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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08)화 (108/185)

#108

칼리안의 커다란 손이 그의 얼굴을 쓸었다.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표정은, 뭐랄까.

“정말이지, 또 나를 벼랑 끝에 몰아넣는군그래.”

거의 체념한 얼굴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주워먹기 달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고집불통이란 것도 알 것이다.

어떤 말을 해도 한 번 내린 결정은 절대 무른 법이 없었으니.

무엇보다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었다.

칼리안을 만나기 전, 나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이를 알렸다.

“사실 국왕 전하와 벌써 논의를 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아주 흔쾌히 승인 해주시더라구요.”

“미치겠군.”

“저하에게 부탁했으면 당연히 거절하셨을 거잖아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칼리안이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부탁이 아니라 통보를 해야만 했다. 그가 내 제안을 퍽이나 수락해주겠다 싶었으니까.

양심은 좀 찔려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나면 저하가 총사령관으로 나서시겠죠. 분명 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떼어놓으실 테고요. 근데 제가 말이에요, 한때 약혼자였던 사람을 홀로 전장에 나가게 둘 만큼 매정하지가 못하거든요.”

너님 총사령관이지? 그럼 난 부사령관, 땅땅. 이미 결정됐어. 못 바꿔. 국왕 명령임.

‘이 정도는 해줘야 빼도 박도 못하지.’

나는 내 능력치가 어디까지인지 잘 알았고, 국왕 역시 내가 나서주길 바랐다. 국왕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왕국 유일의 마법사가 스스로 부사령관이 되길 자처하는데, 절로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그는 사람을 철저히 도구로 쓸 줄 아는 자였다.

‘그러니 옛날에 소드 마스터였던 베인이 죽자마자 칼리안을 버리고 새 후사나 볼 생각을 했지.’

이번에도 기쁜 낯으로 날 반기는 국왕의 얼굴에서 그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었다.

유일한 마법사가 전장에서 잃기엔 꽤 아까운 인재긴 하지만, 장기 말 하나를 희생시켜서 왕국을 지킬 수 있다면야 어떻게든 좋다는 식.

물론 나는 죽지도 않을 거고, 역사에 패전을 기록하게 둘 생각도 없다.

“저하. 제가 저하 밑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경연에서 학회장 영감을 보란 듯이 이겼던 거. 기억나세요?”

“그걸 어찌 잊겠나. 내가 그대에게 반한 순간들 중 하나였을 텐데.”

“……음, 농담이시죠?”

“그럴 리가.”

아오, 이 미치도록 직진밖에 모르는 인간! 서울에서 운전대 잡으면 부산까지 내려가게 생겼네! 좀 꺾어봐, 한눈 좀 제발 팔아보라고!

그가 돌직구를 날릴 때마다 피하느라 펄쩍 뛴 높이만 합해도 에베레스트는 거뜬히 넘었을 것이다.

“큼큼, 저 이제 임자 있는 몸이니 자꾸 끼 부리시면 안 돼요.”

“부리면 넘어는 오나?”

“아뇨, 안타깝게도 제가 앞뒤는 물론 양옆까지 완전 꽉 막힌 도덕책 그 자체라서요. 양다리는 용납 못합니다요.”

“그리하면 신속한 결별을 소망하는 기도를 매일같이 올리는 수밖엔 없겠군.”

“와, 진짜 못됐어.”

직진 말고 커브 좀 돌리랬더니 칼리안은 그 반듯하던 본인 인성을 꺾어버린 모양이었다.

저런 농을 서슴없이 치다니! 어쩌다 이렇게까지 불량 왕세자가 되어버린 걸까.

나는 한차례 투덜거린 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칼리안도 내 말에 다시금 집중했다.

“아무튼, 그 때 모두가 뻔히 보이는 결과라고 혀를 찼지만 결국 승자는 저였잖아요. 저하께서 저를 믿어줬기에 열릴 수 있었던 경연이었고요.”

가만히 얘기를 듣던 칼리안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뜬금없는 내 추억팔이에 담긴 저의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애. 그 때와 지금은 달라. 전쟁은 고작 경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은 것이야.”

