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오후.
두 남자가 왕궁의 긴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도 않은 보폭이었건만, 앞장선 남자를 뒤따르는 보좌관의 걸음이 자꾸만 처졌다.
칼리안은 오늘따라 유난히 굼뜬 켈른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켈른.”
“예, 저하.”
칼리안의 부름에 켈른이 가라앉은 어조로 느릿느릿 답했다.
원체 빠릿빠릿하고 똑부러지던 녀석이 저러니, 의심은 더욱 배가 됐다.
칼리안은 아예 걸음까지 멈추고 뒤를 돌았다.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군.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것이…… 하아.”
켈른은 조금 주저하다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털어놓는 속사정과 함께 멈췄던 보행도 계속되었다.
“일전에 한 아이를 후원하기로 결정했다곤 말씀 드렸었지요.”
“아, 메이블린이 길거리에서 데려왔다던 아이. 이름이… 콜린이라고 했던가?”
“네. 근데 그 아이가 오늘 아침에 떠났습니다.”
“저런. 가출이라도 한 겐가?”
여상한 물음에 켈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아이도 아니었고,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친부모가 나타났습니다. 사고로 아이를 잃어버린 모양이더군요. 서로 껴안고 우는데, 어찌나 애절하던지요. 보는 저조차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아침부터 큰 일이 있었군.”
보좌관의 무기력함을 만든 원인을 알게 된 칼리안은 옅게 침음했다.
켈른이 그간 얼마나 애지중지 정성을 다해 키운 아이던가.
곁에서 그의 눈꼴신 자랑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칼리안으로서는 그가 퍽 안쓰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켈른은 퀭한 낯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조금은 씁쓸합니다. 3년을 자식처럼 키웠던 아이라.”
“정이 많이 들어서 보내기 힘들었겠군.”
“…네. 그래도 그리 슬프진 않습니다. 종종 놀러온다고 했거든요.”
“아이도 자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처음엔 말도 잘 안하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먼저 장난을 걸기도 하니, 뭐. 많이 친해졌죠.”
옛날 생각이 나는지 켈른은 잠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남긴 말이 생각나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한데, 헤어질 때 조금 영문 모를 소리를 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했기에 그런가?”
“곧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길 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두라더군요. 거 참,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또 모를까 웬만해선 제가 놀랄 리가… 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가던 켈른의 걸음이 별안간 멈추었다.
더불어 말을 끝맺지 못한 입은 마지막으로 내뱉던 단어 모양 그대로 벌린 채 굳어버렸다.
“갑자기 왜 그러나.”
이상함을 느낀 칼리안이 켈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서있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둘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주변까지 순간 환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근사한 미소였다.
켈른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하… 혹시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거, 저하도 보이십니까?”
“죽은 슈트레커 영애를 말하는 거라면, 그렇다네.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
“맙소사…!”
손에 힘이 풀려 툭 떨어뜨리고만 두꺼운 서류 뭉치가 발등을 때렸다.
그럼에도 온 몸의 신경은 눈앞의 믿을 수 없는 생명체에게 쏠린 터라 아픈 줄도 몰랐다.
팔락. 바람이 가져간 종잇장들이 깃털처럼 허공에 휘날렸다.
그 사이로, 메이블린이 한걸음씩 다가왔다.
“그림자가 있어요, 저하. 유령이… 아닌데… 그러면, 그러면…….”
“…정말 산 사람이란 소리군.”
두 남자는 꿈인지 현실인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이윽고 그 앞까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마침 제 손아귀로 떨어진 종이를 훑어본 메이블린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입꼬리를 씩 올렸다.
“보아하니 할 일이 태산이시네요. 아직 제 책상 안 치우셨죠? 비어있으면 좀 앉고 싶은데.”
아, 정말이지.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나는 그대가 이럴 때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어.”
“이왕이면 웃어주세요. 이미 충분히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거든요.”
“노력해보지.”
하지만 노력해보겠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칼리안은 말 그대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감격에 젖어들었다.
켈른은 그 옆에서 벌써부터 볼썽사납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서있다간 내일 아침 일간지에 「왕궁 복도에서 왕세자와 보좌관 대성통곡해… 그들을 울린 ‘그녀의 정체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대낮의 신경전’, 비틀린 삼각관계 의혹 제기돼」 따위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릴 게 분명했다.
메이블린은 누가 볼세라 서둘러 둘을 다독이며 이끌었다.
* * *
“와, 정말 그대로네요.”
나는 오후의 햇살이 비춰드는 집무실 풍경을 보며 감탄했다.
내부는 내가 에임을 떠난 게 바로 어제라고 착각할 수 있을 만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가 쓰던 모든 물건들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어요. 완전 똑같아.”
“그대로 둬야, 왠지 그대가 돌아올 거 같아서. 실제로도 이리 돌아왔으니 잘한 선택이었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책상을 둘러보는 내게 칼리안이 담담한 미소를 띠웠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평온함.
이 가면을 쓰기까지 그가 삭히며 넘겼을 무수한 밤이 끝내 날 또 눈물짓게 했다.
