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관종은 봐주지 않아
#100
“탑주님, 사흘 치 의뢰 완료 보고서예요.”
이디스는 한층 헤쓱해진 얼굴로 주섬주섬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반면 꽃이 만개한 듯한 낯을 반짝이며 루치펠이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평소의 그는 매의 눈으로 문장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오류가 발견되는 즉시 “다시.”를 외쳐 대서 이디스는 속으로 온갖 욕을 다하며 돌아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근래의 루치펠은 보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 종이를 넘겼다.
지난번에는 벤이 어마어마한 손해배상 청구서를 달고 왔는데도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도리어 의뢰 수행하느라 고생했다며 보너스까지 챙겨줬다.
당시 벤이 졸도하는 걸 막기 위해 같이 그 앞에 섰던 이디스로서는, 이 경악스러운 변화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은… 위대해…….’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너무도 뚜렷한 결과를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
보고서 검토뿐만 아니라 승인 역시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떨어졌다.
“수고했어. 가 봐도 좋아, 이디스.”
“네에… 감사… 합니다.”
사랑의 위대함과는 별개로 상실의 아픔은 거대했다.
그것도 상대가 이 오만하고 빌어먹게 완벽한 제 상사라면 더더욱.
이디스는 늘어진 대답과 함께 미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막 나가려는 그녀를, 짧은 한마디가 붙들었다.
“참. 잠깐만.”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여상한 말투. 이디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하실 말씀이라도…….”
“저번에 무슨 축제 열린다며 갔던 제국, 기억해?”
“어… 이노아드요?”
갑자기 왜 그건 물으시나 싶어 이디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치펠은 마치 지나가다 먹은 음식의 평을 남기듯이, 가볍게 툭 지시했다.
“앞으로 그곳과는 일절 교류하지 마. 전부 끊고, 새로 제안이 들어오더라도 여지조차 주지 말고 무시해.”
“네?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린지.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어 이디스는 미간을 좁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치펠이 아랑곳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마탑은 제국 출신 마법사들은 받지도, 스크롤을 비롯한 모든 마도구도 일절 공급하지 않는다.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전해. 오늘부터 반드시 지켜야할 지령이야. 의뢰도 다 거절해.”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였다.
이디스의 미간에 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간은 뜬금없긴 해도 언제나 그 속엔 나름의 뜻이 있었다. 그래서 별 말 없이 명령을 따라왔었는데.
이번만큼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이노아드는 마탑이 교류하고 있는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막강하고, 거대한 국가였다.
땅덩이가 넓은 만큼 그곳에서 들어오는 재화도 엄청났다.
마땅한 과실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는다는 건 일반적인 상식으론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디스는 노심초사하며 슬그머니 말문을 텄다.
“저… 제국같이 큰 수입원을 거절하게 되면 원로님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지금은 저희와 떨어져 지내신다고는 하나, 엄연히 마탑 소속으로서 재화를 탐하고 계시니까요.”
마탑의 원로들은 루치펠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말 그대로 어느 날 혜성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져, 끝내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탑의 최고자리까지 거머쥔 그가 기꺼울 리가 없었다.
때문에 마탑을 완전히 등지지는 않더라도, 그에 반한다는 뜻을 내비칠 필요는 있었다.
그 의지의 표명으로써 원로들은 마탑에서 나와 마법사 협회라는 세력을 꾸려가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치펠은 그들을 내버려두었다. 아무리 발악해봤자였다.
그들에 관해서 찰나라도 머릿속에 생각을 담는 날은 손에 꼽도록 드물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다.
제 배 불리기에 급급해 거액을 받고서 군사 물자를 몰래 대주었다는 것을 안 날.
루치펠은 협회와 완전히 연을 끊어버렸다.
이따금 마탑 산하 조직이라는 명목 아래 자금만 보내줄 뿐, 그 이상의 교류는 없었다.
그는 말을 더 얹기도 질린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깟 나라 하나랑 절연한다고 마탑이 흔들리기라도 할 거 같아?”
“그 그깟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왕국도 아니고. 대륙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제국이잖아요. 원로들께서 이참에 아예 제국으로 망명하실 가능성도 있어요. 벌써부터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는 상황이고요.”
‘시끄럽게 구는 게 귀찮아서 대충 돈 좀 먹이고 조용히 시켰더니, 이젠 대놓고 이빨을 보이시겠다.’
괘씸해서라도 그 이빨을 뽑아줄 필요가 있었다.
이디스의 염려에도 루치펠은 태연자약하게 읊조렸다.
