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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05)화 (105/185)

25. 모든 것은 계획대로

#105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거, 날 전적으로 믿는다는 소리로 들어도 되나?”

알면서도 직접 입으로 확신을 받고 싶은 때가 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면 더더욱.

나는 그의 연인인 동시에 믿음을 주는 사람이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한 심정이 되어 대답을 기다리는데, 루치펠의 뜨거운 숨이 먼저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못 믿을 이유가 있나. 네가 신이래도 난 기꺼이 믿을 거야. 널 유일한 종교로 삼고, 너만을 바라보겠지.”

“지금도 이미 그러고 있으면서.”

“이건 종교를 넘어선 사랑이지.”

그리 말하며 내게 내린 시선은 너무도 따듯해서, 잠시 이곳이 피 튀기는 현장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였다.

‘어쨌든 한결 후련해졌으니 된 건가.’

긴장이 풀린 나는 삭막한 황무지 속 꽃밭을 잠시나마 만끽했다. 꽃같이 예쁜 루치펠의 얼굴을 감상하며 알콩달콩 콩도 키우고 깨도 활활 태웠다.

그러던 와중 아래쪽에서 깊은 한숨소리가 올라왔다.

“하아…. 망할 커플…….”

이디스는 짙은 살기에 대항하길 포기하고 내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상태였다.

내가 찔려서 루치펠을 슬쩍 밀어내자 그녀는 눈꼴시어 죽겠다는 얼굴을 한순간에 싹 지웠다.

대신 내 옷자락을 잡고 끌며 앞을 가리켰다.

“그게…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는데요, 결계가 깨져서요.”

꾸궁!

종잇장 마냥 위태롭던 방어막이 덩치 큰 한 악마의 일격을 맞고 산산조각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잔해를 눈처럼 맞으면서 나는 이디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마, 이디스.”

“예? 하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어느새 벌떼처럼 우글우글 모인 악마들이 쏘듯이 날라들었다.

“감히 멋대로 이곳에 발을 들인 대가다!”

쐐액! 스치기만 해도 닿는 족족 녹아내리게 만들 극독이 발린 낫이 면전에 직격했다.

나는 고개를 슬쩍 비틀어 가까스로 낫을 피했다. 이디스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저러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그녀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바들거리면서도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다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항상 쾌활하게 움직이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다정한 손길로 그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정말이야.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힘들 텐데 쉬고 있어도 돼.”

물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말과는 정반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가시 돋친 사슬이 절그럭거리며 허공을 갈랐다.

한 명 한 명이 마탑의 원로들과 맞먹는 실력. 더러는 그를 훨씬 능가하고도 남는 무력을 가진 자들.

누군가 본다면 우리의 끝은 필시 죽음뿐이라 결론지을 것이다.

결말이 뻔한 동화 같은 상황에서, 나는 그저 팔을 주욱 뻗었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을 내밀었다.

거침없이 내달리던 무리가 찰나 주춤했다.

“지금 쟤 뭘 하는 거야?”

“몰라, 정신줄을 놨나보지.”

마왕의 전력이 각종 무기들로 무장한 악마부대라면, 내 비장의 무기는 바로 이 검지다.

악마가 손톱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손가락으로 뭘 하냐고?

[스킬 ‘박수갈채(Lv.3)’가 발동됩니다!]

[3분간 ‘악마’가 당신의 말에 동조합니다.]

이런 걸 할 수 있지.

“멈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어?”

달려오던 모든 악마들이 덜컥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무리를 앞에 두고서, 나는 천천히 손목을 아래로 구부렸다.

“그리고 꿇어.”

“뭐, 뭐야!”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 으윽!”

아무리 꼿꼿하게 저항한들 내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목이 굽어지는 만큼 악마들의 몸도 서서히 아래로 기울었다.

털썩.

이윽고 손가락 끝이 완전히 땅을 향했을 때에는, 모든 부대가 내게 고개를 조아린 채였다.

흡사 광신도들의 기도를 받는 교주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짓궂게 입매를 늘이며 잘 만들어진 작품을 소개하듯 양 팔을 옆으로 펼쳤다. 짜잔-

“이 다음은 뭘로 할까요, 마왕님?”

내 기행에도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한 사람. 아가레스가 나직하게 입을 뗐다.

“무슨 술수를 부린 게냐.”

세상의 모든 어둠을 꾹꾹 눌러 담아 흘려보낸 듯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였다.

“글쎄요, 이들은 제가 죽으라 해도 기꺼이 자신을 찌를 것 같은데. 마왕님께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기만 한다면 소중한 부하들을 잃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전에 내가 널 흔적도 남지 않게 짓뭉갤 수 있다.”

“그럼 지금 당장 자결하라 말할까요? 모두 자ㄱ…….”

내 짧은 말 한 마디에 악마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하나같이 급소에 가져다댔다. 무기가 없는 녀석들은 혀라도 깨물 태세였다.

시퍼런 날들이 꼬챙이처럼 악마들의 몸체를 관통하려던 순간.

“멈춰라.”

아가레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인간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무슨 연유로?”

후후, 슬슬 입질이 오기 시작했구만.

나는 월척을 끌어올릴 준비를 했다.

“듣자 하니, 집 나간 아드님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일개 인간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아뇨, 상관있을 겁니다.”

이제 그물을 걷어볼까!

나는 검붉은 기가 감도는 두 눈동자를 끈덕지게 파고들었다.

“댁의 아드님을 찾은 것 같거든요.”

시종일관 빈틈없던 아가레스의 낯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틈을 내가 놓칠 리가.

