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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03)화 (103/185)

#103

악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급 썰렁해진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려니, 루치펠이 넌지시 물었다.

“잡아올까?”

악마가 무슨 소매치기범도 아니고….

세상에 악마를 잡아온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루치펠이 유일할 것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텔레포트를 시전할 태세인 그를 붙잡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어, 뭘 그렇게까지.”

그 악마 아저씨, 아닌 척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게 눈에 선연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서라도 용건만 해결하고 바로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치펠은 무언가 찜찜한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왜 그래?”

“좀 이상해서.”

“뭐가?”

“본래 악마는 진명을 알아야만 소환할 수 있는 존재야. 나조차도 마계로 가는 법은 알아도 악마들 이름은 모르고. 근데 아까 그놈은 왕자가 강제로 소환 당했다고 했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야?”

“까마득한 옛날이라면 모를까, 신이 아니고서야 인간이 알기는 힘들지. 그것도 왕자씩이나 되는 급의 악마를.”

“흠… 신탁이라도 받은 거 아닐까.”

예배당에서 꾸벅꾸벅 졸던 나조차도 신을 영접했었다.

그러니 심심한 이 신께서 간절하게 악마 소환을 원하는 사람한테도 친히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뭐, 심심한 신이 인간계로 내려와 악마를 소환해 봤다거나.

어찌 됐든 고민해봤자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지금 그보다는 다른 게 더 궁금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루치펠이 가진 의문까지도 해결할 수 있었다.

“저기 루시… 마계에 가는 법을 안다고?”

“왜, 가고 싶어?”

말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는 어투였다.

하여간 완벽한 내 남친. 못하는 게 없지!

‘좋아, 그럼 일단 이 부분은 해결된 거고…….’

나는 잠시 이노아드의 황궁 지하 감옥을 탈출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발견한 특정한 문양을 가진 무수한 마물들.

그리고 감금되어 있던 한 남자와 강제로 잘린 듯한 머리 위의 뿔.

마지막으로 그가 말한,

-아버지…….

-아가레스…….

제국으로 떠나기 전 이디스가 의뢰를 처리하고 와 늘어놓던 푸념도 불현듯 떠올랐다.

-요즘 들어 공허 열리는 빈도가 부쩍 증가하기라도 한 건지, 허구한 날 그거 수습하느라 죽겠어요.

-갑자기 마기가 몰리기라도 하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들이 차차 맞춰졌다.

그 땐 신수들의 부재 때문이라 여겼지만, 직접 제국에서 지내며 본 실상은 달랐다.

타국에 비해 유독 제국이 공허 발생 빈도가 잦긴 했다.

그것도 대부분 한적한 마을이나 황야에 열리는 데 비해 제국은 수도가 주요 발생지였다.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날리는 없었다. 제국 수도에만 집중적이고 다발적으로 공허가 발생하는 덴 이유가 있었다.

강력한 마기의 근원인 악마가 있었으니.

‘그것도 마왕의 아들이라는 악마 왕자님이지.’

본능적으로 그 힘에 끌린 마물들이 제국에 다수 출몰한 것이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뿔이 잘리기 전이었을 그 때 즈음엔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나는 루치펠을 마주보며 웃었다.

“응. 가고 싶어. 왕자를 찾은 것 같거든.”

* * *

착잡하다, 착잡해. 매우 착잡해애…….

이틀이면 된다는 루치펠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온 내가 잘못한 걸까.

아니면 애초에 정상적인 방법을 기대한 게 문제였을까.

속은 심란하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애써 덤덤하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루시, 마계에 가는 방법이 이거야?”

“그럼 다른 방법 있어?”

“아니이…. 하지만 이건 좀…!”

그와 멀찍이 떨어져 두 팔을 벌리고 항의하는 날 루치펠이 부드럽게 달랬다.

“괜찮아, 메이. 생각해 봐. 평소에 마물이 어디서 오지?”

“……마계에서.”

“그래. 그 마물들이 마계에서 넘어오는 통로가 바로 이 공허잖아. 거기서 친히 오라고 열어준 통로라고. 거절할 이유 없어.”

맞는 말이다. 나도 안다. 그래서 문제였다.

‘왜 항상 맞는 말만 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거냐고…!’

나는 고무줄이라도 씹는 표정으로 뻥 뚫린 심연을 응시했다.