“오늘부터 협회에 보내던 자금도 끊어.”
“네? 그러다 원로들께서 정말 망명이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구요!”
“자기 자리 지키기 바빠서 사사건건 조금이라도 더 얻어먹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족속들이야. 썩은 덩어리가 알아서 떨어져 나간다니 고맙네.”
“하지만…!”
한 치의 오점도 없는 얼굴로, 그는 그저 눈부시게 웃었다.
“당분간 악취 걱정은 없겠어, 이디스.”
* * *
지금은 텔레포트를 쓸 수 없는 상태라 나는 문 앞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똑똑똑. 두꺼운 나무판에서 손을 떼기가 무섭게 문이 활짝 열렸다.
“누나!”
더없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콜린이 달려들었다.
옛날 같았으면 끄덕도 없었을 몸이 뒤로 조금 밀렸다.
남다른 신수들의 성장 속도 덕분에, 콜린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두 뼘 넘게 커져 있었다.
“메이 누나.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나도. 진짜 많이 컸네, 콜린. 몇 달만 더 지나면 나보다 더 커지겠어.”
“신수로 변하면 이미 누나보다 더 큰걸요! 볼래요?”
말을 마치자마자 콜린의 몸이 은회색 털로 덮였다.
용용이와 똑닮은 뿔이 솟고, 날카로운 이빨이 마냥 아이 같았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신수로 변한 콜린은 성체 늑대보다 조금 더 커다란 모습이었다.
“끼잉, 낑.”
…하는 짓은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랑 변함없는 강아지에 불과했지만.
복슬복슬한 콜린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마구 부비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왔다.
“왔으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음식 식겠다.”
고개를 돌리니 탐스럽게 살랑거리는 꼬리와 쫑긋거리는 귀를 내놓은 실버가 보였다.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서있었다. 뭔가를 퍼다 말고 왔는지 손에는 긴 국자를 들고 있었고.
“콜린. 너도 어서 식탁에 앉거라. 손님들을 앞에 두고 밥 먹다 나가면 안 되지.”
짐짓 엄한 타박에 콜린이 다시 두 다리로 섰다.
그런데…….
“손님들이요?”
이 집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들였다고? 편하게 귀랑 꼬리도 드러낸 상태인데? 그것도 그냥 손님이 아니라 손님‘들’을?
실버는 말없이 식탁으로 날 이끌었다.
그곳에는 하일과 두 남자가 마주본 채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주구… 아니. 메이블린. 왔느냐.”
“오셨습니까, 아가씨.”
켈른과 란슬롯이었다.
‘이 미친 조합은 뭐지?’
쥐꼬리라도 잡아먹은 표정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내게 하일이 픽 웃었다.
“뭘 놀라고 그래. 란슬롯한텐 한 번 꼭 대접하겠다고 했었고, 켈른은 콜린을 돌봐준 은인인데. 이 정도도 못해줘?”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뭐, 저주 때문에?”
“그런 게 아니란 거 알잖아요.”
그 지긋지긋했던 저주를 이젠 농담으로 쓰는 하일을 보며 나도 결국 웃어버렸다.
흉은 남았지만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소중한 사람들을 피하지 않아도 됐다.
신수들은 스스로 만든 감옥을 부수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들을 억압해올 제국 놈들도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내 옆에 의자를 빼고 앉는 콜린에게 켈른이 반갑게 인사했다.
“콜린,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껴안고 뽀뽀하는 건 안 돼요. 저도 다 컸다고요.”
“하루에 딱 한 번만도 안 되나?”
“일주일에 한 번.”
“그, 그럼 사흘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콜린은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몰라도 켈른을 잘 구워삶을 줄 알았다.
물론 내 양심은 건재하다. 흠, 흠.
켈른과 콜린이 포옹협상을 하는 사이 란슬롯은 실버의 요리 실력을 연신 칭찬했다.
확실히, 실버가 손님들 온다고 특별히 더 신경 썼는지 별점 5점 만점에 10점인 맛이었다.
조촐했던 식탁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활기로 넘쳐났다.
‘배도 부르고, 나눌 얘기도 더 없고… 이제 일어날까.’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수다타임까지 마치고 나는 슬슬 갈 채비를 했다.
정문으로 나와 품에서 스크롤을 주섬주섬 꺼내는 내게 란슬롯이 다가왔다.
“아가씨. 아직도 마법을 쓰는 건 무리이신 겁니까?”
“리미터를 안 차서, 어쩔 수 없네요.”
“왜 마탑에 요구하지 않으시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없이도 마력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져보려고요.”
