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체크메이트
#115
나는 란슬롯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칼리안 대신 마신, 치사율 100%인 독의 해독을 위해서 찾아갔던 날.
그는 단 몇 시간 만에 독 기운을 내 몸에서 완전히 몰아냈었다.
아무리 내가 코어를 지키고 있었다곤 하나, 웬만한 신성력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교황 본인이거나, 적어도 그의 자손이어야만 했다.
‘그 땐 그런 사람을 제국에서 쫓아낼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란슬롯은 예외인 줄 알았지만.’
그러나 예외는 없었다. 어렴풋이 했던 내 추측은 정답이었다.
나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실타래처럼 늘어진 머리카락 끝은 반복된 염색으로 다소 얼룩덜룩한 상태였지만 위쪽은 반대였다.
깨끗하게 빛나는 아쿠아마린색 머리칼. 그리고 선명한 분홍색 눈.
이와 비슷한 외양을 본적이 있었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듯 판박이인 수준이라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이노아드 교황청 회장에 일렬로 걸려있던 16대 교황의 초상화.
그림 속에선 밝은 청색 머리칼의 남자와 분홍색 눈을 가진 여자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책을 통해 읽었으니까.’
역대 가장 강력했던 신권시기를 지배한 교황, 라슬로 위즐 헤르스만.
그는 슬하에 자식을 여럿 두었는데, 라슬로의 신성력을 온전히 물려받은 자만이 그를 닮은 머리칼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 힘을 가진 자손들이 이어 차기교황으로 추대되었다.
란슬롯 역시 순리대로라면 그 길을 밟아야 했을 터였다.
한데 라슬로가 죽은 뒤, 권력을 탐했던 세력에 의해 그의 가문은 전복 당했다.
그 후 란슬롯은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홀로서기엔 아직 어렸던 그를 막아줄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멋모르던 아이 때와는 달리 란슬롯의 머리가 좀 크자, 현 교황에겐 매우 성가신 눈엣가시였으리라.
그렇게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좌천되었다.
대륙에서 어디쯤에 붙어있는지도 잘 모르는 작은 왕국, 에임으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성유물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말이 좌천이지, 모든 지원이 거의 끊기다시피 한 터라 유배생활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슬슬 다음 그물을 던졌다.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이런 구석진 왕국에 처박힌 거, 분하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실추된 명예, 되찾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
던지는 족족 철통방어로 응수하던 란슬롯은 잠시 침묵을 고수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마른세수와 함께 긴 한숨이 지나갔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가족들만으로도 족합니다. 아가씨까지 잃을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그래요. 저도 제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지키고 싶어서. 그래서 나가는 거예요. 그 빌어먹을 놈들이 계속 떵떵거리게 둘 순 없으니까요.”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개죽음 꼴만 당할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한들 한 번이라도 물어보고 죽은 개가 낫죠. 란슬롯은 교황 앞에 고개 숙여줄 거예요? 세상이 자기 발밑에 있는 것 마냥 짓밟고 무시하도록 놔두는 게, 란슬롯의 뜻인가요?”
“세상이 그런 걸 어찌합니까. 여태 아가씨를 믿어왔지만,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전 아가씨가 무모하게 전장에 몸을 내던지는 짓, 절대 용납 못합니다.”
내가 무엇을 제안하든 항상 수락하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완강하게 나왔다.
물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세상, 내가 뒤집어줄게요. 나한테 한 번 걸어 봐요.”
나는 책상을 탕 치며 눈을 부릅떴다.
란슬롯은 불꽃이 일렁이는 눈으로 날 보다가, 이내 고개를 수그렸다.
“……제가 아무리 말려도 아가씨께서 결정을 번복하시는 일은 없겠죠.”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꼭 수면 아래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마주한 낯빛 역시 그러했다.
조금 틈이 생겼다고 생각했던 철벽이 다시금 쌓이기 시작했다.
란슬롯은 정도(正道)만을 걷는 사람이었다.
내가 전쟁터에 불나방 마냥 뛰어드는 것이 그에게 있어 정도가 아니라면,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 앞이 휑했다.
시야를 채우고 있어야할 란슬롯은 어느새 예배당 구석에 놓여있는 진열장 앞에 서있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진열장 안은 잡다한 장식품들 혹은 색색의 약병들이 늘어져 있었다.
란슬롯은 수많은 약병들 중 하나를 집어 자리로 돌아왔다.
“저는 모든 것을 잃은 뒤로,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리가 짧지만 위험한 길보단 멀어도 안전한 길을 택하는 편이죠.”
“란슬롯…….”
“때문에 아가씨의 제안은 어렵겠습니다만.”
그는 들고 온 병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에는 한 번 걸어보죠.”
란슬롯의 손짓에 따라 병에 든 주홍빛 액체가 찰랑였다.
성유물 넥타르였다.
나는 그 찰랑임이 잦아들 때까지 멍하니 있다가, 봄처럼 포근한 분홍색 눈을 마주했다.
“란슬롯. 제국에서 내가 약속했던 거 기억해요?”
원수를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나는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그렇다고 기회가 영영 없는 건 아니에요. 없으면 만들면 돼요.”
-……예?
-그새 잊었어요? 이젠 둘이니 쉽게 부러지진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 기회, 반드시 만들어줄게요.
복수할 수 있는 날을, 란슬롯 앞으로 어떻게든 가져오겠다고.
나는 넥타르를 받아든 대신 품에서 꺼낸 작은 쪽지를 그의 손에 쥐어줬다.
