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94)화 (94/185)

22. (외전) 그 하녀의 속사정

#94

내 일기장, 널 앞으로 코코라고 부를게.

일기를 처음 써봐서 그런지 마치 친구에게 얘기한다고 생각해야 더 펀하게 써지는 것 같아.

많이 서툴지만, 그래도 어차피 나만 보니까, 뭐.

만약 이걸 누군가 본다면 난 창피해서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다닐지도 몰라.

물론 그래도 계속 쓰긴 할 거야. 일기 쓰는 게 내 소원 중 하나였거든.

이거 때문에 몇 년 동안 글도 악착같이 배우고 오늘 비상금까지 털어서 새 팬도 샀는걸. (아, 철자가 팬이 아니라 펜이던가?)

아무튼, 그럼 시작할게.

로마노프 32년 X월 X일. 기절할 뻔했던 날.

안녕, 코코. 내 이름은 달리아야.

슈트레커 저택에서 일한지 올해로 3년 차가 됐어. 이 정도면 제법 유능한 하녀가 아닐까?

현재 주인님이신 슈트레커 자작님은 내 3번째 주인님이셔.

겉으론 무뚝뚝하고 냉정한 것 같아 보여도, 속으론 사소한 일에도 엄청 전전긍긍해 하시지.

마음은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아냐구?

난 알 수 있어. 내가 그렇거든.

내가 비록 항상 무표정이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겉으론 냉기가 쌩쌩 불어도 속만큼은 뜨거운 여름이라고.

입이 근질근질하고, 가끔은 참기 힘들 때도 있지만 애써 꾹 눌러.

전에 일하던 저택에서 입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호되게 맞고 쫓겨난 적이 있거든. 그래서 어쩔 수가 없게 됐어.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들어도 안 들리는 척 하랬는데 내가 그걸 못했어.

그때 주인마님의 외도 사실을 백작님께 몰래 귀띔해 드렸다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맞았었지.

심지어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났지 뭐야.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그 날 부러진 발목이 시큰거린다니까.

아무튼, 지금은 괜찮아.

말했다시피 우리 주인님께선 석상 같아 보여도 굉장히 말랑말랑한 마시멜로 같은 분이시거든.

근데 오늘은 왜 저렇게 인상을 쓰고 계시냐고?

그건… 아가씨가 자정이 가까워졌는데도 들어오시지 않아서야.

며칠 전부터 자꾸만 광장에 나가시더니, 오늘도 기어코 가신 것 같아. 주인님께서 아마 엄청 노심초사하고 계실걸.

참, 아가씨 소개를 빠뜨릴 뻔했네.

메이블린 아가씨라고, 내가 전담 하녀로 있는 아가씨야.

너한테만 솔직하게 말해주자면, 내가 이 저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해.

사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가씨께 별 생각은 없었어. 그냥 모셔야할 어린 귀족영애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감정만 있었지.

근데 몇 달 전부턴가. 아가씨께서 좀 이상해지셨어. 아니,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성인식까지 치르고 나니 많이 심란하셨던 모양이야.

산더미처럼 서적을 쌓아두고 방에 틀어박히는 대신 밖을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아가씨도 자작님을 똑닮아 무뚝뚝한 도련님들과 다를 바 없었는데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어.

마치 시들어가던 꽃이 살아나는 것처럼.

가끔 이유모를 행동들을 하시긴 하지만, 나는 옛날의 아가씨보다 지금의 아가씨가 더 좋아.

옛날의 아가씨는, 뭐랄까… 꼭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인형 같았거든. 지금은 그 인형이 비로소 사람이 된 것 같달까.

물론 오늘 아침엔 상당히 충격을 받긴 했지만.

글쎄 아가씨를 깨우려고 들어갔는데, 벌써 깨어있으신 거야.

그것만으로도 정말 놀랐거든? 근데 문을 연 순간은 정말이지…….

아가씨께서 물구나무를 서계시더라고!

난 기겁하지 않기 위해 정말 노력했어. 오죽하면 콱 깨문 입술이 퉁퉁 부었다고.

근데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단 거야. 오히려 시작이었지.

너 사람이 뒤집어져서 기어 다니는 걸 본 적 있니?

아, 종잇장이라 보진 못하겠구나. 아무튼.

어릴 적 여름 축제날 봤던 공포 연극보다 더 무서웠어.

분명 산뜻한 아침인데도,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니까.

물론 그 다음은 웃음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지만.

아, 고문이 따로 없어 정말!

여기서 끝나면 좋았겠지.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활기찬 아침이구나, 하고 넘겼을 거야.

하지만 슬프게도, 아직 더 남았어.

하…. 평생 화장품은커녕 향수조차도 가까이하신 적 없는 아가씨께서 직접 화장을 한다고 나설 때부터 말렸어야했는데.

아가씨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었던 나는 결국 열어선 안 될 상자를 열어버렸고, 그 참상을 똑똑히 마주했지.

아, 지금도 그 모습만 떠올리면 졸도할 것 같아.

그건… 그건…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어. 분명 똑같은 화장품, 똑같은 옷인데 살면서 본적도 없는 심해어가 떠오르더라니까.

어쩌면 아가씨께선 내가 웃음을 참다가 배가 터져서 죽는 걸 원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매일 매일이 즐거워. 어느 집 하녀가 이렇게 유쾌하게 살 수 있을까?

항상 지긋지긋할 만큼 똑같은 업무의 반복이 일상인데.

나는 이 일상이 너무 소중해져 버렸어.

전처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유지해야 돼.

로마노프 32년 X월 X일. 엄청난 기념일.

코코!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야!

아가씨가 왕궁 행정시험에서 1등을 하셨어!