“몸에 부담이 많이 되실 텐데요.”
“언제까지 리미터에만 의존할 수 없으니까요. 곧 마법도 다시 쓸 수 있을 거예요. 마침 끝내주는 제 전용 선생님이 있어서, 지금 배우러 가요.”
나는 마탑행 스크롤을 금메달처럼 자랑스럽게 선보였다.
그러자 란슬롯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우며 내 손을 잡았다. 화끈거리던 손목이 시원한 감촉으로 덮였다.
아까 실수로 찻물을 조금 흘리는 바람에 가벼운 화상을 입은 곳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알았는지 그는 데인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혹여라도 다치시면 언제든 절 찾아오십시오. 저는 아가씨 전용 치유사니까요.”
“란슬롯도 무슨 일 생기면 저 불러요. 전용 탱커 해줄게요.”
“탱… 그게 뭡니까?”
“완전 좋은 거예요. 그럼 너무 늦으면 안 돼서, 이만.”
놀란 너구리처럼 입을 벌린 란슬롯에게 윙크를 날려주고서, 나는 거침없이 스크롤을 찢었다.
* * *
마탑에 도착한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다들 어디 갔어?’
습관적으로 이디스를 만나던 4층은 썰렁했다. 그것은 다른 층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청각을 극대화시켜서 큰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갔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1층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시간이면 한창 분주하게 돌아다녀야할 마법사들도 죄다 이곳에 모여 있었다.
바글대는 무리는 마치 싸움구경이라도 하듯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빙 둘러싼 형태였다.
나도 구경꾼에 합류하고자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술렁이는 소리 사이사이 앙칼진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잘만 의뢰 받았으면서 왜 이번엔 안 된다는 거야!”
“저… 죄송하지만 그런 사적인 의뢰는 받지 않아서…….”
“의뢰비용을 두 배로 준다니까?”
“그래도 탑주님께선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루치펠한테 직접 얘기 들을 거야! 당장 불러!”
“당연히 불러봤죠. 근데 듣는 체도 안 하고 알아서 처리하라아아악! 저, 저 머리숱 별로 없어요! 잡아당기지 마세요!”
머리채를 잡힌 벤이 종이인형처럼 짤짤 흔들렸다. 하지만 그를 구할 사람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불쌍한 벤…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건가?’
다들 쩔쩔매면서도 여자의 행패를 말리지 않았다.
진상 손님이 오면 기선제압용으로 등판하던 머스클조차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구석에서 튼실한 이두박근을 꿈틀거리며 안달복달 못하고 있는 머스클을 툭 쳤다.
“왜 이 난동을 피우고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은 누구고요?”
“아, 선생님. 그게… 제논왕국의 왕녀님이신데 탑주님과 일주일을 보내게 해달라는 의뢰를 넣으셨거든요. 탑주님은 이미 거절한 전적이 상당하시고요.”
“그런데 오늘은 거절해도 쉽게 안 돌아가고 있다, 뭐 그런 상황인거고요?”
“네. 아무래도 왕족이다 보니까… 탑주님이시라면 몰라도, 저희가 함부로 대하기는 좀 꺼려져서요.”
그러고 보니 루치펠은 종종 호위 의뢰를 빙자한 열렬한 구애에 시달리곤 했었다.
옛날에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더니,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이었다.
‘에효. 우리 남친이 좀 잘나긴 했지.’
“루치펠 나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왕녀는 벤의 멱살을 살풀이 천삼아 신나게 탈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때 아닌 탈춤판을 향해 턱짓했다.
“머스클, 지금 이 소란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됐어요?”
“한 두 시간 정도 됐을 겁니다.”
“두 시간이라… 알겠어요. 제가 해결할게요.”
“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요. 내 깡 알잖아요.”
‘왕녀가 아무리 원 헌드레드 빌을 외쳐도, 화려한 조명이 날 감싸도 내 깡은 건재하다고요.’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탈춤은 이제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머스클의 만류를 뿌리치고 머리가 점점 고슴도치화 되어가는 벤에게 다가갔다.
그는 거의 옷깃이 찢어질 기세로 행사용 풍선마냥 펄럭이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내 모습을 발견한 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안 돼요, 선생님! 오지 마세아아아악!”
그는 머리가 쥐어뜯기면서도 어서 가라고 손을 내저었으나,
“당신이 제시한 의뢰비용, 얼마예요?”
나는 벤의 뺨을 내리치기 위해 한껏 치켜든 왕녀의 팔목을 탁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