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마, 말도 안 돼…!”
“분명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지금 보이는 건 뭔데…!”
곳곳에서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경악이 실린 눈빛들이 쏟아졌다.
메이블린은 그 시선들을 기꺼운 듯 즐기며 능청스레 웃었다.
원래부터 죽었던 적조차 없는 사람처럼.
“그래. 너희들 수장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죽어도 안 죽는 사람이라고. 근데, 지금 이게 뭐야?”
느슨하던 공기가 일순 조여들고. 아래를 내다보는 눈동자엔 짙은 살기가 어렸다.
메이블린은 딛고 선 잔해 끄트머리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펜트런 길드는 특징이 멍청함인가봐? 옛날에 전 길드장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다시 대드는 걸 보면.”
그 때 목이 뎅겅 썰렸었지, 아마? 덧붙이는 말은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 위태로운 상황이 즐거운 놀이라도 되는 양.
“상대를 가늠하는 법도 모르고 무는 개는, 필요 없다고 경고했었을 텐데.”
선연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좌중은 입도 뻥긋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녀는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는 클라인과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마주했다.
과거, 이 경고를 던진 사람이 클라인이었으므로.
“안 그래요, 클라인?”
“…그렇습니다, 주군.”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상황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클라인은 벅차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주군이 돌아왔으니, 빈 집을 지키는 개 노릇도 끝났다.
그는 주인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고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는 투견으로 변모했다.
클라인의 비호를 받으며 메이블린은 펜트런 길드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잔뜩 몰려있던 반란군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수장이 돌아왔는데 환영식을 이딴 식으로 해주는 길드는 처음 보네. 내가 갈구는 상사는 아니지 않았나?”
“주, 주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반란군의 대표 격이었던 펜트런 길드장은 핏발이 서도록 이를 악물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분명 죽어서, 3년 동안이나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오늘, 그것도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서야 딱 나타났다.
그 속사정을 파악하긴커녕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놔둬선 안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장 자리는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떨리던 동공이 다시 본래의 탐욕을 되찾고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죄송하지만 주군. 저희는 더 이상 당신을 주군으로서 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순순히 그 자리를 내려놓는다면, 해는 입히지 않겠습니다.”
수세는 여전히 길드 연합 쪽이 우세했다.
아무리 수장이 돌아왔다 해봤자, 승산에 큰 변화가 있진 않을 터였다.
그는 말없이 손을 올렸다. 신호를 받은 반란군들이 다시 무기를 들고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태세를 취했다.
수장의 부활로 누그러질 줄 알았던 분위기가 도리어 날 서게 달아올랐다.
도저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메이블린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착하게 굴었었나봐.”
“곧 죽을지도 모르는 놈이 말이 많군.”
반란을 선포한 순간부터 뵈는 게 없는지 펜트런 길드장의 어투가 거칠어졌다.
잠자코 지켜보던 클라인이 참다못해 나섰다.
“감히 누구에게…!”
“됐어요.”
암기를 날리려는 클라인을 제지하며 메이블린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항복하고 돌아가면 살려는 줄게.”
펜트런 길드장을 지그시 마주한 눈이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것처럼 일렁였다.
“내가 리미터가 없어서 지금 힘 조절이 안 되는 상태거든.”
그러나 메이블린의 경고에도, 길드장은 코웃음만 쳤다.
“건방지게도 구는군. 너 정도 실력의 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도 없을 것 같나.”
“뭐, 정 뜻이 그렇다면야. 대신 나한테 자비를 바라지 마.”
“언제까지 그 허세를 부릴 수 있나 보지.”
길드장이 돌격의 신호로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메이블린은 팔을 치켜 올렸다.
푸른 빛 무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빠르게 피어올랐다.
휘오오오-
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찬 바람줄기가 그녀의 머리 위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부피를 더해간 돌풍은 이내 거대한 토네이도가 되어 휘몰아쳤다. 작은 체구에서 어찌 저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 잠깐…!”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한 길드장이 급히 군을 뒤로 물렸으나.
“말했잖아. 조절 안 된다고.”