“물론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참상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제가 나가겠단 거고요.”

“메이블린.”

“그 때와는 많은 게 다르지만, 한 가지만큼은 절대적으로 같을 거예요.”

“…….”

“나는 지지 않아요.”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선언.

서글프게 날 바라보던 연보라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영애의 이런 점을 참 좋아했네.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없고, 굴하지 않는 모습.”

찰나 말이 끊겼다. 그러나 곧 씁쓸한 목소리가 한숨처럼 젖어들었다.

“하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져. 그대가 조금만 더 소극적이었다면, 비겁했다면. 이렇게 불나방마냥 몸을 던지진 않았겠지, 싶어서.”

내가 받기엔 너무도 과분할 만큼 소중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용서를 빌어보기로 했다.

“맹세해요. 나는, 우리는. 지지 않아요.”

반드시 이기게 될 거예요.

* * *

꺼지지 않는 불로 붙인 촛대 몇 개만 겨우 일렁이는 방 안.

하얀 베일을 늘어뜨린 여자가 의자에 몸을 뉘이고 있고, 신관 하나가 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여자는 이따금 발을 까딱거리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래, 실비아가 사실은 에임 왕국에서 제거해야 했었던 타겟이었다고?”

“제가 들은 바로는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위장했고, 그대들은 멍청하게 속아 넘어갔다?”

“……면목이 없습니다.”

짜악-!

찢어지는 듯한 파찰음이 사이를 갈랐다.

“그럼 애초에 면목 없을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그레이는 얼얼한 뺨을 붙잡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수그렸다.

비위가 여간 상하는 게 아니었으나, 명색이 신녀이니 굽히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가 고개를 절절매는 동안 신녀는 생각에 잠겼다. 우연이라 보기엔 힘든 지난 사건들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기묘한 연관성을 찾은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교황에게 가서 전해라. 모든 무기의 내구도를 높이고, 화염 방어 마법을 걸도록 해. 그밖에도 드래곤을 잡을 무기와 특수용병, 마도구, 주술을 닥치는 대로 준비하고.”

“……예?”

신룡도 죽은 마당에 갑자기 웬 드래곤을 잡아?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는 그레이에게 신녀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드래곤과 늑대 신수, 살아있다. 그 타겟과 같이.”

“하지만 분명 폭발에 휘말려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던 말은 끝맺지 못하고 꾹 다문 입속으로 사라졌다.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번 황궁 폭발. 규모만 다를 뿐이지 에임에서와 똑같은 폭발이었어.’

에임에서 벌였던 난장판처럼, 그 간사한 여자는 이번에도 주변을 감쪽같이 속이고 용케도 빠져나간 것이다.

이제야 눈치 챈 그레이의 눈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그의 표정을 읽은 신녀는 한심한 것을 보는 양 일갈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다. 어서 교황에게 가기나 하거라. 다만, 신수들이 살아있단 사실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성기사단 외엔 알리지 말라 전하고. 그들이 적으로 돌아섰다는 게 알려지면, 괜히 사기만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

신녀는 말을 마치고서 어서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선뜻 물러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저,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화염 방어 마법 말입니다. 마탑이 더 이상 제국과 교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터라,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겁니다.”

신룡의 가차 없는 브레스에 저항하기 위해선 방어 마법은 필수였다.

하지만 어쩐 이유에선지 마탑주가 교류를 단절해, 마법을 걸어줄 마법사가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신녀는 문제 될 게 뭐냐는 기색이었다.

“그럼 탑 밖의 마법사들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니냐.”

“탑 밖의 마법사라면…. 마법사 협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탑으로 향하던 이노아드의 막대한 자금이 그동안 누구의 배를 불렸을 것 같느냐.”

현 마탑주인 루치펠 럭스가 마탑의 꼭대기에 앉은 후. 그의 막강한 힘을 시기한 원로들은 마법사 협회라는 이름 아래 차차 세력을 분리해가고 있었다.