아름드리나무 한가운데 커다랗게 자리 잡은 공허.

곁에선 신나 죽겠다는 이디스의 조잘거림이 뺨을 때렸다.

“이런 뜻깊은 여정에 절 끼워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아. 데려가지 말 걸 그랬나.

이제 와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한탄이었다.

‘토끼 같은 눈을 애처롭게 뜨고서 초롱초롱 쳐다보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이디스는 내가 그 표정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는 알면서도 걸려들고 말았다.

그녀의 신형은 벌써 즐비하게 늘어진 마물들의 사체를 징검다리 삼아 폴짝폴짝 뛰어가는 중이었다.

사위는 조용했다. 공허가 더 이상 토해낼 마물이 없을 때까지 나오는 족족 천당으로 보내준 덕분이었다.

이윽고 나무 앞에 다다른 그녀는 공허가 닫히지 않게 끝부분을 발로 밟았다.

‘와, 저게 되네.’

여태 해본 사람이 없어서 몰랐을 뿐, 공허는 잡고 벌리는 것이 가능했다.

‘하긴, 어느 미친놈이 마물이 쏟아져 나오는 공허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겠어. 대가리에 총이 박혀도 이건 무리지.’

“잘 잡고 있어, 이디스.”

루치펠은 간만에 웬일로 이디스와 쿵짝이 참 잘 맞았다.

그는 이디스보다 한술 더 떠 공허 안으로 고개를 쑥 집어넣었다.

새삼 미친놈이 여기 있었지 싶었다. 역시 사람은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물론 지금 루치펠은 공허 안을 살피고 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나서는 걸 보니 정말 별수 없었다.

‘살다 살다 토끼굴도 아니고 공허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쉽사리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우려와는 달리, 다행히도 공허 너머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몇 초 후 루치펠이 고개를 빼고 날 돌아봤다.

“가자. 마물은 더 이상 없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쪽에서 경쟁하듯 루치펠과 이디스의 손이 내게 들이밀어졌다.

든든하기 그지없는 두 손.

마탑 서열 1,2 순위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쏟아지던 걱정이 콩알만 하게 쪼그라들었다.

물론 그 둘이 따르는 0순위는 나다.

‘어차피 가야만 하는 곳이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마계로 잠깐 견학 갔다 온다고 생각하지 뭐.’

나는 둘의 손을 동시에 꼭 잡고 공허 안으로 몸을 던졌다.

곧 새까만 어둠이 전신을 덮쳤다.

* * *

한편, 마계 31구역에선 두 악마의 수다가 한창이었다.

마계로 무사히 돌아온 조렙은 31군단을 이끄는 친구를 만나 지상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토로했다.

“……해서, 마물은 전멸하고 나만 겨우 빠져나왔어.”

“쯧쯧, 악마의 수치다. 어떻게 한낱 인간한테 쥐어터지냐. 아무리 마법사래도 그렇지, 에잉.”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지만, 반응은 여지없이 냉담했다. 조렙은 억울해서 외쳤다.

“내가 약한 게 아니라, 그놈들이 터무니없이 강한 거였다고. 도저히 인간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핑계도 좋네.”

“아, 진짜라고! 네가 직접 대면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지!”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조렙은 맨가슴만 팍팍 쳤다.

아무리 얘길 해줘도 어리석은 친우는 자신을 놀리기에만 바빴다.

너무도 분한 나머지, 차라리 그 지독스런 녀석들이 눈앞에 다시 나타나주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나만 당할 순 없어…!’

여전히 불쌍한 이 악마는 부디 제 바람이 현실이 되길 빌었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그는 이 선택을 사무치도록 후회한다.

마계에서 느껴져선 안 될 인간의 마력이 커다란 진과 함께 별안간 솟구쳤다.

이틀 전 자신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던 기운.

“루시, 마왕성이 어딘지 모르는 이상 이렇게 계속 텔레포트 하다간 끝이 없겠… 어? 그때 그 악마 아저씨다!”

치기어린 마음에 빈 소원은, 터무니없게도 이루어지고 말았다.

“히익.”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몸은 그 때의 공포를 기억하는지 절로 움츠러들었다.

조렙은 재빨리 뒷걸음질 쳤으나 메이블린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붙드는 것이 더 빨랐다.

“아저씨! 나야! 기억하지? 엊그제 우리 서로 친구 맺었잖아!”

