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사실, 그와 나는 전에 없는 냉전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루치펠은 내가 전쟁에 참전하려 한다는 것을 기어코 알아냈다.
눈치가 보통 눈치가 아닌데, 애초에 끝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알아버리는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 있기만을 바랐다.
‘결과적으론 제법 버틸 만큼 버텼다 싶은 때 즈음에 들켰지.’
처음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다음엔 필사적으로 날 설득했다.
그러다 끝내는, 온갖 미인계란 미인계는 다 쓰면서 매달렸다.
아직도 내가 어떻게 그 천국 같은 지옥에서 용케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미인계는 엄청난 효과를 자랑했다.
그래서 더 뇌에 힘을 잔뜩 주고 버텼다. 본능을 억누르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 줄 나는 그 날 알았다.
-메이블린, 제발…….
-미안해, 루시.
온갖 회유책에도 내 결심엔 변함이 없자, 그는 결국 탑에 틀어박혔다.
‘평소엔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전에 득달같이 달려오곤 했었는데.’
그를 보지 못한지도 벌써 꽤 됐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눌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정면 돌파를 감행하는 수밖에.’
나는 창틀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마탑으로 텔레포트했다.
* * *
“루치펠! 루시! 어딨어?”
엄마 잃은 아이처럼 애타게도 불렀건만, 대답은커녕 검은 머리칼 끄트머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기에 차서 소리쳤다.
“나올 때까지 안 돌아갈 거야!”
이번엔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를 찾는 엄마의 심정으로 탑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루치펠은 4층에도, 38층에도, 꼭대기 층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디스를 비롯한 탑의 마법사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으나, 다들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같은 답만을 내놓았다.
-죄, 죄송해요 선생님…. 저흰 몰라요. 그냥, 그냥 몰라야 해요.
루치펠이 단단히도 으름장을 논 모양이었다.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강경책을 쓰는 수밖에.’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옥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난간에 기대서 아래를 잠시 내다보다가,
“3초 안에 나와라 하나 둘 셋!”
그대로 몸을 떨어뜨렸다.
금전까지 발을 딛고 서있었던 꼭대기가 점점 멀어졌다. 풍향이 일정하지 않은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으며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력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곧 땅바닥에 내 머리는 직격할 것이고, 탄성력 없는 수박처럼 와드득 깨지리라는 것을.
그러나 다행히도, 혹은 당연하게도.
“내가 정말 미치는 꼴이 보고 싶은 거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면과 불과 일 미터가량 만을 남겨두고서 허공에 몸이 떠있었다.
공중에 내 몸을 묶어두는 마법이 탁 풀리자마자, 나는 루치펠의 품속으로 떨어졌다.
“오, 왔네. 올 줄 알았어.”
“넌 진짜 미쳤어.”
“그런 날 사랑하면서.”
그는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손을 뻗어 루치펠의 뺨을 감쌌다. 그는 이번에도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꾹 감았다 뜬 루치펠은 나를 땅에 내려주며 짓씹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나한테 이번 전쟁에서 빠지라고 얘기할 거면 소용없어. 돌아가.”
“안 돼. 싫어. 안 돌아갈 거고, 말할 거야. 오지 마. 마지막으로 이 얘기하러 왔어.”
“네가 왜 그런 걸 결정하는데.”
“너 나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줘.”
“……너 참 잔인하다. 다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냐.”
나도 내가 연인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만약 루치펠이 승산 없는 싸움에 몸을 던진다면, 나라도 그를 끝까지 붙잡을 테니까.
하지만 내 싸움은 승산이 없지 않았다.
‘다만 평범한 말로 이를 납득시킬 수 없을 뿐이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난 이 전쟁에서 반드시 제국을 꺾을 거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됐다.
“루시가 나서는 건, 마탑이 나서는 거야. 언제나 중립을 지키던 마탑이 에임의 편을 든다면, 그건 에임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너도 알잖아.”
루치펠이 나 때문에 수많은 국가들을 적으로 돌리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의 목을 애써 끌어당기고 있는 힘껏 안았다.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나도 널 좋아하기 때문에 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어.”
아무리 루치펠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 해도 전 대륙을 상대로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마탑은 하나고, 그 높다란 탑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우는 순간. 그를 적대시할 국가는 이리떼처럼 불어날 테니까.
두려움의 싹을 남겨두느니 이참에 제거하는 방식을 택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평범하고 흔한 것보다, 고고하고 희귀한 것을 타락시킬수록 더욱 열광한다.
그들은 처참하게 부서진 잔해를 안주 삼아 낄낄대고, 웃고, 길이길이 떠들 것이다.
그 사악한 마탑을, 모두가 힘을 합쳐 무너뜨렸다고.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루시, 제발…….”
꾹꾹 눌러 삼키듯 속삭이는 내 목소리에, 루치펠은 거의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부탁이야. 이번 한 번만 내 말대로 해줘.”
그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 * *
그 시각, 이노아드는 출전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신녀 에리스의 힘 아래 길들여진 마물들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수의 군사들, 신룡을 잡을 특수 용병과 주술사들까지.
전부 정복을 시작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머지않았어…….”
에리스는 마법사협회 원로들에게 비밀리에 받은 무기까지 확인하고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탑주가 에임을 공격하는 도중에 나설까 하는 우려는 있었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마탑엔 몇 백 년을 이어온 금기가 존재했다.
절대로 어느 세력에도 편협하지 말 것. 중립을 지킬 것.
마탑주가 이를 어기면 대륙 전체를 지배하던 무언의 법칙이 깨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신에 다른 당위성이 떠오르겠지.’