이미 늦은 때였다.
푸콰가가각!
광장을 지키던 아름드리나무가 통째로 뽑혀나갔다. 그를 보는 반란군들의 턱도 같이 뽑힐 듯 떡 벌어졌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주군. 저희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펜트런 길드장이 울상을 지으며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빌었다.
그의 머리는 허수아비 못지않은 산발에, 눈은 밤탱이가 되어 뜨는 것조차 힘겨워보였다.
퍽 애처로워 보이는 행색이었으나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응 싫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맹세합니다, 주군.”
“응 안 돼.”
“제 평생의 주인은 주군 한 사람 뿐입니다.”
“응 아니야.”
“주군, 제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수백 명의 장정들이 하나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호소했다.
정말이지 이름값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하는 길드였다.
인성 빤스 내릴 땐 언제고, 존심도 없는지 빤스런 행렬이 줄창 이어졌다.
물론 나는, 받아줄 생각이 모기 엉덩이만큼도 없었다.
“아 구질구질하게 왜들 이래? 좀 전까지 바락바락 대들 땐 언제고 이러냐고.”
“저희가 너무 멍청해서 그랬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희 길드 특징이 멍청함인 거.”
“그걸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깨달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 그치?”
눈썹을 늘어뜨리고 안쓰러워하는 내 어조에 길드장이 찰나 화색을 띠었다.
내가 선처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더욱 간절하게 빌기 시작했다.
싹싹 문지르는 저 손 사이에 나뭇가지 하나만 쥐어주면 금방이라도 불이 피어오를 기세였다.
‘아오, 뭘 기대하고 앉았어.’
있지도 않은 구남친 수백 명을 상대하는 이 기분은 뭐란 말인지.
나는 꼰 다리를 까딱였다.
“전부 치워.”
“예, 주군!”
여전히 내 편이었던 암살자들이 충성스럽게 명을 받들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울며불며 매달리는 녀석들을 눈앞에서 끌어냈다.
“주군, 주군!”
“응, 잘 가.”
공간을 가득 채운 처절한 절규에도, 나는 손만 살랑살랑 흔들어주었다.
‘몇 달 간 새빠지게 굴리면 고분고분해지겠지.’
기실 완전히 내칠 생각은 없었다.
길드 연합이 택한 방법이 꽤 과격하긴 했다만, 애초에 3년이나 자리를 비운 내 탓도 컸으니까.
괜히 짐승들을 거리에 풀었다가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꺼려졌고. 차라리 통제할 수 있는 곳에서 부리는 게 나았다.
오늘 내 힘에 호되게 눌렸으니 다시는 섣불리 대들지 못할 것이다.
상황을 정리하고서 나는 지하 공간으로 내려갔다. 뒤에서 안달복달 못하며 날 따르는 발걸음 소리 여러 개가 따라붙었다.
이윽고 방문이 닫히고, 수많은 보는 눈들이 사라지자마자.
“흐아아아앙! 주구우우운!”
“진짜 주군이야! 이 무말랭이 같은 촉감… 정말 주군이 맞아!”
잭과 재키가 환희에 찬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달라 들었다.
살아있는지 확인하려고 내 몸을 쪼물락거리다가, 귀청이 떨어지도록 꺼이꺼이 통곡했다.
폭포수를 쏟아내는 쌍둥이 뒤로 슈타커의 모습도 보였다.
“메이블린!”
그녀는 답지 않게 쌍둥이도 제치고서 나를 와락 껴안았다. 갈급한 손길에선 절박함마저 묻어나왔다.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계속 그대의 죽음을 납득해보려고 해도… 자꾸만, 자꾸만 돌아올 거라고 기대하게 돼서 정말이지 나는…!”
꾹 짓씹은 입술에서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는 이미 가득 고인 눈물을 뚝뚝 떨궈내는 중이었다.
실내에서 비가 올리는 없으니 지금 뺨을 타고 흐르는 저게 진짜 눈물이라는 건데.
이 철혈의 공작님이 울고 있다고?
혹시나 싶어 눈을 문질러 보았으나 시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들은 내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날 아끼고 있었나보다.
