길 바라는 순간은 절대 없을 줄 알았는데.
마음 한켠에선 그가 내 당부를 어기고 나타나주길 고대했나보다.
루치펠의 다정한 시선이 내 눈가를 내리눌렀다.
“앞으로는 기다릴 틈도 없이 먼저 도착해 있을게. 그러니까 다시는 나 밀어내지마. 나한테는 네가 가장 중요해.”
“루시, 나는 네가 대륙의 표적이 되는 것만큼은…….”
“그냥 그러겠다고 답해줘. 내게 메이블린이 없으면 마탑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야. 너도 잘 알잖아. 나 그런 놈인 거.”
애달프게 귓바퀴를 감싸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응. 그럴게.”
“약속한 거야.”
내 확답을 얻은 루치펠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이노아드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제 사기는 완전히 에임 쪽으로 기울었다. 시름시름 앓았던 병사들이 신이 나서 내달렸다.
“와아아아!!”
“마탑주가 우리 편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했던 이노아드의 군사들은 어느덧 반토막 나있었다.
나는 곁의 주술사를 쥐어짜내며 루치펠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황제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넘어지지 않고 서있는 게 고작인 것처럼 보였다.
불과 몇 걸음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디딘 땅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다 무지막지하게 쎈 내 남친의 세심한 안배 덕분이었다.
모두가 치열한 가운데 나만이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섰다.
“아, 이제야 숫자가 좀 맞네. 이만 항복해. 안 그럼 그만큼이라도 남은 군대마저 사라질 테니까.”
황제는 이만 으득으득 갈다가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꼴에 부대 좀 몇 반파시켰다고 으스대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구나. 어리석은 것. 내 경고 하나 해주마.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곧 해안에 도착할 내 배들이, 곧장 왕궁으로 쳐들어가 에임을 무너뜨리고 이노아드의 깃발을 꽂을 것이다.”
확실히, 왕궁에 그의 군대가 도착한다면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경계 수비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중요 거점이 먹히면 패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도 칼리안은 적은 수의 군사로 치열하게 싸우느라 위태로운 상황일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태연스럽게 능청을 떨 수 있었다.
“음, 아닐걸?”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게냐. 곧 죽을 놈이.”
“뭘 아니까 말해줄게. 그 배에서 내린 군대들, 왕궁으로 안 가.”
“그 무슨…!”
휘이잉-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칼을 흔들었다.
시원하면서도 짭짤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저놈이 왜 여기에…!”
바닷바람을 실은 부대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왔다.
선두에 서서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에드먼드였다.
황제의 개가 되기로 약조했던 버려진 황자.
황제는 곧장 왕궁으로 가기로 한 부대가 이곳에 떡하니 있으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즐겁게 감상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냐고? 멍청한 질문을 하네. 당신네 나라 갑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 머리로 어떻게 황제가 된 거야? 아, 억지로 신탁 지어내서 됐었지. 그럼 지성이 좀 부족할 만하네. 인정.”
“이런 고얀……. 그래도 네 년의 목을 치리라는 것은 변함없다! 지원군이 온 이상, 너희들은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번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더 황당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웃음을 추스르려 노력하며 손을 저었다.
“아, 미안. 심각한 상황이란 건 아는데 너무 웃겨서.”
“죽음을 앞둔 주제에 뭐가 그리 웃긴 거지?”
본인 딴에는 완벽하게 포위망을 좁히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가여운 것을 보는 양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야…….”
그 사이 코앞까지 다다른 에드먼드가 병사 하나를 서걱 베었다.
에임이 아닌, 이노아드의 병사를.
“우리 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