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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20)화 (120/185)

#120

란슬롯은 여전히 미소를 띠운 채 교황의 뒷덜미를 잡고서 질질 끌며 다가왔다.

적군은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던 둘의 격투를 본 터라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뭐, 뭐야…! 성하, 성하께서 당하셨다고?”

졸개 병사도 아니고 한 제국의 교황을 꺾은 인간이었다. 대번에 접근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자연스레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그 안에서, 나는 몇 분 새 떡이 되어버린 교황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란슬롯. 할 일은 다 마친 거예요?”

란슬롯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이동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무언가의 반죽을 힐끗 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름 교황이라고, 이 정도론 쉽게 죽지 않을 겁니다. 숨이 끊어지는 건 그가 가장 치욕스러워할 공간에서 이루어질 겁니다.”

“그럼 그때까진 어쩌려고요?”

“그가 여태 짓밟았던 무수한 이들의 고통을 전부 겪게 해줄 생각입니다.”

자세히 보니, 란슬롯은 단순히 그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미약한 신성력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내려가 교황의 혈관으로 스며들었다.

죽을 만큼 굴리고, 숨이 껄떡댄다 싶으면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만 되돌려놓고, 다시 굴리고, 또 치료하길 반복할 작정인 듯싶었다.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지 않았나?’

슬쩍 그를 올려다봤지만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은 여상했다.

그래, 우리 슬롯이가 개운하면 됐어. 슬롯이 마음에 들면 그만이야. 하고 싶은 거 싹 다 해!

‘여기서 같이 싸우는 건 빼고.’

이만하면 충분했다. 란슬롯의 역할은 교황을 쓰러뜨리는 것.

이 후부턴 다시 내 담당이었다. 날 돕겠답시고 진창에서 구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검지를 들어 란슬롯의 발밑을 가리켰다. 가로로 선을 긋자, 마법진이 투박한 흙덩이 위에 덧그려졌다.

“아가씨! 잠깐…!”

란슬롯이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입을 뗐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마법진에서 발한 빛무리가 란슬롯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이미 충분히 고마웠어요. 멋대로 보내서 미안하고요. 하지만 여기보단 후방에 있는 사람들이 란슬롯을 더 필요로 할 거예요.”

후방은 큰 전상을 입은 자들이 이송되는 곳이었다. 사상자를 최소화하려면 란슬롯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륙 최고의 치유사가 가니, 아무리 극심한 부상자라도 금방 툭 털고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든 손을 쭉 내밀었다.

“최고였어요, 란슬롯.”

동시에 그의 신형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란슬롯으로 인해 세워졌던 바리케이드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접근 불가한 존재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시선들이 쏘아졌다.

‘아마 킬각을 재고 있는 것이겠지.’

딱히 떨리진 않았다. 빗발치는 살기를 같이 감내해 줄 완벽한 파트너가 있었으니까.

“받아.”

휘적휘적 걸어온 하일이 웬 검을 하나 던졌다. 검 손잡이가 내 손에 딱 맞게 들어찼다.

“이건…….”

“가이즈 놈한테 뺏은 거야. 나한텐 극독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지.”

오로지 드래곤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

가볍게 베기만 해도 치명타를 줄 수 있는데, 제대로 꽂아 넣으면 드래곤의 심장까지 앗아가는 게 가능했다.

때문에 웬만하면 보관할 바에야 없애는 게 낫겠지만, 불가능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에 내려쳐도 바위가 쪼개지면 쪼개졌지 검이 두 동강 나는 일은 없었다. 하일의 발톱까지 동원해도 흠 하나 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애꿎은 식은땀만 흘리며 내게 검을 넘겨주었다.

“뭘로 만든 건지 부러지지도 않아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제일 안전할 것 같네.”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고 깊은 검신이 내 손아귀에서 반짝였다.

하일은 내가 무리 없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드래곤으로 변했다.

