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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09)화 (109/185)

#109

내 발언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사실 미리 합의를 본 칼리안을 제외한 모든 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있는 상태였다.

아빠는 벌써부터 눈가를 촉촉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신수 가족은 돌아오자마자 이럴 생각이었냐며 날 마구 다그쳤다.

클라인과 슈타커는 대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밧줄을 들고서 내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뭐, 뭐예요. 절 묶어두기라도 하시게요?”

“필요하다면,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메이.”

“그리고 지금이 그 때라고 사료됩니다, 주군.”

점잖게 슬슬 밧줄을 푸는 두 콤비에 이어 쌍둥이도 나섰다.

“이왕이면 방에 감금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허튼 짓 못하게 감시도 돌아가면서 하고요!”

아니 저기 이 양반들아…. 나 때문에 이런 취향까지 개조한 거야? 감금 플레이를 즐기게 된 거냐고.

“좋은 생각입니다, 잭 재키.”

아니, 뭐가 좋아. 하나도 안 좋아.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지만 미처 변명하기도 전에 노아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내 말을 잘랐다.

“아니, 중요해. 거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나서겠다는 거야!”

물론 나라고 순순히 밀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던 걸 멈추고 목소리에 기를 담아 단호하게 응수했다.

“그래. 거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근데 나한텐, 내 사람들이 중요해. 당장 노아 오빠만 해도 반드시 참전해야 하잖아.”

노아는 황궁 제1기사단의 단원이었다. 칼리안이 끌고 나가는 군대에는 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들을, 이 나라를 지키고 싶어.”

“알지만, 메이블린…!”

“무턱대고 나서는 게 아니야. 나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고,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자신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게 쏠리는 모든 시선들이 뜨겁다. 나는 이들을 내가 몇 번이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고 싶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나랑 함께 해줬으면 좋겠어요, 다들.”

내 싸움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견뎌야만 했던 3년은 너무나도 고독했다.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부디 내가 가야만 하는 이 길을, 같이 걸어줬으면 좋겠다.

비록 그 길이 전장 위의 생사가 오가는 갈림길이더라도.

‘이기적인 바람이겠지…….’

아무리 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지만, 살지 죽을지 분명치도 않은 곳을 함께해 달라는 건 무리한 부탁이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걸 말이라고. 그럼 우리가 널 혼자 둘 줄 알았어?”

바람 빠진 실소를 시작으로 댐의 수문장이 열린 것 마냥 저마다의 다짐이 터져 나왔다.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거예요. 아니. 애초에 도망은 떠올리지도 못하게 할 거예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군의 곁을 지킬 겁니다. 어떤 순간에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넌 우리에게 새 삶을 준 구원자야. 3년 넘게 지냈으면서, 아직도 우릴 몰라?”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내게 확신을 주는 말들.

울렁이며 차오르는 감동 속에서, 슈타커가 마지막으로 첨언했다.

“메이는 가끔, 너무 당연한 것을 물을 때가 있습니다.”

손에 든 밧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아이 공작님…. 밧줄은 좀 놓고 다가오시면 안 될까요. 진짜 감금당할 것 같은데…….

주춤거리는 내 기색에도 슈타커는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그녀의 욕망을 토해냈다.

“일단 오늘 하루는 괘씸죄로 1일 감금형에 처하겠습니다.”

아니 저기, 진심이셨나요.

당황스러웠지만 더 큰 문제는 또 있었다. 공작님의 이 은밀한 취향을 말리기는커녕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단 점이랄까.

나는 스탑의 표시로 다급하게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다니엘 오빠! 이건 솔직히 좀 비윤리적이지 않아요? 아니 내가 몇 살인데. 우리 이러지 말자, 응?”

다니엘이 잠시 주춤했다. 역시, 반듯한 우리 오빠가 이런 괴랄한 짓에 동참할 리가…….

“저는 적극 찬성하는 바입니다, 에스카로트 공작님. 계속 진행하시지요.”

