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거침없이 버드키스를 퍼부어대던 루치펠을 겨우 돌려보내고서, 나는 조심스럽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문을 열고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나의 유능한 전담 하녀, 달리아가 달려왔다.
그녀는 상당히 안달복달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자작님께서…….”
우, 우리 아부지가 왜? 정말 쓰러지시기라도 한 거야?
덩달아 초조한 기색으로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내게 달리아가 후다닥 뇌까렸다.
“일 분만 더 늦으셨으면 직접 찾아가려고 하셨어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때마침 달리아의 뒤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험악한 얼굴로, 거의 폭주하는 전차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내지르는 중이었다.
“내 그놈을 당장…!”
“아빠…?”
“메, 메이. 왔느냐?”
나와 눈이 딱 마주침과 동시에 아빠의 질주도 멈췄다.
그는 허둥지둥 거리며 무언가를 뒤로 사사삭 숨겼다. 세상 험상궂었던 표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풀어졌다.
하지만 독수리 못지않은 내 동체시력을 이길 순 없었다.
나는 그의 옆구리로 삐죽 튀어나온 활촉을 슬며시 가리켰다.
“저… 제가 방금 아버지께서 맹수를 잡으실 때만 애용하시는 석궁 컬렉션 넘버18을 본 것은 착각이겠지요?”
“물론이지. 사냥철도 아닌데 뭣하러 그리 험한 것을 꺼내들겠느냐.”
아빠는 짐짓 태연스러운 낯을 연기하며 이어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체시력과 더불어 나의 청력 또한 그 작은 독백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방금… 누구하나 죽인다면 몰라도, 라고 했어.’
정말 한 치의 부정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사냥의 대상은 루치펠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흐르는 진땀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그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
이러나저러나, 루치펠은 일단 내 남친이었으니까.
그러나 다니엘이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게 더 빨랐다.
“메이블린. 그 파렴치하고,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고, 얼굴만 반지르르한 무뢰배 같은 놈이 정녕 좋은 것이냐?”
잔잔한 숲 같던 다니엘의 녹안이 일순 번득였다.
아, 젠장.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 오빠… 제가 방금 오빠의 공주-공포의 주둥아리-버전 눈빛을 본 것 역시 착각이겠지요?’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게.
“형님.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습니다.”
“아직 부족해. 끝 부분 좀 더 갈아.”
“예.”
노아의 대검이 오늘따라 더욱 섬뜩하게 빛나기 때문이었다.
‘노아 오빠는 왜 갑자기 칼을 저렇게 갈고 있고, 미하일은 그걸 도와주고 있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무슨 작당 중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끝이 결코 화목하지 않으리란 건 고작 몇 초가량만 지켜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간 진짜로 일을 치를 기세였다.
나는 단호하게 입을 뗐다.
“다들 스톱. 손에 든 거 이리 내요.”
“하지만 메이블린…!”
“쓰읍.”
내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짓자 네 남자는 미적거리면서도 순순히 무기를 내놓았다.
나는 아빠의 석궁과, 노아의 대검과, 혹시 몰라 미하일의 두꺼운 전공 서적까지 빼앗고서 그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채찍 다음엔 당근인 법이지.’
“저는 이럴 시간에 차라리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아요. 아빠랑 오라버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안 그래, 미하일?”
“당연하지, 메이.”
“물론입니다, 누님.”
다행스럽게도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은 내가 내민 당근을 덥석 먹어주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한 약속이 있었기에 나는 저녁이 될 때까지 슈트레커 부자 옆에 딱 붙어서 조잘거렸다.
중간 중간 루치펠에 대한 칭찬을 은근슬쩍 끼워 파는 것도 잊지 않고서.
예를 들면,
“근데 오빠들은 결혼 생각 없어? 이러다 내가 먼저 가겠어.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아가씨 있으면 해. 오빠들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좋아. 오빠들도 그래줄 거지? 내 안목 믿잖아.”
라든지.
“이상형 말해봐. 내가 은근 마당발이라, 잘 찾을 수 있어. 조건이 엄청 까다로워도 괜찮아. 나 봐. 얼굴이랑 몸매는 천상계지, 능력은 탈인간급에, 재력까지 어마무시한 놈을 찾았잖아. 심지어 그런 놈이 내 앞에서는 껌벅 죽어.”
라든지.
그렇게 틈새시장을 공략해가며 은근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침범하는 내 주접이 끝을 맺었을 즈음엔 벌써 저녁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넋이 나간 듯한 가족들에게 굿나잇 키스를 날려주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뿌듯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폭 몸을 묻었다. 그러자 문득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뭔가 빠뜨린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꼭 있어야 할 게 없는 듯한…… 아.’
나는 황급히 시스템창을 띄워보았다.
하지만 허공엔 여전히 어스름한 달빛만 감돌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잠잠했다.
‘뭐야… 왜 안 열려? 분명 어제까진 말짱했는데? 채워야 할 수치도 꽤 남았었고.’
관종생활 몇 년 차에 접어드는 내 경험 상, 시스템이 사라지는 경우는 딱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미친…! 그거 한 번 했다고 수치가 하룻밤 새 다 차?’
이건 뭐 고속 충전기가 아니라 아예 새 배터리로 간 수준이잖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젯밤에 수치가 다 찼다는 알림음을 들은 것도 같았다.
벌써 몇 번 째인지 모를 격한 운동 중이라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뿐.
