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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92)화 (92/185)

#92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에임 왕국 끝자락의 작은 여관이었다.

란슬롯과 대략 회포를 풀고서, 나는 오랫동안 물을 묻히지 못해 버석거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다들 지쳤으니까, 하룻밤만 여기서 쉬고 가죠. 몸도 씻고, 옷도 좀 갈아입고.”

몇 날 며칠을 밖에서 노숙했더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쉬지 않고 날고 달렸던 실버와 하일은 그 피로도가 나보다 더할 것이었다.

정말 피곤했는지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들과 내가 번갈아 씻는 동안 란슬롯은 갈아입을 옷과 굶주린 배를 채울 음식을 좀 가져왔다.

배가 상당히 고팠던 지라 우리는 정신없이 음식을 욱여넣었다. 해골물을 줘도 치맥의 맥주보다 더 끝내주게 시원하게 들이킬 수 있었다.

막 닥치는 대로 빵을 뜯어먹는데, 실버가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보는 눈이 없어서 편하게 늑대의 모습으로 있는 상태였다.

‘저게… 뭐지? 저런 음식은 못 봤는데.’

실버는 커다란 앞발로 뼈다귀 같은 것을 쥐고서 개껌 마냥 연신 우물거렸다.

삼키지도 않는 걸 얼마나 열심히 빠는지, 다른 음식도 다 마다한 채였다.

“실버, 그게 뭐예요? 지금 먹고 있는 거.”

내 물음에 답해주기 위해 실버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모른다. 그저 맛있는 냄새가 나서. 물고 있으면 왠지 힘이 더 솟는 거 같다.”

“어디서 났어요? 란슬롯이 가져온 음식 중엔 안 보이는데.”

“지하도에서 탈출할 때 챙겼다. 너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발견했지.”

실버가 아무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할 수 있다 해도, 그는 기본적으로 늑대 신수였다.

아무래도 개과 특유의 본성이 튀어나온 듯했다. 숲길을 지나쳐 오는 중에도 그는 종종 땅에 코를 박고 킁킁대곤 했다.

‘저 개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동안 지니고 있었는데도 탈이 없는 걸 보면, 이젠 완전히 그만의 프레셔스가 된 모양이지.’

나는 푸근한 미소를 얼굴 한가득 머금은 채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란슬롯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아, 잘 먹었다. 고마워요, 란슬롯.”

“아닙니다. 무사히 오신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란슬롯은 그저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술병까지 집어삼킬 태세로 꿀꺽꿀꺽 술을 들이키던 하일이 란슬롯을 척 가리켰다.

“너… 옛날에 우리가 알던 허여멀건한 놈 닮은 게, 마음에 들어. 에임에 돌아가면 우리 집 와. 실버가 진수성찬을 차려 줄 거야.”

“하일. 제안은 네가 하고 요리는 왜 내가 하나.”

“그야 네가 잘하니까. 그럼 내가 해?”

“……아니다.”

둘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를 들으니, 정말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에임에 도착하면 실버와 하일은 콜린을 만나고, 예전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는 거겠지?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가고, 하일은 그만 오라고 성을 내면서도 부엌의자에 날 앉히고, 그러면 실버가 만든 따끈한 수프를 내오고……. 그 풍경엔 이제 란슬롯도 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정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또 다른 길의 새로운 시작에 서있긴 하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이 벅차오름을 만끽하고 싶었다.

“다들 수고했어요. 날 믿고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도리어 세 사람이 당연한 듯 앞 다투어 답했다.

“새삼스럽게, 뭘.”

“너야말로 우릴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줘서 고맙다.”

“아가씨는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아가씨의 길에 기꺼이 동참할 겁니다.”

‘으아아, 면전에 대고 그런 말 하지 마요. 나 이런 거 면역 없어서 부끄럽다구.’

하여간, 바보 같을 만큼 맹목적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쑥스러움에 붉어지려는 낯빛을 숨기기 위해 이만 어서 자자고 재촉했다.

기실 그렇지 않아도 배도 불렀겠다, 슬슬 졸음이 밀려온 참이었다.

방을 치우고 각자 몸을 뉘인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사위는 고요해졌다.

란슬롯은 하일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넙죽넙죽 받아 마신 통에 벌써 뻗어버렸고, 하일 역시 거나하게 취해 코를 골며 자는 중이었다.

실버는 기꺼이 내 침대를 자처해줬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배가 이제 완전히 안전하다는 안정감을 주었다.

나도 실버의 푹신푹신한 털 속을 파고들며 잠에 들 준비를 했다.

그러던 찰나에, 옆방에서 서너 사람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 방음 안 돼.’

아까 쓰레기를 치우다 본 행색도 그렇고, 억양도 그렇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인가 보았다.

그들의 회포는 이제 시작인지 얇은 벽 너머로 말소리가 퍽 또렷하게 넘어왔다.

“게일, 오랜만이야. 서대륙은 잘 돌고 왔나?”

“풍랑이 안 좋아 좀 걱정했지만, 나름 괜찮았어. 그보다 에임은 아직도 그 난리라며?”

“그 작은 왕국이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래, 에임이 왜?

나는 시끄러워하던 것도 잊고 슬그머니 벽 쪽으로 다가갔다.

“몇 해 전에 왕세자의 약혼녀였던 영애가 죽었잖나.”

“그 소식은 나도 아네. 왕세자가 그 후로 두문불출한지도 꽤 되었다지.”

“그래. 그 영애의 가문 사람들과 에스카로트 공작도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고. 한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마탑주라네.”

뭐야, 루치펠은 또 왜?

이제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다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날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준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 그들의 소식이 이런 것일 줄은 몰랐는데.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나는 어서 대화가 이어지길 기다리며 아예 벽에 바짝 붙었다.