이어서 고개를 숙여 도처에 있던 클라인을 내 옆에 물어다 주고는 날개를 펼쳤다.

[그런 난 이만 가볼게. 내 남편 놈이 좀 고군분투중인 것 같아서.]

그녀의 커다란 동공이 향한 곳엔 사슬을 끊어내려 미친 듯이 날뛰는 실버가 있었다.

주술사 놈들이 그새 벼룩처럼 달라붙어 결박술을 시행 중이었다.

하일은 날갯짓에 바삐 시동을 거는 와중에도 클라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거기 인간, 얘 허튼짓 못하게 잘 감시해.]

곧 탄탄하게 빛나는 몸체가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클라인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조금 전 다소 독특하게 배달당한 터라 드래곤의 타액으로 축축했다.

“로얄젤리라고 생각해요. 몸에 좋을 거예요. ……아마도.”

“괜찮습니다.”

클라인이 반듯하게 답했다.

나는 두어 번 땅에 두드리던 검을 두 손으로 잡고 들었다. 클라인 역시 몸을 낮추며 공격 태세를 잡았다.

하일까지 떠나자 반격할 기회만을 엿보던 군사들이 산사태처럼 우르르 밀려왔다.

나는 그와 등을 맞댄 채 그에게 물었다.

“클라인. 아직 할 만하죠?”

“아가씨께서 다시 죽는 척만 안 하시면 더 힘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럼 완전 쌩쌩하다는 소리네요. 좋은 자세예요. 아주 훌륭해.”

다시는 허튼 짓 안 할 테니까 안심하라는 소리였는데.

“저도 이 훌륭한 자세를 부디 오래 유지하고 싶습니다.”

클라인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방금 그 한숨은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가 먼저 암기를 날리며 치고 나갔다.

나도 별수 없이 묵묵히 전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 *

“빌어먹을 왕국 하나 꺾는 게 그리 어려운가!”

황제가 이노아드 사령관의 뺨을 마구 후려치며 윽박질렀다.

믿기지 않게도, 이노아드가 작은 왕국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지도에서 찾기도 힘든 약소국, 에임. 정복 전쟁을 통틀어 최단 시간에 징벌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나라였다.

‘한데 이 한심한 꼴은 뭐란 말인지.’

어떻게 길들였는지 모를 상급마물 부대가 활개 쳤고, 대신관에 이어 교황까지 당했다. 더구나 신룡마저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다.

“제길…!”

황제는 손톱이 파고드는 줄도 모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항복 선언을 충분히 받아내고도 남았을 시간. 두 나라의 군대는 여전히 막상막하의 구도를 유지 중이었다.

황제는 치솟는 흑염을 피하며 판이 돌아가는 형국을 헤아렸다.

상당수 잃긴 했지만 아직까진 에임에 비하면 이노아드의 병력이 더 우세했다.

교황을 쓰러뜨린 놈도 자리를 뜬 판국이었다. 승산은 있었다.

‘죽으나 마나인 병사들 목숨 몇 살리겠답시고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놈을 후방으로 보내다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답게 이성적인 판단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저년의 목을 전리품으로 가져갈 수 있겠군.’

와락 구겨진 미간이 점차 풀어졌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살폈다. 한가하게 날씨 감상이나 하려함은 아니었다.

이 전쟁 이후 제국에 망명함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얻은 막강한 지원군이 있었다.

이들만 오면, 전세는 단번에 뒤집힐 것이다.

저 마법사 계집이 제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마법사 원로 여럿을 대적하기엔 무리였다.

‘슬슬 와야 하는데…. 설마 이제 와서 발을 빼려는 것은 아니겠지.’

황제는 돌연 불안감이 엄습해 협회로 곧장 연결되는 통신구를 켰다.

몇 번의 잡음 끝에 상대가 연락을 수락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떴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약속한 시간이 언젠데 아직도 머뭇거리는 겁니까! 당장 나타나지 않고!”