뭐지? 도덕적인 걸론 공자맹자 못지않은 다니엘이 왜 저러지? 공주 상태도 아닌데?

나는 이번엔 클라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용사여, 내 간절한 SOS가 보이지 않나요?

“…….”

클라인마저 말없이 내 시선을 피했다.

모두에게 외면을 당한 나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안 그럴 거죠?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런 딸이 이렇게 쳐다보는데. 아빠만 믿어요, 네?

그러나 기대는 처참하게 산산조각 났다.

“방은 2층에 있는 응접실 옆이 좋겠어. 도망치면 바로 눈에 띄도록.”

그는 심지어 감금할 방을 안내해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그렇다네요, 메이.”

슈타커가 생긋 웃으며 한 발짝씩 다가왔다.

눈이 멀 것만 같은 찬란한 미소가 분명한데…. 왜 속이 이렇게나 떨리는지 모르겠다.

‘뜨으, 잘못했어요, 아 잘못했다고요오!’

결국 나는 이 날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혔다. 다행히 몸이 묶이지는 않았지만, 모든 이들에게 돌아가며 벌을 받았다.

손수 떠주는 스프와 디저트 받아먹기, 소박한 마음이라 쓰고 산더미라 부르는 보석과 선물 받아주기, 푹신한 침대와 콜린의 부드러운 털에 둘러싸여서 잠 푹 자기라는 형벌에 처해졌다.

* * *

어둑한 어스름이 깔린 저녁.

“부르셨습니까, 신녀님.”

응접실의 초입에서부터 한 남자가 고개를 꾸벅였다. 남자의 얼굴은 검은 가면으로 반절가량 덮인 모습이었다.

미처 덮지 못한 가면 아래론 일그러진 화상 흉터가 이따금 보였다.

가이즈는 등을 돌리고 서있는 에리스 앞에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리스는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닥거리는 모닥불 앞에 서서 느릿하게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장검이 들려있었다. 검은 칼날에 비춰든 불그스름한 불꽃이 일렁였다.

칼자루 부분을 제외하고는 먹에 적셨다 건져낸 듯 새까만 검신.

지상 최강의 존재라 불리는 드래곤의 심장을 베어낼 수 있는 검.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본디 인간계의 광물로는 만들지 못하는 검이었으나, 에리스는 마침 딱 맞는 재료를 가지고 있었다.

마계의 왕자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잘라냈던 뿔.

두 개 전부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악마들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훔쳐갔는지 사라졌다.

그 탓에 완전한 드래곤 슬레이어에 비해 위력이 조금 떨어졌다. 그래도 문제될 건 없었다.

‘역린만 정확히 공격한다면, 드래곤의 숨통을 끊는 게 가능해.’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받아라.”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가이즈는 고개를 들었다.

신녀의 하얀 두 손 위에 자리 잡은, 끝없는 심연을 품은 검.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그의 동공이 찰나 커졌다.

“……어찌 제게 이것을 주시는 겁니까?”

가이즈는 검을 덥석 받는 대신 저의를 물었다. 그러자 새벽이슬 같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떨어졌다.

“그레이에게 들었다. 메이블린 슈트레커. 그 여자에게 깊은 원한이 있다지.”

마침표가 아니라 꼭 쉼표가 찍힌 느낌이 드는 문장이었다.

마치 그 뒤의 사연까진 굳이 덧붙이지 않겠다는 것처럼.

반듯한 가이즈의 눈썹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제길. 실비아가 메이블린이었다는 걸 들킨 것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황궁에서 일어났던 폭발도 그 여자의 소행이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나?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에리스는 부드럽게 달랬다.