그간은 제국에서 받은 상당한 의뢰비용을 보내주는 것으로 그 아슬아슬한 끈을 이어오고 있었다지만, 이젠 그조차도 단절된 상태였다.

“그들은 자금줄을 멋대로 끊어버린 탑주를 굉장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 그 검은 손에 금화주머니만 쥐어줘도 알아서 우리의 청을 수락할 거다.”

‘그리고 그 거슬리는 마탑주 녀석도 같이 쓸어주겠지.’

마탑주는 메이블린의 편에 붙을 것이 분명했다. 인외적일 정도로 강한 그를 꿇리려면, 적어도 원로들 대다수가 나서줘야 했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아낌없이 주거라. 이참에 제국으로 망명하게끔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빠르게 손속을 헤아린 그레이가 물러나고. 신녀, 에리스는 혼자 남게 되자 조소를 터뜨렸다.

“하! 메이블린 슈트레커…. 정말 끈질기게도 살아남는구나.”

느닷없이 튀어나와선 어찌 이리도 깜찍한 일을 벌이는지.

줄곧 인간계에서 신녀 행세를 하느라 에임 왕국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게 허점이었다.

‘알았다면 제국에 있을 때 손봐주었을 터인데.’

하는 짓이 꼭 제가 지독히도 미워했던 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한낱 인간이 감히 신의 계획을 망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이번엔 기필코 죽일 것이다. 반드시 그 망할 왕국과 함께 숨통을 끊을 거야.’

* * *

꿀꺽. 마른침이 절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단 한 번도 북적거린 적 없던 중앙 홀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우리 집 가족들은 물론이고 클라인을 비롯한 암흑가 일원들, 칼리안과 켈른, 슈타커, 신수 가족들까지.

선생님의 지시를 기다리는 병아리반 원생들 마냥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내 얘기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목을 가다듬고 말문을 텄다.

“오늘 제가 모두를 이렇게 부른 이유는요…….”

도중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원생들이 번쩍 손을 들었다.

“배고파서?”

“심심해서?”

“정답, 우리가 보고 싶어서!”

쌍둥이와 콜린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키득거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느긋하게 관망하고 있던 모범생, 세자저하께서 친히 기선제압에 나섰다.

“곧 일어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느닷없이 떨어진 문장.

“……네?”

“뭐요? 전쟁이요?!”

분위기는 금세 찬물이 끼얹어진 듯 얼어붙었다. 나는 그 속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마주했다.

그리고 제국에서 얻은 정보들을 낱낱이 토로했다.

황궁에서 몰래 들었던 신녀와 황제의 대화, 전쟁무기로 쓸 수많은 전투마물들, 올 겨울이 오면 제국의 대륙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것…….

내 얘기가 쏟아질수록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낯빛은 급격하게 어두워져만 갔다.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었음에도 말소리는 쉽사리 오가지 못했다.

나는 쳐진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부러 밝게 일렀다.

“아직 시간은 좀 있어요. 신수들이 사라진 탓에 제국에서도 전력을 보충하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예요. 거리와 지형 상 이곳까지 오는 게 쉽지도 않을 거구요. 겨울이 오기 전까지 우리도 준비하면 돼요.”

그런데 물 흐르듯 줄줄 나오는 내 말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감지한 것인지, 미하일이 눈썹을 슬 찌푸렸다.

“저, 누님.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것도, 그를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한데 그런 국가적인 사안을 왜 누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유, 우리 동생 언제 이렇게 눈치도 빠르고 깜찍해졌대.

“그게 말이야…….”

“누님, 설마.”

뭉개진 말꼬리가 그의 불길함을 증폭시킨 모양이었다.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제발…!”

미하일은 더욱 애닳은 표정이 되어 매달렸다.

물론 애석하게도,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실은 내가 부사령관을 맡았거든.”

미하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굉장히 토라진 어투와 함께 거의 노려보다시피 날 응시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누님. 맡은 게 아니라 자처하셨겠지요.”

아이, 요 똑순이. 어쩜 하나도 안 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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