에드먼드와 간간이 주고받았던 밀서 중 하나였다.
“기억한다면 일어나요. 만들어주겠다던 그 기회, 지금 잡아왔으니까.”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란슬롯의 아랫입술이 잘게 떨렸다.
커다란 비밀을 품고 있는 쪽지는 아니었다. 그저 전쟁에 참가하는 제국 거물들의 명단이었다.
다만 그 거물 중 하나가, 란슬롯의 숙원이었을 뿐.
‘이 전쟁엔 교황도 성기사단을 거느리고 참여하지.’
그리고 전쟁터는,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판이나 다름없었다.
각자의 전투와 생사에 치열해서, 타인의 죽음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공간.
제아무리 강자라도 자칫 한눈팔면 그대로 스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각축장.
판은 기필코 깔려지게 돼 있고, 장기 말들은 이미 움직였다.
‘그러니 우리 쪽도 기꺼이 움직여주는 수밖에.’
란슬롯이 단순하게 치유만 할 수 있었다면 이런 제안,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전쟁터를 누비기엔 돌부리에 발이 걸리기만 해도 고꾸라질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평범한 신관이 아니었다.
치유는 물론이고 검투까지 가능한, 성기사.
제국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던 3년 동안 더 이 악물고 검술에 매진한 터라 그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의자를 빼고 일어서며 란슬롯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족을 잃고 울던 어린 아이는 이제 없어요. 지금의 당신에게 원수 정도는 한입 거리도 안 되겠죠. 안 그래요, 교황님?”
달라진 칭호에 란슬롯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아이, 뭘 빼고 그러시나. 우리가 이길 텐데, 그럼 교황 자리도 당연히 교체될 거 아닌가.
이왕이면 썩은 뿌리보단 맑은 물 같은 사람으로.
기회가 이렇게 닥칠 줄은 몰랐는지 란슬롯은 상당히 얼떨떨해보였다.
조금 주저하는 듯도 해서, 나는 부러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는 의미 없고 무가치하지 않아요. 복수함으로써 란슬롯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씻겨나간다면,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
“설마 용서가 최고의 복수라느니,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느니, 가해자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느니. 뭐 그딴 개소리들을 따를 건 아니죠? 그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적용시켜야지, 짐승만도 못한 놈한테까지 자비를 베풀면 못 써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뭐해요, 얼른 안 잡고.”
나는 어서 악수해달라는 식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눈을 끔벅이며 내 손을 바라보다가, 못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작은 미소에 불과했지만 한껏 옹송그렸던 꽃망울이 탁 터지듯 시원한 웃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란슬롯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아가씨께서 잡아오신 그 기회,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이로서 교황을 압도할 신성력을 가진 성기사도 준비됐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단 게 느껴졌다.
묘한 긴장감에 발끝이 간질거렸다.
‘이제 정말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게 실감나네.’
모두가 자국을 지키기 위해 분주한 이때.
나는 황야에서 마주하게 될 얼굴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얼굴들.
내 목표는, 고작 적국의 킹 따위가 아니다.
우리를 감히 짓밟은, 우리를 향해 감히 칼을 빼든.
판에 올라온 모든 이들의 전멸이다.
* * *
휘이잉-
버석한 모래바람이 도미노처럼 늘어진 막사들을 한차례 쓸며 지나갔다. 나는 그제야 따끔거리던 눈을 떴다.
바람마저 비릿한 냄새가 나는 이곳은 에임의 경계지역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는 곳.
이노아드는 어느덧 수많은 왕국들을 정복하고 마지막 먹잇감으로 에임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제치고 최전방으로 나아갔다.
잭과 재키를 등에 태운 실버가 그 뒤를 따라붙었다.
“주군. 저흰 준비 됐어요. 출발할까요?”
쌍둥이가 다소 초조한 얼굴로 내 지시를 기다렸다.
펜트런 길드를 비롯해서 던켈하이트의 많은 길드들이 참전을 자처한 터라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건만. 쌍둥이는 막무가내로 나를 따라왔다.
‘그래도 그나마 가장 안전한 역할이 이거니까…….’
나는 아가레스와 맺었던 계약서를 주면서 마른 입술을 뗐다.
“거기서 기다리다가, 내가 신호하면 이걸 찢고 나와. 찢는 순간 마물부대가 깔릴 테니까 겁먹을 건 없어. 실버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올 테고.”
“겁먹긴, 누가요. 오히려 흥분되는데요.”
으스대는 말과는 달리 잭의 얼굴은 다소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를 본 재키가 잭의 옆구리를 찌르며 이죽였다.
“오줌이나 싸지 마, 멍청아.”
다소 충격적인 단어를 들은 실버가 움찔 몸을 떨었다. 방금 말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이구, 얘들아. 어르신 놀리는 거 아니야. 그럼 못써. 떽.
나는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잔뜩 쫄아있는 잭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괜찮아, 긴장 풀어. 별거 아니니깐. ……안 그럴 거지?”
실버 털 노란색으로 염색 안 시킬 거지? 안 쌀 거지? 그치?
그러나 내 당부가 무색하게도, 잭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노, 노력해 볼게요.”
그러자 실버의 커다란 몸이 한차례 더 움찔 요동쳤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의 콧잔등을 쓸어주었다.
“걱정하지 마요, 실버. 다 잘 될 거예요. 실버는 노란 털이어도 멋지고요. 하하, 하…….”
늑대의 우렁찬 하울링 대신 끼잉대는 울음소리가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슬픈 눈은 내 착각이겠지.
음. 그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