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16)화 (116/185)

#116

쌍둥이가 실버와 함께 떠나고서, 나는 시스템 창을 열었다.

여러 스킬들을 뒤적거리던 손가락은 마지막 칸에 다다라서야 멈췄다.

결코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스킬.

[이목의 속임수: 일정시간 동안 관심 수치 억제

디버프: 해당 스킬을 제외한 모든 스킬 사용 불가.]

내쉬는 호흡이 무겁다.

벌써 몇 번의 연습 게임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창을 볼 때마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관둘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관심 수치를 동결시켜놓아야, 시스템이 유지가 된다. 그러면 죽어도 언제고 회귀할 수 있다.

그러니 디버프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이 스킬을 써야만 했다.

결심을 내리자마자 커다란 창이 연달아 떴다.

[‘이목의 속임수’를 발동시킬 경우, 이 스킬을 제외한 나머지 스킬은 모두 잠깁니다.]

[해당 스킬을 발동시키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무르고 싶으면 무르라는 듯 깜박이는 선택 창.

허공만 야멸차게 노려보던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 ‘이목의 속임수(Lv.3)’가 발동됩니다!]

[24시간 동안 관심 수치가 현 수치인 56%로 유지됩니다.]

[현 시각부터 ‘이목의 속임수’를 제외한 모든 스킬이 잠깁니다.]

망설이는 순간 죽는데, 무얼 못할까.

나는 손에 쥔 검을 더욱 단단히 고쳐 잡으며 격전지로 향했다.

* * *

전운이 휩쓰는 대륙과는 동떨어진 듯 평온한 지대.

그 지대 위에 우뚝 솟은 마탑은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나무처럼 고요했다.

마탑은 으레 그래왔듯, 무수하게 일어나는 전쟁에 단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이는 법이 없었다.

제국이 차례차례 왕국들을 점령하며 영토를 넓혀도 그저 관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에임에 다다르기 직전까지는.

“이디스. 지금이라도 마음 바뀌었으면 말해. 너 하나 관둔다고 내가 밀리는 것도 아니고, 뭐라 할 사람도 없으니까. 나중에 마탑에 책임을 물을 때 나 혼자 우발적으로 벌인 단독행동이었다고 몰아가기도 편하고.”

루치펠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서있는 이디스를 향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녀는 마탑의 2인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몇 년 새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 왔다.

그렇지만 아직 전쟁을 앞두고 태연할 만큼 노련하진 못했다.

이처럼 규모가 큰 정복전쟁이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더 힘들었다.

‘어디 산책 나가는 것 마냥 구는 탑주놈이 이상한거지.’

얼씨구 좋구나 하고 전쟁에 나갈 머저리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이디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을 부릅떴다.

“아뇨! 저도 싸울 거예요! 한 번 스승님은 영원한 스승님! 제자 된 도리로서 메이를 외면할 순 없어요!”

“그럼 그러던가.”

패기 넘치게 내지른 외침이 무색하게도, 평소와 다름없는 담백한 답이 돌아왔다.

그것이 나름대로 제 상사가 보이는 기특함의 표현이란 걸 아는 이디스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오르는 열정으로 그 담백함을 덮어버리고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막 진의 첫 획을 그리려던 때.

벤이 거친 숨을 내쉬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원로들을 주시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런 그가 이리도 다급하게 왔다는 건, 그 만일의 사태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소리였다.

“탑주님! 원로들의 낌새가 이상해요! 제국과 거래한 증거를 발견해서 제대로 따지러 갔더니, 다들 전쟁이라도 나갈 태세로 보호 마법을 두르고 계시고…!”

벤의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루치펠의 검은 마력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기어이 이렇게 나오시겠다.’

자신을 거둬준 전 마탑주와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탑의 분화만큼은 막고 싶었는데. 그조차도 이젠 불가한 지점에 다다랐다.

그간 탑의 꼭대기 자리를 지키며 얼마나 많은 위협을 받았던가.

수없이 끼쳐온 같잖은 수작질에서도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이디스. 아무래도 노선을 조금 틀어야겠다.”