“어때요. 흥미가 좀 생기시나요, 마왕님? 저도 나름 죽을 뻔 하다가 찾은 거라 쉽게 알려드릴 순 없고요. 협상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나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스킬]

-무관심 Lv.3 (종료까지 남은시간: 15초)

-박수갈채 Lv.3 (종료까지 남은시간: 1분 03초)

고고하신 우리 마왕님. 제발 눈 딱 감고 이번 한 번만 굽히고 들어와 주세요, 네?

겉으론 온갖 여유는 다 부리고 있었지만, 내심 쫄려서 죽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스킬의 효력이 다하면 죽을 터였다.

벌써부터 살기를 무력화시켜주던 스킬 ‘무관심’이 풀렸다.

‘미치겠네.’

나를 보호해주던 스킬이 거둬지자마자 난폭한 살기가 온몸을 찢어발길 듯 몰아쳤다.

나는 코어에서 닥치는 대로 마력을 끌어 모아 전신에 둘렀다. 순간 휘청거릴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아가레스는 골몰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느긋한 그와는 달리, 마지막 스킬의 남은 시간은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빠르게 떨어지는 중이었다.

[박수갈채 Lv.3 (종료까지 남은시간: 24초)]

이것마저 풀리면 난 정말 죽는다.

능력차용 스킬로 아가레스의 힘을 복사하려고도 해봤지만 불가했다. 격이 너무 높다며 되레 내 스킬이 튕겨져 나왔다.

지금까진 내 꼼수로 어떻게든 대치하고는 있어도, 기실 마왕은 신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아가레스는 마신 다음가는 마계의 지배자였다.

아무래도 인간의 육체인 내가 그의 힘을 감당하기엔 무리인 모양이었다.

6, 5, 4, 3, 2…….

그 사이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종료까지 남은시간: 0초]

[스킬 ‘박수갈채’가 해제됩니다!]

종막이 다가왔다.

‘이번 판은 글렀나.’

나는 씁쓸하게 눈을 감았다.

항상 남겨놓는 최후의 수는 언제나 하나였다. 죽음.

그렇게 죽음으로 모든 것을 리셋 하려던 찰나.

“좋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입술이 달싹였다.

아가레스가 고개를 끄덕거림과 동시에 살기를 거뒀다. 농밀하게 전신을 옥죄던 기운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휴, 살았다.’

극한으로 치달았던 공기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곳곳에서 악마들이 졸린 숨을 토해냈다.

“흐읍, 하…….”

이디스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루치펠과 이디스는 호위 기사처럼 내 뒤를 따라붙었다.

붉은 융단의 끝이 점차 가까워졌다. 혹시라도 다시 반격해올까 온 몸의 긴장을 바짝 곤두세웠지만 우려하는 일은 없었다.

마왕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우릴 막는 무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윽고 아가레스가 앉아있는 왕좌를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지척까지 다다르고.

나는 꿋꿋하게 선방을 날렸다.

“우선 계약서부터 쓰죠.”

* * *

서로의 요구사항과 계약 조건을 확인한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아가레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조건에 이의가 없는 것인가?”

이제라도 번복하면 들어줄 터이니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경고였다.

아까 그렇게 날 죽이려고 혈안이었던 걸 떠올리면 퍽 기꺼운 배려였으나, 내 말을 뒤집을 생각 따윈 없었다.

나는 거침없이 펜촉을 잉크병에 푹 적셨다.

“죽음이 가장 확실한 보증 아닌가요?”

그랬다. 나는 내 말이 거짓일 경우, 혹은 왕자를 찾지 못할 경우에 대한 조건으로 내 죽음을 걸었다.

‘이 정도는 나가줘야 날 믿지.’

어쭙잖게 대항했다간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상대는 그 악명 높기로 자자한 마왕이었다.

마계 동부의 군주, 아가레스.

언뜻 보면 내 승리로 끝난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아가레스는 나와 대면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직접 움직이긴커녕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악마 부대를 대신 나서게 해서 망정이었지.’

아마 그가 마음먹고 공격했으면 스킬이 쫑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나는 서두르면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동작으로 맨 아래 공란에 서명을 휘갈겼다.

그를 응시하는 아가레스의 눈꼬리에 이채가 돌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앞으로 자주 보시게 될 거예요. 종종 놀러올게요.”

“마계를 놀이터마냥 취급하는 인간도 처음보고.”

“진심어린 칭찬 감사합니다.”

부드럽게 미끄러진 글자는 이지러지며 춤을 추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력이 깃든 계약서가 미약하게 빛나던 푸른빛을 꺼뜨리며 계약이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견고한 강제성으로 묶인 것이다.

이로써 아가레스와 나의 거래가 마침내 체결되었다.

그가 내게 요구한 것은 왕자의 행방이었고, 내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언제든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도록 하는 일종의 청탁권이지.’

물론 조건은 왕자를 되찾고 난 후.

그리고 마계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청탁할 것.

전자든 후자든 나로선 문제될 게 없는 조건이었다.

왕자는 이노아드 황궁 지하에 얌전히 갇혀있으니 가서 구해오기만 하면 되고.

내가 제시할 요구는 피해보다는 도리어 마계에 이득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만 가볼까.’

나는 계약서를 돌돌 말아 품에 넣고 일어섰다. 거래가 잘 끝났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마왕님. 그땐 왕자님도 같이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잠깐.”

작별인사를 마치고 막 돌아서려는 나를 아가레스가 붙잡았다.

그가 처음으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터라, 나는 속으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치펠도 마찬가지였는지 줄곧 내 뒤를 지키다 말고 사이에 성큼 끼어들었다.

“뭡니까.”

내 손을 붙잡은 아가레스의 팔에 루치펠이 손을 올렸다.

둘 다 팔뚝에 힘줄이 돋은 것으로 보아, 힘 좀 꽤나 쓰고 있는 듯했다.

타오르는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뭐야,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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