“…….”

그러나 성난 호통이 무색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초간 이어진 침묵 끝에 생뚱맞은 두 남녀의 대화만 오갔다.

“이건 또 뭐야?”

“아마 이노아드에서 온 연락 아닐까요. 원로들이 참전하기로 약속했는데 안 나타니까 통신한 것 같은데요.”

“그 제국이 이리 성급히도 군다는 건… 예상 못한 상황이 계속 터진 모양이지.”

“메이블린이잖아요. 누가 당해내겠어요.”

“……그건 그렇지. 우리 여친님은 그런 사람이었지. 맞아, 새삼 또 깨닫게 되네.”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 게 가당키나 한가. 황제는 발끈해서 고성을 내질렀다.

“지금 무슨 한가한 소리를…!”

“입 좀 닥쳐. 지금 갈 테니까.”

지직거리던 음성이 뚝 끊겼다. 통신구가 다시 까맣게 물들었다.

동시에, 비었던 깨끗한 하늘에 커다란 마법진이 펼쳐졌다.

황제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왔군.”

며칠 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금전 통신에서 자신을 대하는 말씨가 몹시도 무례했다.

그러나 참전할 의지까지 꺾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원로들의 등장을 기다렸다.

마침 맹랑하게 종횡무진으로 전장을 누비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제 머리 위로 곧 쏟아질 재앙을 생각도 못하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황제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이제 끝이다, 발칙한 계집.”

꽈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등장할 것을 알고 있었던 황제조차 자칫 검을 떨굴 뻔했다.

무수한 시선들이 청천으로 향했다. 난데없는 섬광을 가르고 나타난 남자가 홀로 허공에 떠있었다.

황제는 의아했다. 마법사임은 확실한데, 원로‘들’은 어디가고 혼자란 말인가.

벌써 다른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인지 핏자국이 드문드문 번져있는 옷차림은 의구심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벼락과 함께 나타난 남자가 벼락보다 더한 발언을 떨어뜨렸다.

“늦어서 미안해. 늙은 여우들이 발악을 해대서 막느라.”

다른 누구도 아닌, 적군의 계집에게.

“어디 다친 덴 없지?”

아주 다정히도 말을 건넸다.

“네가 다쳤으면, 내가 이성을 붙들고 있기가 조금 힘들 것 같아서.”

허공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진 인영이 에임 진영 앞에 섰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황제는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완벽하다는 말 외엔 어떠한 수식어도 붙이기 힘들 정도로 수려한 얼굴.

전신이 오싹해지는 존재감.

분명 마탑주였다.

세상 어떤 일에도 초연하다는 사내이기도 했다.

그런 사내가, 작은 여자 하나를 감싸기 위해 전 대륙을 적으로 돌리는 위험을 감수하다니. 그럴 순 없었다.

“마탑은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해오지 않았는가? 왜 갑자기 한낱 작은 왕국의 편을 든 것이야!”

황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노성을 연달아 터뜨렸다. 겁박도 하고 으름장도 놓아봤다.

그러나 바락바락 악을 쓰는 황제의 작태에도, 루치펠은 느긋했다.

황제의 경고는 귓등으로도 스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손가락 끝을 물어 당겨 장갑만 벗을 뿐이었다.

여유로운, 흡사 요염해 보이기까지 한 동작에 모두가 전시상황이란 것도 잊고 숨을 죽였다.

루치펠은 벗은 장갑을 정갈하게 포개곤,

“읍!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냅다 황제의 안면에 던져버렸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에임의 편을 든 적이 없어.”

루치펠은 손을 뻗어 메이블린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내 애인의 편을 든거지.”

메이블린이 대경실색한 얼굴로 루치펠을 올려다봤다. 느닷없이 뭐하는 거냐며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서글픈 얼굴로 핏자국이 묻은 그녀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넌 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지켜. 나는 그런 널 지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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