공격 중에선 선제공격이 제일이라는 점이었다.

루치펠은 손등을 덮은 검은 가죽 장갑을 더욱 단단히 죄었다.

간만에 살의가 깃든 눈동자가 포악하게 번득였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짙은 살기와 함께 사라지고. 이디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뒤를 따랐다.

“일 났네.”

* * *

마탑에서 갈라져 나온 원로들의 탑.

한창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발걸음 사이로 기류가 한차례 요동쳤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기에, 제게 인사 한 마디들 없으십니까.”

허공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목소리.

원로들은 별다른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찔리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제국의 마지막 전쟁을 확실하게 끝내주는 대가로 망명하려던 속셈을 이미 들켰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

그들은 아래를 내다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깨달았다.

여태껏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발 물러나 있었던 거라고.

맹수가 지나가는 토끼 한 마리에 연연하지 않듯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거라고.

원로들은 그 오만한 시선을 못내 견딜 수 없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넌 언제나 그랬지. 홀로 고고한 척 서서, 우릴 무시하고 까 내리기 일쑤였어. 누군지도 모르는 부모에게 버려져 진흙탕을 구르던 주제에!”

“지금 말 다하셨어요? 참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쩜 이리도 뻔뻔하게…!”

“됐으니 물러나 있어, 이디스.”

발끈하며 열을 내는 이디스를 루치펠이 제지했다.

대신에 그는 비틀린 조소를 보란 듯이 터뜨렸다.

“말을 높여드리는 것만으론 성에 안 차셨나 봅니다. 이조차도 감지덕지해야 할 분들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것. 한 번이라도 공손하게 굽힐 줄을 모르는구나!”

“존경할 만한 점이 있어야 그리 하지요. 굴러다니는 돌멩이에게 배울 점이 더 많은 판국에, 그 이상을 원하시는 모습들이 아주 염치도 없으십니다.”

“네놈이 기어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원로들은 저마다 살기를 터뜨렸다.

동시에 비릿하게 올라갔던 루치펠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낙하했다.

“성가신 건 질색이라, 빨리 끝내고 싶은데. 한꺼번에 달려드셔도 말리진 않겠습니다.”

매섭게 얼굴을 굳힌 그는 제게로 쏟아지는 광포한 살기를 오롯이 받아내며, 여유로운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명색이 원로이신 분들의 낯이 좀 화끈거리기야 하시겠지만. 원래부터 자존심을 챙기는 분들은 아니셨잖습니까?”

“이곳이, 오늘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꼭 자신이 어느 수준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그리 말하곤 하지요. 이제라도 아시면 좋겠습니다.”

“입만 산 녀석.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열댓 명의 원로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디스는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한 명 한 명이 어중간한 태도로 상대하기엔 버거운 자들이었다.

비록 자신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곤 해도, 그 노련함은 쉽게 덤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근데도 탑주님은…….’

어느새 루치펠의 검은 마력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짙게 공간을 장악했다.

원로들은 금방이라도 먹잇감을 조일 뱀처럼 둘러싸듯 원형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미치겠네.’

이디스는 울상을 지으며 방어 태세를 잡았다.

애써 들이쉰 숨 사이로 각종 공격 마법이 쇄도하고,

콰쾅!

첫 합부터 탑의 천장이 날아갔다.

* * *

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거칠게 쓸었다. 땀 때문에 엉겨 붙었던 잔머리가 대강 제자리를 찾았다.

“허억, 헉…!”

비릿한 맛이 나는 숨이 폐부를 날카롭게 찌르며 터져 나왔다. 꼭 피가 섞인 기침을 하는 느낌이었다.

이노아드군과 부딪친 지 얼마나 됐다고 등골이 다 삐걱거렸다.

닥치는 대로 몸을 날린 탓도 있지만, 압도적인 수 차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잠시 클라인에게 지휘를 맡기고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몰아쉬었다.

“망할… 저게 다 사람이라고?”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보자 핏기가 싹 가셨다.