“지나간 과거는 묻지 않겠다. 후회한다 한들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검신을 쥐던 손이 아래로 떨궈진 가이즈의 턱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가이즈는 형용할 수 없는 마력에 이끌리듯 내리깐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베일 너머로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다만, 그대의 마음가짐을 묻고 싶다. 만일 그 여자가 살아있다면, 어찌 하고 싶은가?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말이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지그시 어금니를 악문 탓에 턱에 핏발이 섰다. 가이즈는 신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굳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그 누구보다도 잔악하게 사지를 찢고, 처절한 비명소릴 똑똑히 들은 뒤, 그 자의 가문까지 도륙 낼 것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몰라도. 제 턱을 잡은 손이 거두어졌다.

그와 동시에, 날벼락 같은 문장이 귀를 후벼 팠다.

“그 여자는 아직 살아있다.”

“그게 무슨…….”

“신수들도 마찬가지지. 전부 죽은 척 우리의 눈을 가리고 멀쩡하게 에임으로 돌아갔다.”

목석마냥 딱딱하던 가이즈의 전신이 충격과 복수심으로 덜덜 떨렸다.

‘그 쥐새끼 같은 년이, 살아있다고?’

아찔한 분노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치욕을 되갚아줄 수 있다.’

그간 신수들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불찰로 얼마나 시달렸는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모멸적인 눈초리에 하루에도 몇 번씩 피가 거꾸로 솟곤 했다.

한데, 이 고통을 선사한 주동자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목을 비틀어 주마.’

가이즈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손등 위로 새파란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를 본 에리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앙칼지면서도 유쾌한 음성으로 에리스가 말했다.

“그 여자가 실비아로 변장했단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끝까지 몰랐을 일이야. 비록 그치들을 잡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대의 공이 제법 크다고 생각해. 그러니 이 검을 하사하는 거다.”

그녀는 새까만 검신을 다시 한 번 가이즈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드래곤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검이다. 그간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면, 이번 전쟁에서 신룡을 해치워라.”

“이노아드의 수호룡을 죽이란… 말씀이십니까.”

“우리를 뛰쳐나간 짐승을 더 이상 거둘 이유는 없다. 신룡을 곁에서 오랜 시간 봐온 너로선 역린 정도는 알고 있겠지.”

굶주린 짐승을 먹이로 유인하듯 은밀하고, 또 유혹적으로.

신녀는 복수심밖에 남지 않은 껍데기를 쥐고 옴짝달싹 못하게 흔들었다.

“한 번 저지른 과오, 더는 없을 거라 믿겠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덫에 걸린 짐승은 그저, 눈앞의 먹이에 심취해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 * *

“슬슬 가볼까.”

나는 대충 겉옷에 팔을 끼워 넣으며 탁자에서 일어났다.

격식 차릴 것 없이, 너무도 편한 차림으로 지금 가려는 곳은 다름 아닌 마계였다.

일주일 전쯤인가. 아가레스에게서 왕자를 찾았으니 언제든 나머지 계약을 이행하러 와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특별히 마계를 오갈 수 있는 포털 장치도 함께.

나는 그날로 뻔질나게 마왕성을 들락거렸다. 그렇다고 막상 가면 계약의 계자도 꺼내지 않았다.

계약이 체결되면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터인데, 한 번 보고 말 관계로 만들기엔 마왕은 너무나 훌륭한 인맥이었다.

‘이런 완벽한 빽을 허투루 둘 순 없지.’

그렇게 부지런히 얼굴도장 찍으며 친분을 쌓은 결과.

내게 아가레스는 제법 편하게 말을 던질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오늘은 좀 중요한 대화를 할 거지만.’

나는 큐브같이 생긴 작은 상자에 마력을 주입했다. 푸른빛이 상자에 가득 차자, 큐브는 한 두 사람 정도가 오갈 수 있는 긴 구멍을 토해냈다.

나만의 전용 포털을 뚫고 몇 발짝이나 떼었을까.

이제는 익숙해진 커다란 서재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찼다.

아가레스는 오늘도 의자에 무료하게 몸을 늘어뜨린 채였다.

나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그 무료함을 일깨웠다.

“어머 마왕님~ 오늘도 홀애비 냄새 풍기고 계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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