마탑은 더 이상 독자적이고 공명정대한 세력이 아니니, 더 위협이 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러니 그 눈엣가시 같은 여자 하나 때문에 그 거대한 법칙을 깨뜨릴 리가 없었다.
‘혹 그를 어기더라도 괜찮고.’
사랑에 눈이 먼 마탑주가 기어이 참견할 것을 대비해 원로들과 거래를 마친 상태였다.
에임에 오기도 전에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될 것이었다. 변수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리스는 황궁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황제를 만나야겠다.”
“알현 시간을 잡겠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에리스에게 시종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으나 그녀는 단호했다. 서슬 퍼런 눈빛이 집요하게 쏘아졌다.
시종은 별 수 없이 황제께 허락을 구한 뒤 에리스를 내실로 안내했다.
이윽고 황제 앞에 선 그녀는 호수 위의 백조처럼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신탁 내용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서둘렀는가?”
우습기 그지없는 상황극이었다. 애초에 신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거짓 신탁을 직접 내리고, 받았다.
진상을 알지 못하는 대신과 국민들은 그저 이들의 행보를 제국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다 줄 혁신으로만 보았다.
모든 것을 굽어보고, 전지전능할 것이 분명한 신이 내린 음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에리스는 맹목적인 그 믿음에 심심찮은 감사를 보내며 고개를 들었다.
“전쟁을, 시작하시랍니다. 그리고 그 끝은, 반드시 에임 왕국이어야 한다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아, 마침내. 황제의 얼굴에 언죽번죽한 미소가 떠올랐다.
끝이 에임이면 어떻고 이름도 모르는 다른 나라면 어떠랴. 그는 하루 빨리 속에서 들끓는 정복욕을 해소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드디어 말을 움직일 수 있겠군.”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광기를 담고 일렁였다. 에리스의 입매도 덩달아 짙게 파였다.
‘이번에야말로 네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나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
* * *
“허억!”
메이블린은 가슴께를 쥐어짜듯 움켜쥐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릅뜬 두 눈은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공허했다.
“다리, 다리가…. 팔이…!”
그녀는 몸이 멀쩡한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전신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막 들어온 그녀의 전담 하녀, 달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하아…. 다행이다.”
메이블린의 어두운 낯빛을 확인한 달리아가 난색을 표하며 다가갔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 조금 더 주무세요. 요즘 너무 무리하셨잖아요.”
“아냐, 됐어. 지금 깨워줘서 고마워. 잠깐 악몽을 꿔서 그래. 때가 때이다 보니.”
“며칠 밤을 계속 새시니까 악몽을 꾸시죠. 전쟁도 체력이 있어야 나가요. 숙면 좀 취하세요.”
“정말 괜찮대도.”
메이블린은 더 이상의 잔소리는 사절이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다는 걸 확인시켜주려는지 그녀는 제법 빠릿한 동작으로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목욕물 좀 데워줄래? 씻고 나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달리아는 맘 같아선 그냥 쉬시지 어딜 또 나가냐고 뜯어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 아가씨는 그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란 걸, 지난 몇 년 간의 전적들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네. 바로 준비할게요.”
달리아가 결국 마지못해 대답하고 물러났다.
방 안에 혼자 남자, 메이블린은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코끝이 쎄할 정도로 찬바람이 훅 끼쳐들었다.
완벽한 겨울날씨였다. 전운 역시 완연하게 돌고 있는 때였다.
콕콕.
포르르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창문을 쪼아 메이블린의 시선을 붙잡았다. 에드먼드가 보낸 전령새였다.
“잘 찾아와줘서 고마워.”
메이블린이 내민 팔 위로 새가 포르르 앉았다. 발에는 돌돌 말린 작은 쪽지가 묶여 있었다.
실을 풀어주니 새는 다시 날아갔다. 메이블린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쪽지를 펼쳤다.
종이에 마력을 흩뿌리자 에드먼드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날린 듯한 글씨가 나타났다.
「우린 지금 잉가시안에 와있네. 사흘 전엔 피렌테의 수도에 있었지. 무서운 속도로 그대의 나라로 내려가는 길이야. 이미 많은 나라들이 항복을 선언했어. 나와 콜린은 이쯤에서부터 육군과 갈라질 예정이라 더 이상의 정보는 주지 못할 듯해. 적어도 닷새 내로 에임에 당도할 예정인 것 같군. 머지않아 볼 터이니, 그때까지 부디 잘 지내게.」
제국은 파죽지세로 대륙을 하나하나 정복해가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종 도착지는, 다름 아닌 에임이었다.
행로를 보아하니 빠르면 사흘 후쯤, 늦어도 닷새가 지나기 전 격전이 일어날 듯싶었다.
메이블린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쪽지를 뒤집었다.
늘 그랬던 대로, 뒷면엔 짧은 사담이 적혀있었다.
「추신. 콜린은 굉장히 들떠있어. 그대의 생각보다 훨씬 잘 적응했으니 걱정 말게. 나는 그대가 더 걱정되는군. 모든 게 다 끝나면, 같이 차 한 잔이나 하지. 그대에게 나보다 잘생긴 사내가 있다는 건 들었네만, 친우로서 그 정도는 괜찮겠지.
행운을 빌겠네.
-세컨드 에디로부터.」
‘누구 맘대로 세컨드야.’
퍽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픽 웃음이 나왔다. 에드먼드도 이를 바라고 농을 친 것일 테다.
잠깐이었지만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메이블린은 피로로 짓무른 눈가를 문지르며 창가에서 몸을 뗐다.
“오늘이… 오늘로 끝났으면 좋겠다.”
간절한 바람이 야트막한 숨처럼 새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