“마탑주? 마탑은 바깥일에 관심이 없지 않았나?”

“그게, 다들 마탑주가 누군지는 알지? 루치펠 럭스.”

“그럼, 근래 들어 대륙 곳곳에서 대폭발이 몇 번이나 일어났는데. 모를 수가 있나.”

“크흠, 흠. 바로 그 폭발들 말이네.”

누군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이라도 되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물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메이블린이 듣는지라, 나는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다, 그 약혼녀의 죽음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

푸웁-!

연노란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나는 남자들의 대화를 안주삼아 레모네이드를 홀짝대던 참이었다.

“크르릉….”

졸지에 느닷없이 레모네이드 샤워를 당한 실버가 잠에서 깨 뒤척였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눈으로 욕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 미안합니다.’

하지만 안 뿜을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코끼리가 뒤집어져서 코로 걸어 다니는 걸 봤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까?

그만큼 남자의 말은 생뚱맞았다.

‘내가 죽은 게 뭐 대단하다고 루치펠이 폭발을 일으키겠어. 그냥 심심풀이로나 그랬겠지.’

어이없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얘기를 듣던 사내 하나가 혀를 쯧쯧 찼다.

“에이, 이 양반도 참. 세상일에 그리도 초연한 사내가 작은 왕국의 여인 하나 때문에 미치다니? 더구나 왕세자의 약혼녀였던 여인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정말이네. 그 작자가 미치기 시작한 날짜가 약혼녀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흠, 아무리 그래도 탑주씩이나 되는 자가 그럴 리가 없잖은가.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테지.”

“쩝, 그런가? 하긴, ‘그’ 탑주가 사랑을 한다는 건 상상도 안 가긴 해.”

그래, 이 아저씨야. 루치펠이 사랑꾼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살인이라면 몰라도.”

“뭣이라고?!”

엄마야.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근데, 살인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물론 베인 목 뎅겅 사건을 겪은 당사자로서 할 말은 아닌데, 최애를 까도 내가 깐다고 이 아저씨들아…!

나는 벽에 대고 씩씩거렸다.

“저기요,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뭐야,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

“애가 아무리 인성 좀 파탄 났고, 예의는 홀랑 말아먹었고, 내일 없는 놈 마냥 막나가긴 하지만! 그 정돈 아니거든요?”

“감싸는 거야 욕하는 거야 뭐야?”

“몰라, 돌려 까나 보지. 거,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하게 됐수다. 밤도 늦었는데 이만 잡시다. 방금 얘기는 서로 못 들은 걸로 하고.”

옆방 사내들은 졸지에 날 지능 안티로 만들어버리고선 멀어졌다.

나만 쓸쓸하게 벽을 붙들고 남아있었다. 나는 괜히 속상해서 더 구시렁거렸다.

“그럼 안 된다고, 안 그럴 거라고, 나랑 약속도 했다고…. 아저씨들이 뭘 알아…….”

애가 알고 보면 얼마나 착한데….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은 사람인데.’

갑자기 울적해지려던 찰나 옆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실버가 대체 잠 안 자고 시끄럽게 뭐하냐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또 깬 모양이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나는 설설 사과하며 다시 자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얼마 못가 실버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메이블린.”

그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실버의 머리는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아앗, 제발 그거 내가 만들었다고 하지 마요…….

“내 머리를 쥐어뜯어 가발이라도 만들 셈인가.”

살살 다독인다고 했는데, 속이 심란해서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보다.

나는 마지막으로-부디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 그에게 사과하며 일어났다.

잠자기는 글렀으니, 가볍게 여관 앞이라도 걸을 요량이었다. 계속 안에 있어봤자 피곤한 사람들 잠만 깨울 것 같았다.

그런 나를 실버가 느닷없이 붙잡았다.

“이거 받아라.”

내 손에는 어느새 스크롤이 쥐어져 있었다.

도착지는, 다름 아닌 마탑.

“이게 무슨…….”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혹 네가 이럴 때를 대비해 가지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내색하는 법이 없어 줄 기회가 없었지만.”

“실버…….”

마음이 약해질까 봐 내가 가져온 스크롤은 전부 폐기했었다.

여태 그런 줄 알았는데, 실버가 몰래 몇 개 빼돌렸던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갔다 오고 싶으면 갔다 와라. 네 끙끙대는 양을 밤새 보느니, 그게 더 낫겠다. 돌아오는 스크롤은 란슬롯 것이 있으니 그걸 쓰고.”

나는 물끄러미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까슬까슬한 종이의 감촉이 낯설었다.

텔레포트에 아직 익숙하지 않던 시절, 루치펠이 언제든 마탑에 오라고 줬던 스크롤.

나는 입술을 꾹 짓씹었다.

제국에 있는 동안은 괜히 속을 난잡하게 만들기 싫어 참았다지만, 이젠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보고 싶었다.

실버도 이런 내 마음을 읽은 건지 되레 날 떠밀었다.

“어서 가라. 너무 늦지는 말고. 하일과 란슬롯이 깨면 골치 아파지니까.”

“…고마워요, 실버.”

“사족이 길다.”

“그럼… 잠깐만 부탁할게요.”

그는 한차례 손을 내젓고는 다시 늑대로 변해 잠자리를 잡았다.

실버에게서 돌아선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후우.

심장이 쿵쿵 떨렸다. 3년 만이었다.

그리움과 간절함을 꾹꾹 눌러 담아 버텨온, 3년.

‘너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면 3년 전 모습 그대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유랑민들의 말대로 나를 그리워했을까?

지금, 답을 찾으러 간다.

나는 스크롤을 주욱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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