나는 잠시 머쓱하게 있다가 이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급할 땐 종종 이용해도 괜찮을 지도.’
뭐, 이제 사랑받는 관종인 내가 급할 일은 없겠지만, 또 모르는 거니까.
‘히히. 내일 또 얼굴 보러 가야지.’
나는 이불을 폭 뒤집어쓰며 비실비실 웃다가 잠이 들었다.
* * *
“벤 아저씨.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정말 현실인가요? 제발 꿈이라고 해줘요.”
“슬프지만 현실 같아. 너 탑주님이 꿈에서조차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본 적 있어?”
“아뇨…….”
“그치? 그럼 난 이만 간다. 더 있다간 토할지도 모르겠어.”
“아 아저씨…! 제발 절 이 혼돈 속에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이거 놔! 난 볼 만큼 다 봤어! 내가 기어코 시력을 잃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이디스가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벤은 매정하게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가버렸다.
혼자 남은 이디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루치펠의 방 앞에서 서성였다.
임무 보고서를 확인받으러 가야 하는데,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안에선 깨가 쏟아지다 못해 퍼붓는 두 남녀의 애정 행각이 한창이었다.
이디스는 결국 문고리에 손 한 번 올리지도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망할…….”
이디스와 마탑의 마법사들은 메이블린이 돌아온 것이 정말 기뻤다. 오죽했으면 그 튼실하던 머스클이 울다가 탈진해서 쓰러질 정도였다.
처음 일주일까진, 분명 그랬다.
그러니까, 메이블린이 망나니 같은 제 주인과 사귄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지같은 마탑주… 감히 우리 선생님을 건드리다니…!’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에 없이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사람은 못마땅한 제 주인뿐만이 아니었으니.
살짝 열린 문틈으로 메이블린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와 이디스의 머리를 사정없이 쳐댔다.
그 다음엔 세상에서 가장 감미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드러운 저음이 웃음소릴 맞받아쳤다.
“널 괴롭혔던 것들, 힘들게 했던 놈들. 다 죽여줄까?”
비록 그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더라도.
메이블린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은 루치펠은 금방이라도 제국이고 뭐고 다 쓸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우선 메이블린의 허락을 맡는 것이 먼저였다.
루치펠에게 있어 메이블린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삶의 기준이었고, 이지러진 길의 이정표였으며, 막막한 항해 속 나침반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루치펠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어 주며 메이블린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반쯤은 죽여 놓고 왔어. 괜찮아.”
“그럼 그 나머지 반절은 내가 처리해줄게. 남친 이럴 때 부려먹으라고 있는 거지. 누구든 이름만 대. 바로 모가지 따줄게.”
“세상에, 저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줄게가 아니고 모가지를 따준다니. 어쩜 좋아, 우리 루시… 말도 너무너무 예쁘게 해?”
밖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이디스는 한탄했다.
‘나도, 나도 모가지 잘 따는데! 내 전문인데!’
그리고 생각했다.
‘메이블린한테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어…!’
콩깍지도 이런 쌍콩깍지가 있을 수가 없었다.
저 가증스런 마탑주 더러 예쁘다니!
‘우리 순진한 선생님… 저 가식적인 상판에 기어이 넘어가시고 만 거야…….’
한숨만 푹푹 내쉬어봤자 뭣하나.
둘 사이에 끼어들긴커녕 닿을 수조차 없을 만큼 행복해 보이는 한 쌍이었다.
이디스가 탄식하는 사이에도 꽁냥거림은 계속되었다. 메이블린은 루치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내리며 엷은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하지만 정말 괜찮아. 그놈들의 목숨을 가져갈 사람들은 따로 있어. 그들의 손에 죗값을 치르게 만들 거야.”
알다시피, 메이블린은 어물쩍 매듭을 질 바에는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진정한 복수를 꿈꾸고 있었고, 이노아드의 권력자들에게 이는 퍽 고까운 사실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할 거야.’
한 번 문 것은 기어코 끝장을 볼 때까지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
그것이 적이든, 아군이든 간에.
그녀의 타오르는 눈동자에서 굳은 의지를 확인한 루치펠은 별수 없이 한 발 물러났다.
지금은 일단 메이블린의 손에 제 뺨을 기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것에 그저 감사했다.
루치펠은 고개를 슬쩍 돌려 하얀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졸부님은 나를 아주, 매우 많이 칭찬해 줘야해.”
“왜?”
“함부로 죽이지 말래서, 참았어. 네가 없는 세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닥치는 대로 뒤엎고 싶었는데도 참았어. 네 말 한 마디 때문에.”
“……근데 무슨 폭발은 많이 일으켰다고 하던데?”
“그 정도면 많이 참은 거 아냐?”
“그럼 그럼, 많이 참았네. 잘했어. 앞으로도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응.”
메이블린은 다 큰 강아지를 어르듯 루치펠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루치펠은 또 좋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고.
이 순간 문틈에 눈을 대고 끼어들 타이밍만을 엿보던 이디스는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콩깍지가 쓰인 수준이 아니라 아예 뇌까지 덮어 버렸나봐…!’
하지만 금치 못할 경악도 오래가진 못했다.
메이블린을 번쩍 들어 창가에 앉힌 루치펠이 점차 상체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메이블린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고.
이디스는 청각에 이어 시각마저 잃을까 후다닥 자리를 떴다.
‘크흡, 부디 행복하세요, 선생님…!’
질끈 감은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