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얽어 붙은 두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느 하나 밀리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루치펠과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적수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나는 흥미진진하게 둘의 난데없는 신경전을 관망했다.
“하, 어이가 없군.”
아가레스가 픽 웃으며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어서 그는 치기 오른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너무 가시 세우지 말게. 가시가 있든 없든, 범 앞에서 고슴도치는 그저 밤송이에 불과하니.”
“그 작은 상처가 곪아서 결국 죽는 어리석은 짐승이 있단 건 모르시나 봅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군. 고개를 숙이는 법을 좀 배워야겠어. 짓밟히기 싫으면.”
“딱히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감히 날 짓밟을 상대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이제 만났으니 기쁘겠어.”
“글쎄, 만났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공기에 전류가 녹아들기라도 한 듯 숨이 오가는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아니, 뭐가 이렇게 살벌해.
둘 다 끌어올리는 기가 만만찮아서 썰렁하던 내부가 점점 덥혀졌다.
이곳을 화염지옥 코스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멈춰야 했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헤이, 지금 뭣들 하는 거예요. 기분 좋게 헤어지려는데 이러지 맙시다. 루시, 어서 돌아갈 마법진이나 준비해줘.”
“하지만,”
“쓰읍.”
“……이번만이야.”
내가 정말 필요할 때만 쓰는 씁 공격에 루치펠이 한 발 물러났다.
나는 한구석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이디스를 향해 빠르게 눈짓했다.
이심전심인지라, 그녀는 냉큼 루치펠을 붙잡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가레스를 쏘아보는 루치펠의 눈빛엔 살기가 일렁였다.
그가 나가는 것을 끝까지 확인하고서야, 나는 다시 아가레스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왕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꽤 다급하게 붙잡으시던데.”
“그게…….”
“……?”
“…너는 누구지? 메이블린 슈트레커라는 표상적인 이름 말고. 그러니까, 내 말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정작 말을 꺼낸 본인조차도 왜 이런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느리게 깜박이는 붉은 눈동자가 날 진득하게 훑었다.
“네가 내 부하들을 얽맨 힘은 단순한 마법 그 이상의 것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마법실력을 가졌다면 가능하겠지만, 네 코어를 보아하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너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냐.”
기민한 감을 타고 절로 나온 의문인 것 같은데, 역시 신급 인물이라 그런지 예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답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나도 궁금한 질문인걸.
“그렇게 물으시면… 저도 딱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저도 제가 왜 이런 스킬, 아니. 힘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거든요.”
“신의 변덕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냐.”
“오, 괜찮은 가설이네요. 아마 그럴 지도요? 만약 그렇다면 신이 정말 증오스럽지만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 반응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미간이 조금 풀어졌다.
신을 증오한다는 말에 화색을 약간 띠운 것 같기도 했고.
아가레스는 확연히 너그러워진 얼굴로 날 응시했다.
“진심이군.”
“당연하죠.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을 고하겠어요. 새끼발가락을 문 모기보다 더 짜증나는 게 신들인데요.”
“새끼… 무어?”
“그 정도로 불쾌지수 높이는 존재들이다, 이 말이죠. 아무튼 제 정체에 대해서 계속 궁금하시다면, 음…. 그냥 관종이라고만 알아두세요. 저도…….”
화악.
“그렇게만 알고 있거든요.”
안타깝게도 끝 문장은 아가레스의 귀까지 닿지 못했다. 훅 끼친 섬광이 뒷말을 삼켰다.
나는 어느새 처음 마계로 진입했던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에 서있었다.
새까만 공허 대신 바람에 부딪쳐 소슬거리는 잎사귀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발아래론 넓게 퍼진 마법진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널 죽이려던 놈이 뭐가 예쁘다고 다 대답해줘.”
지척에서 눈이 마주친 루치펠이 다소 심술이 난 얼굴로 뾰루퉁거렸다.
아이, 이 귀여븐 것.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마왕님 말도 자르고 나 데리고 왔어요?