‘누구 맘대로 친구야. 멋대로 삥 뜯어가 놓고선!’

부아가 치밀어 올랐으나 사실대로 실토할 순 없었다. 둘도 버거웠는데, 심지어 이번에는 셋이었다.

토기가 치밀어오를 만큼 방대한 마력을 가진 이가 하나도, 둘도 아니고 무려 셋.

조렙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메이블린은 목석마냥 서있는 그에게 덥석 붙어 팔짱을 꼈다.

“그 때 너무 급하게 헤어져서 아쉬웠는데. 이야,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나네?”

“으응… 바, 반가워…….”

도망칠 일말의 움직임조차 원천봉쇄 된 조렙은 떨떠름히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서로 방긋방긋 웃고는 있었으나, 흡사 동창회라도 펼쳐진 듯 인위적인 살가움이었다.

“뭐야, 이놈들이 그놈들이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31군단장 악마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메이블린의 자연스러운 친목질을 보고 용기를 얻은 이디스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저희가 지금 마왕성에 좀 가봐야 하는데, 좌표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고 돌아다니려니 헷갈려서요.”

퍽 정중하고 예의바른 물음이었다. 그러나 악마의 입장으로서 어이없긴 매한가지였다.

31군단장은 낯빛을 일그러뜨리며 얼굴 가득 노기를 띠웠다.

“그 무슨 허무맹랑한…!”

“자, 잠깐만.”

그 사이를 조렙이 서둘러 가로막고 섰다. 메이블린의 팔짱까지 뿌리치고서 헐레벌떡 끼어들었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던 친우가 이들에게 당하는 것도 제법 훌륭한 구경거리가 되겠지만, 악마로서의 자긍심이 있지. 우선 저 불청객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31군단장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서지 말고 일단 마왕님께 이 사실을 알려. 인간이 먼저 마계에 온 것은 처음이잖아. 마왕님의 지시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메이블린이 또 붙잡을세라 조렙은 빠르게 팔을 뻗었다. 그에 밀린 31군단장 악마의 상체가 뒤로 슬쩍 기울었다.

동시에 나타난 새까만 구멍이 그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마왕성으로 곧장 이동할 수 있는 포털 용도의 공허였다.

31군단장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메이블린은 차갑게 웃으며 공허가 열렸다 닫힌 곳을 가리켰다.

“아저씨. 지금 그 행동은… 우리의 부탁을 거부한다, 뭐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나?”

“나는 같은 상대 앞에 두 번 무릎 꿇지 않는다.”

“아저씨 뜻이 정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네.”

조렙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메이블린이 손에 마력을 뭉쳤다.

입을 다물고 있겠다면 억지로라도 열어주는 수밖에.

뜨겁게 뻗쳐오는 기운을 느끼며, 조렙은 후다닥 다음 말을 뇌까렸다. 자고로 악마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무릎 꿇기 전에 항복하지.”

“……응?”

“마왕성 좌표는 여기 있어. 마계는 마기가 넘쳐나니 마력 조절 잘 하고. 이상한 데 안 떨어지게 조심해서 가.”

그는 작은 쪽지에 끄적인 좌표를 냉큼 건네주면서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조렙은 힘이 약한 하급 악마인 만큼 눈치가 빨랐다. 지금 개겨봤자 또 얻어터지기밖에 더할까.

덕분에 메이블린 일행에게는 알아서 삥 뜯겨주는 것이 버팅기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낫다는 최상의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마왕성을 찾고 있었다. 아무래도 죽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이 분명했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천계의 수호신들과 맞먹는 마왕을 대면하고 싶어 할리 만무했다.

‘단단히 미쳤군. 호랑이 소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온 인간은 네놈들이 처음일 거다. 다 죽었어, 킬킬킬……’

지금쯤이면 도착한 제 친우가 알아서 분탕질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의 호들갑으로 심기가 달궈진 마왕은 즉살모드에 돌입할 테고.

자신이 굳이 여기서 손쓰지 않아도 이들은 마왕 앞에 선 순간 흔적도 없이 잿더미가 되리라.

절대 질까봐 그러는 게 아니다. 도망치는 거 아니다. 비록 뒤꽁무니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진짜 아니다.

“그럼 난 이만.”

음험한 속내를 숨기며 조렙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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