거기다 왕세자 저하의 직속 사무관으로 들어가신대!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아가씨는 정말 정말 똑똑하시고, 재치 있으시고, 능력 있으신 분이거든.

솔직히 왕국에서 제일가는 신랑감인 에스카로트 공작이나 세자저하께서 청혼한다 해도 난 부족하다고 생각해.

밖에서 이 말을 하면 미친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난 정말 그런 걸 어떡해.

내 눈엔 우리 아가씨가 최고인걸.

로마노프 32년 X월 X일. 결코 잊을 수 없는 날.

세상에, 코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넌 꿈도 못 꿀 거야. 아니, 길 가던 사람 붙잡고 얘기해줘도 다들 그 무슨 허풍이냐고 놀릴걸.

오늘 비가 하루 종일 내렸던 건 알지?

평소라면 이깟 빨랫감 정도는 거뜬하게 들고 옮겼을 텐데, 발목이 너무 시려서 낑낑대며 난간을 오르고 있었어.

왜, 예전에 주인마님의 외도 사실을 알렸다가 죽도록 맞았던 날. 그 때 부러진 발목이 비만 오면 시큰거리다고 했었잖아.

근데 때마침 아가씨께서 맞은편에서 걸어오시는 거야. 나는 재빨리 구겼던 표정을 풀고 태연스럽게 지나갔지.

아니, 지나가려고 했어. 아가씨께서 붙잡지만 않으셨더라면.

아가씨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전 저택에서 겪었던 일 때문에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드냐고 책망하실까 봐 무서웠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는데, 발목이 점점 시원해지는 거야.

와, 정말.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니까?

눈을 뜨니까 아가씨께서 쭈그리고 앉아서 내 발목에 손을 대고 계셨어.

우리 아가씨께선 두뇌도 명석하시지만 마법 실력도 엄청 뛰어나시거든. 그 뛰어난 치유마법으로 내 발목을 치료해주셨지.

귀족 아가씨께서 한낱 하녀의 발목을 말이야!

이젠 비가 와도 발목이 안 아파. 신기하지?

참, 그리고 이거 말하면 더 뻥쟁이라고 놀릴 텐데 그래도 말할래.

아가씨가 발목 치료해준 다음엔 내 빨랫감까지 나눠들어줬다? 사람한테도 후광이 보일 수 있단 걸 그 때 알았어.

만약 에임에 신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면, 분명 아가씨를 닮았겠지.

난 아마 오늘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로마노프 33년 X월 X일. 가을장마가 끝나지 않는 날.

코코. 비가 많이 와.

발목은 안 아파. 근데 가슴이 너무 아파.

더 이상 내게 윽박지르는 주인마님도, 틈만 나면 손부터 쳐올리던 빡빡한 하녀장도, 졸도할 만큼 고된 일도 없는데 너무 아파.

아가씨가 죽었대. 더 이상 없대.

믿겨져? 아가씨가 죽었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잘 모르겠어. 그동안 열심히 글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못 알아듣겠어.

어쩌면 전부 꿈이 아닐까?

한숨 자고 나면 깨어날 거야. 그렇겠지?

그래야만 해.

로마노프 34년 X월 X일. 아가씨가 보고 싶은 날.

코코…. 아가씨가 너무 보고 싶어…….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아는데… 너무 보고 싶어. 어떡해?

나 아직도 아가씨방 청소를 해. 침구도 매일 새 걸로 갈고, 커튼에 쌓인 먼지도 털고, 더 이상 건드릴 것도 없는 책장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

이러면 꼭 아가씨가 돌아올 것만 같아서, 미련한 짓이란 걸 아는데도 멈출 수가 없어.

자작님은 이런 내 행동을 보고도 아무 말씀 안 하셔.

자작님도 기다리고 계신가 봐.

……맞아.

실은 저택 사람들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

부디 이 괴로운 잔상이, 현실이 되기를.

하지만 그런 현실은 없어. 나도 알아.

자작님도, 세 도련님들도, 아가씨를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도 다 알아.

그래서 어쩌면 우린 꿈속에서 살고 있나봐.

불가능한 걸 자꾸만 바라니까.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생각나는 걸 어떡해. 난 아가씨가 날 치료해주던 계단참을 지날 때조차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매번 노력해야 하는걸.

아가씨가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

로마노프 35년 X월 X일. 그저 그런 날.

요즘은 괜찮게 지내고 있어.

평범하게 일도 하고, 가끔은 친구들이랑 차도 마시고 휴가를 받으면 놀러도 가고 그래.

비어있는 자리가 가슴 아프긴 하지만, 이젠 괜찮아.

아가씨가 점점 흐릿해져가. 희미하다고 표현해야 하나?

여전히 아가씨의 방청소를 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그래야만 한다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기분으로 해. 아니면 3년 내내 이어져온 습관이라던가.

나는 아가씨를 잊고 싶은 걸까?

아직 기억하고 싶은 걸까?

잘 모르겠어.

로마노프 36년 X월 X일. 아침 햇살이 눈부신 날.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꿨어.

웬 번개가 번쩍거리더니, 곧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뭐야.

아침 일찍 평소처럼 아가씨 방 청소를 하려고 들어가니까 화분에 노란 꽃이 펴있긴 했어.

이게 좋은 일이란 걸까? 미하일 도련님에게 보여드리니 엄청 화색을 띠시던데.

뭐, 꽃향기가 나쁘진 않더라고. 그래서 그냥… 어?

아래층이 소란스럽네. 무슨 일이 생겼나봐.

이만 가볼게, 안녕.

코코. 기적이란 게 이런 걸까?
글씨가 심하게 삐뚤빼뚤해도 이해해줘. 손이 너무 떨려서 그래.
나는 오늘, 비로소 꿈에서 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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