나는 한소리 던질지 말지 고민하다, 그냥 헤실헤실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팔을 뻗었다.
루치펠은 안 올 것처럼 굴다가, 끝내 못 이기는 척 한 팔로 내 허벅지를 받치고 날 안아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마탑을 가리켰다.
“돌아가자.”
“가면 나 많이 쓰담쓰담 해줘야 해.”
“질리도록 해줄게. 오늘 고생했으니까 특별히 메이블린 표 사과파이도 만들어줄게.”
“그건 괜찮아.”
“그냥 먹어.”
“……알았어.”
바로 텔레포트 할 수 있음에도 루치펠은 굳이 날 안은 채 걸었다.
그러자 몇 걸음도 채 떼지 않아 오늘만 두 번째인 이디스의 한숨소리가 뒤에서 날아왔다.
“하…. 망할 커플…….”
* * *
나는 갓 나온 따끈따끈한 사과파이-결국 나 대신 머스클이 만들어줬다-를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소파는 푹신했고, 파이는 맛있었다. 루치펠은 내 옆에 턱을 괴고 앉아서 내가 먹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마탑의 꼭대기, 그러니까 루치펠의 방에는 당연스럽게도 우리 둘밖에 없었다.
‘지금이 얘기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긴 한데.’
꿀꺽.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파이 조각이 사포조각마냥 껄끄럽게 느껴졌다.
늘 피해왔던 이야기를 꺼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더 그랬다.
나는 우리 둘밖에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하고서, 조심스럽게 서두를 입에 올렸다.
“저기 있잖아…. 루시는 안 물어봐? 이디스는 아까 엄청 물어봤는데.”
“뭘?”
“내가 아까 악마들을 어떻게 무릎 꿇렸는지. 이디스한텐 대충 막대한 마력 덕분이라고 둘러댔지만, 네가 그런 허접한 변명에 속진 않을 거 아냐.”
“그렇지.”
“그러니까. 다 알면서 왜 안 물어봐?”
루치펠은 언제나 두말없이 날 따라줬다.
그간 충분히 의심을 품고 몰아붙여도 할 말 없는 상황들이 많았음에도 늘 그랬다.
마치 내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칠 수밖에 없는 신인 것처럼.
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주며 그는 상체를 기울였다.
“말했지. 네가 내 신이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너만을 믿겠다고.”
이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듯 내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숙이자 차분한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루치펠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부드러운 입술을 천천히 눈가로 내렸다.
“난 널 믿어. 네 모든 걸 빈틈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 너는 그냥 너고, 나는 그냥 그런 널 좋아해.”
내 전부를 삼켜도 모자란 사람처럼 입술은 조금씩 내려와, 콧등에도 앉았다.
“이게 다야.”
마지막으로 뜨거운 숨이 서로의 입술 사이를 오가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 내게 말했다.
“달라지는 건 없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 듣기 좋은 저음을 타고 귓바퀴를 훑는 상냥한 울림.
그리고, 익숙한 공간에 스며드는 눈부신 노을.
달라진 건 없었다. 모든 게 여전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기뻐서, 루치펠의 너른 어깨에 가만히 고개를 묻었다.
“언제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질릴 때까지 물어봐. 앞으로도 난 똑같은 대답만을 할 테니까.”
“……응, 그럴게.”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 *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이노아드 황궁의 지하도.
쥐 몇 마리가 축축하고 어두운 돌바닥 위를 떠돌았다.
찌익, 찍. 누군가 남긴 마른 빵을 갉아먹던 쥐들은 허공에 갑자기 커다란 구멍이 생기자 재빠르게 흩어졌다.
공허를 뚫고 세 악마가 차례차례 나왔다.
“여기 맞아? 무슨 경계 술식이 이렇게 복잡하게 쳐져있어.”
“몰라, 기분 나쁜 냄새도 나.”
“왕자님만 얼른 찾아서 돌아가자.”