“울지 마요, 내가 잘못했어요.”
나는 손을 뻗어 슈타커의 뺨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흐느낌이 차츰 잦아들었다.
애써 슈타커와 쌍둥이를 달래며 회포를 푸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밖에서 난장판을 대강 마무리하고 온 클라인이 서있었다.
그는 퍽 급하게 뛰어왔는지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져있었다.
“…….”
“뭐하세요, 보스.”
목석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그를 쌍둥이가 어서 가보라며 밀쳤다.
클라인이 비척대는 걸음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이윽고 지척까지 다다른 그는 내 어깨에 천천히, 고개를 묻었다.
툭. 맞닿은 이마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
“……저, 클라인? 괜찮아요?”
“잠시만 이렇게 계셔주십시오. 아가씨께서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뻗었던 팔을 제자리로 원위치 시켰다.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쌍둥이처럼 차마 손대지도 못하고, 껴안지도 못하고, 혹여라도 건드리면 바스라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우두커니.
“제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이런 날이 오기만을 바랬습니다.”
축축한 목소리가 어깨를 적셨다.
그 태산 같던 남자가, 울먹이고 있었다.
“아가씨를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을 날만을요.”
방 안이 온통 물안개라도 낀 것 마냥 습했다.
눈물이 그새 그렁그렁 차오른 탓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나는 찡하게 달아오른 코를 훌쩍이며 그를 토닥였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죠. 미안해요. 그리고…….”
목이 잠겨 잠시 말이 끊겼다.
그 찰나의 시간은, 나를 기다렸던 이들을 두 눈에 담기에 충분했다.
“날 잊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이 한 마디에 쌍둥이가 꾹 참고 있던 울음을 다시 터뜨리고 말았다.
둘은 엉엉 통곡하면서도 양쪽에서 나를 쟁탈하듯 끌어안았다.
“흐앙, 저희가 어떻게 주군을 잊어요, 정말…!”
“맞아요, 재키가 누나라는 건 가끔 잊어도 주군은 절대 못 잊는다구요…!”
“흐윽, 뭐야 잭.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아 몰라, 흑. 비키기나 해. 너 주군 안은 지 1분 지났어. 이제 내 차례야.”
“너나 죽기 싫으면 알아서 꺼져. 3년 헤어져 있었으니까 30년 안고 있을 거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흐아앙, 주구운…!”
‘여전하네.’
평소처럼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정말로 돌아왔음을 다시금 온몸으로 느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이곳으로.
그렇게 길쭉이들 사이에 햄스터 마냥 껴서 쓰다듬을 받은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마음 같아선 30년이고 300년이고 안아주고 싶었지만 가야할 곳이 아직 남아있었다.
내가 난처한 기색으로 몸을 틀자, 눈치 빠른 클라인이 내 팔목을 붙들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의 얼굴에서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슈타커와 쌍둥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내가 또다시 사라질까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음, 이거 굉장히 미안해지는 걸.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누군 내일 알고 누군 내일 모레 알면 안 되니까, 공평하게 오늘 내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뗐다.
“소식을 듣자마자 급하게 온 거라서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사하러 가야죠.”
“…….”
몇 초간 말이 없던 클라인은 곧 완강한 어조와 함께 단호한 시선을 내렸다.
“이번엔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조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아가씨를 보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진심이에요?”
“진심입니다.”
아, 이래서 사람은 죄 짓고 살면 안 돼.
내 공백으로 인해 이들이 받았을 상처가 새삼 와 닿았다.
‘……많이 아팠겠지, …도.’
나는 가슴께가 저릿하게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클라인의 뺨에 난 흉터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리고 더욱 짙어진 담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약속해요. 더 이상 사라지지도, 말없이 떠나지도 않을 거예요.”
“……약조하신 겁니다.”
“그럼요. 이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그 먼 길을 돌아온 거니까.”
나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클라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나는 걱정 말라는 의미로 한 번 웃어주고서, 자유로워진 손으로 거침없이 두 번째 종착점 행 스크롤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