나는 응어리진 목울대를 꾹 누르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내가 보낼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을 담아서.
그러자 칼리안의 입매가 더욱 짙게 파였다.
일전에도 본 적 있는 저 표정은… 그 주제를 꺼낼 때 말곤 없었는데.
“아직 고마워하긴 일러. 그대로인 건, 책상뿐만이 아니니까.”
“네…?”
“나도 그대로야. 약혼녀의 자리 역시 여전히 비어있거든.”
역시. 내 불행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내가 다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나와의 파혼 소식이 퍼진 직후부터 칼리안에겐 각종 연서가 빗발쳤었다.
어디 그뿐인가. 권세를 불리기 위해 은근슬쩍 국혼을 추진하려는 압력 또한 만만찮았다.
그래서 솔직히 에임으로 돌아올 때 즈음엔 왕세자비가 존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다 마다하고 여태까지 솔로 라이프를 굳건히 이어왔다고?
“아니, 구혼하는 영애들이 넘쳐났을 텐데 3년 내내 독수공방 하셨다고요?”
“날 바람맞힌 누군가를 기다리다보니 그리 됐지.”
아이고, 못 살아. 어쩐지, 세간에 왕세자가 동성애자 아니냐는 소문이 들리더라니.
‘얼마나 금욕의 아이콘이 되신 거야.’
자식을 하루 빨리 장가보내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걸까. 오자마자 방구석 백수를 둔 부모의 심정을 간접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그게 나 때문이란 걸 알아서 더 미안했다.
나는 조금 먹먹해진 목소리를 작게 흘려보냈다.
“왜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하셨어요.”
“나는 미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대가 없었던 3년은…….”
칼리안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가면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정형화된 표정들.
그리고 비로소 드러나는, 필사적으로 숨겼을 아픈 얼굴들.
그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다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었다.
괜히 미안해서 어물쩍거리며 희망고문을 할 바에야 깔끔하게 잘라내는 게 나았다. 3년간의 유예 기간은 끝났다.
나는 그가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인연에 얽매이기보다, 앞으로 나아가길 바랐다.
내 저의를 읽은 칼리안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사람 마음이란 게 뜻대로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영애더러 날 좋아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묘하게 슬퍼 보이는 낯빛이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당분간은 씁쓸하겠지만, 그대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지금은 그저, 영애가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감사해요, 저하. 저도 저하가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그럼 다시는 떠나지 마. 부탁이야.”
“이젠 제발 가라고 해도 안 갈 거예요. 앞으로 찰거머리를 메이블린이라고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안 떠나요. 여기 꼭 붙어 있을 거예요.”
“내 곁에도 계속 있어줄 건가? 신하이자 친우로서. 이 자리는 아직 그대가 필요해.”
칼리안이 내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나는 답변을 고려하는 척 태연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저같이 훌륭한 인재를 찾긴 힘드실 테니…….”
내가 계속 있어야지 어쩌겠어.
“출근은 언제부터 하면 되나요?”
똑부러진 대답에 칼리안이 그제야 말갛게 웃었다.
* * *
칼리안과 헤어진 뒤에는 켈른에게 붙잡혔다.
나는 그의 일장통곡을 들으며 그가 애지중지 키웠던 콜린의 정체를 알려줬다.
그는 어떻게 그것마저도 속일 수가 있냐며 날 타박하다가, 이내 또 찔찔 짰다.
난 울었다가 화내기를 반복하는 그에게 엉덩이에 뿔 안 났는지 잘 살펴보라고 일러주고선 왕궁을 나왔다.
암흑가도 들렸고, 왕궁도 방금 클리어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마탑이네.”
루치펠을 만나고, 하룻밤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네 애정을 받아도 되는 걸까.’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을까.’
‘내가 널, 정말 좋아해도 되는 걸까.’
그렇게 무수한 고민 끝에 나온 답은, 생뚱맞게도 보고 싶다였다.
그냥 보고 싶었다.
내가 다른 이들을 구하느라 바쁠 때, 루치펠은 그런 날 구하기 위해 항상 몸을 던졌었다.
칼리안을 위해 독을 마셨을 때도, 베인에게서 위협을 받았을 때도, 나를 구해준 건 그였다.
첫 만남부터 관심에 허덕이던 나를 마탑의 선생님으로 임명한 것도, 그래서 끝없는 회귀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도.
슈타커를 공작위에 올리기 위한 거래를 터준 것도, 내게 마법을 가르쳐준 것도.
전부 그였다.
언제나 루치펠이었다.
뭐든 다 퍼주던 그는 끝내 제 마음까지 내게 줬다.
온통 새까만 어둠뿐이던 어젯밤, 그는 내가 좋다고 했다. 날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바보같이 도망쳐버렸지.’
인정한다. 아닌 척 해도, 나는 비겁했다.
고작 대가없는 그 애정 하나에 벌벌 떠는 겁쟁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에게서도.
‘겁쟁이 인생 이만하면 충분해.’
사랑 앞에 쪼그라드는 쫄보는 파업하고, 마탑주씨 여친이나 할란다.
나는 마지막 스크롤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