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구시렁거리며 지하도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왕자의 힘이 축적되어 있는 뿔은 제국에서 전투용 마물을 양산하느라 죄다 자른 터였다.
때문에 악마들은 그의 기척을 감지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구린 냄새가 그들의 코를 마비시킨 탓 역시 한몫했다.
게다가 트랩도 어찌나 많은지, 이를 모르는 평범한 인간들은 발을 들일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대체 뭐 숨길 게 있다고 이렇게나….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바삐 발을 놀리던 한 악마가 희미한 짐승 울음을 듣고 따라갔다.
이윽고 도착지에 다다른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멈춰 섰다.
“세상에. 누가 이런 짓을…!”
지하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철창.
그 안에 갇혀있는 마물 떼들의 몸체엔 왕자의 표식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는,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왕자가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 벽에 매달려 있었다.
“맙소사, 왕자님! 다들 이리로 와! 왕자님을 찾았어! 여기야!”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머지 악마 둘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철창을 부수고 왕자를 데려가려 했으나 모든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신이나 천사들이라면 모를까, 마족은 감옥을 통과할 수 없었다.
철창에 씌워진 결계에서 코가 썩을 정도의 역겨운 냄새가 났다. 마계의 공기에 익숙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힘이었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기류.
“뭐야, 여기 인간계 아니었어? 어째서 천계 신의 악취가 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여기 이노아드지? 몇 년 전에 이노아드에 전무후무하게 막강한 신력을 지닌 신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
“그럼 그 여자 짓이라는 거야? 말도 안 돼. 신이 직접 강림한 게 아닌 이상은 이러기가 힘들 텐데.”
“일단 신녀부터 잡아야 해. 그래야 결계를 부수고 왕자를 데려가지.”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여자를 언제 또…….”
철창을 통과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때.
“거기 누구냐.”
베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자가 불쑥 나타났다.
“당장 거기서 손 떼.”
인간의 격보다 한참 위인 악마들조차 순간 움찔할 만큼 섬짓한 음성이었다.
더불어 여자에게선 철창을 덮은 결계와 같은 냄새가 났다.
상황을 파악한 악마들의 눈매가 무섭도록 가늘어졌다.
“네가 신녀구나. 얼마나 신 앞에 개처럼 굴었기에 이리도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이냐.”
“감히 우리 왕자님을 이 꼴로 만들어? 용서하지 않겠다!”
적개심을 터뜨리며 세 악마가 득달같이 달라 들었다. 사방에서 단단히 붙잡힌 신녀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심장을 꿰뚫렸다.
“크읍…. 커헉…!”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얗던 옷자락이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신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그만 풀썩 엎어졌다.
숨통을 더 빨리 끊기 위해 악마들은 최후의 일격으로 목까지 비틀었다.
얼마 못 가 그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고, 결계가 사라졌다.
악마들은 신녀를 버리고 일어나 서둘러 철창을 부쉈다. 왕자의 비쩍 곯은 전신을 옥죄던 쇠사슬과 수갑을 끊고 그를 들쳐 맸다.
“어서 공허 열어! 돌아가자.”
그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이 허공에 구멍이 뚫렸다. 곧 왔는지도 모르게 네 악마의 신형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사위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으음…….”
차갑게 늘어져있던 신녀의 몸이 차츰 들썩이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부러진 머리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기어이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바스라진 뼈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다시 꼿꼿이 섰다.
“쿨럭, 컥!”
신녀는 거친 숨을 터뜨리며 벽을 잡고 휘청휘청 일어났다.
흠집하나 없이 매끈한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한 산 자의 동체였다.
“하아, 하…….”
그녀는 잠시 호흡을 다스리다 피로 얼룩진 하얀 로브를 쥐어뜯듯 던졌다.
소름끼칠 만큼 음산한 목소리가 갈라진 성대를 타고 띄엄띄엄 긁혀 나왔다.
“더러운 것들이…. 감히 어딜 손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