단언컨대, 살면서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드는 장관을 본 적이 없었다.

제국은 진군하면서 정복한 나라들의 군사력까지 동원한 것인지 그 규모가 엄청났다.

에임이 다람쥐라면, 이노아드는 코끼리였다.

있는 지도 모르고 내딛은 걸음에 찍소리 한 번 없이 죽는 다람쥐.

애초에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임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었다.

에임의 군사들은 그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국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자긍심 하나로 나섰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혹은 당연한 결과라고 여겼던 대로.

우리는 초장부터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어, 어째서 마물이… 컥!”

개미떼처럼 우글거리는 병사들만으로도 기함하겠는데 설상가상으로 신녀가 길들인 마물들까지 덮쳐왔다.

“돌겠네. 저런 것과 싸워야 한단 말이야?”

떨어진 사기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 악물고 버텼지만 더는 무리였다.

칼리안은 노아, 슈타커와 함께 왕궁에 잔류하기로 했다. 수도 쪽으로 곧장 들어오는 침입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곳의 군대를 이끌 책임 사령관은 나뿐이었다.

허울 좋게 말해 부사령관이지, 국왕은 처음부터 나를 자신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는 방패막이로만 여겼다. 물론 이를 알고도 참전한 터라 불만은 없었다.

“클라인!”

내가 신호하자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후퇴하라! 전군 후퇴하라! 후퇴!”

에임의 기사들은 용맹함을 버리고 뒤로 내달렸다. 와중에도 몇몇은 제국의 무자비한 공격에 맥없이 쓸려나갔다.

나는 남은 이들을 이끌고 조금씩 하천 쪽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물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자, 후퇴행렬은 멈췄다. 이 순간에도 적군은 맹렬한 기세로 몰아쳐오는 중이었다.

이쯤이면 도망칠 수 있는 만큼 도망쳤다.

‘슬슬 판을 엎어볼까.’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하일!”

푸곽! 멀리서 검은 형체가 치솟았다.

내 부름을 들은 하일이 이노아드군과 에임군 사이를 낮게 가로질러 날았다.

비행하며 토해낸 흑염이 화르르륵 불길을 만들었다.

마른 풀들이 단숨에 타오르고, 드넓은 평야에 붉은 줄이 생겼다.

마치 접근 불가를 주장하듯 그어진 선.

이노아든 군은 무기에 화염 방지 마법이라도 건 것인지 큰 피해는 줄 수 없었지만, 잠시나마 진군을 멈추게 할 순 있었다.

“시간이라도 벌려는 것인가? 어리석긴! 이쯤은 얼마든지 짓밟고 지나갈 수 있다. 네놈들은 멍청한 계집을 사령관으로 두어 떼죽음을 당하겠구나!”

황제는 하일의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고 되레 더 심리적으로 몰아붙였다.

무기와 갑주의 속성도 그렇고, 의연하게 구는 작태도 그렇고. 신수들의 생존 사실을 알고 미리 준비했다고 밖엔 볼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진 몰라도, 이건 내가 한 방 먹었네.’

나는 칼을 땅에 박아 넣고 그것에 지탱하고 섰다.

뒤는 맨몸으로 건너기엔 절대적으로 무리인 하천이었고, 앞은 까마득한 수의 군대였다.

그야말로 배수지진인 상황.

하일이 창공을 상회하며 적군 한가운데에 브레스를 쏘았다.

그러자 성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한데 이어 붙인 방패 위로 푸르스름한 막이 형성되었다.

브레스는 요란하게 쿵, 소리만 낼 뿐 의미 있는 피해는 주지 못했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쥐 신세를 자처한 꼴에,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신룡의 공격은 결계로 막으면 그만이다. 쓸데없는 짓 말고 그만 항복…….”

말을 잇던 황제의 거구가 일순 휘청였다.

“이게 무슨…!”

짤막한 신음이 채 입 밖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이노아드 군의 얼굴에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기색이 점차 번져나갔다.

드드드드드.

잠잠하던 땅이, 별안간 태동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