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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91)화 (91/185)

#91

‘마물이 대체 왜 여기에… 그것도 이렇게 떼로?’

의문스러운 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거대한 철창이 다닥다닥 붙어 난 길의 초입에는, 한 남자가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 매달려 있었다.

“히익.”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상당한 고문에 시달린 듯했다.

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찢긴 천 조각 사이엔 매질 자국이 그득했고, 머리부터 뺨을 따라 질질 흐른 피는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숨이 붙었는지, 이미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광경이었다.

나는 도주 중이었던 것도 잊고 가까이 다가갔다.

창살은 일반 철창과는 다르게 그 간격이 넓어서, 나 정도 등치의 사람은 그냥 통과할 수 있을 만한 너비였다.

대신에 그 사이로 희미한 결계가 느껴졌다.

‘하긴, 이렇게까지 꼭꼭 숨겨놨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해놓지 않을 리가 없지.’

나는 튕겨져 나올 각오를 한 채 한 팔을 쑥 집어넣었다.

그런데.

‘뭐야, 왜 아무 반응이 없어?’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쉽게 몸이 쑥 들어가졌다.

어디 한 군데가 절단되거나, 터진다던가 하는 일도 없었다.

멀쩡함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남자를 살폈다.

그의 두 손은 수갑이 채워진 채 사슬로 결박되어 있었는데, 사슬에서 희미한 스파크가 일었다.

신성력과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른 힘이었다.

좀 더 촘촘하고,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인 듯한…….

방금 결계를 통과할 때도 느꼈던 힘.

콕 집어 그게 무엇이라고 말할 순 없었지만 이 남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어 두는 원인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으윽…….”

내 목소리에 푹 수그려있던 고개가 조금 움찔거렸다.

자세히 보니 특이하게도 뭔가가 머리에 붙어있었다.

강제로 잘린 흔적이 남은, 단단한 그루터기 같은 것.

곧 남자의 잇새로 조그만 중얼거림이 새나왔다.

“아버지…….”

“네? 아버지요?”

설마 황제가 자식을 숨겨두고 이리도 학대한 건가?

“황제를 말하는 거예요?”

“아가레스……”

아무래도 남자가 아버지라고 일컬은 사람의 이름이 아가레스인 모양인데, 황제의 이름은 아가레스가 아니었다.

‘어쩐다.’

치유마법을 쓰면 더 또렷한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칫 치료해줬다가 우리가 이곳을 통해 빠져나갔단 걸 제국에서 알아채는 것만큼 낭패도 없었다. 시간도 촉박했고.

아픈 이를 눈앞에 두고도 떠나야만 하는 게 마음에 걸려, 나는 그를 마지막으로 재촉했다.

나중에라도 구할 수 있었으면 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줄 수 있어요? 그래야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나는… 아가레스의…….”

힘겹게 색색거리던 남자의 고개가 푸욱 꺾였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나를 찾는 하일과 실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블린! 어디 있나!”

“트랩에 걸렸는데 혼자 처리하고 있는 거 아니지? 뭐라고 신호라도 좀 보내봐!”

남자가 안타까웠으나 일단 내 살길이 더 급했다.

나는 이만 철창을 빠져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저 여기 있어요!”

겁먹은 듯했던 하일과 실버의 표정이 날 발견하자마자 풀어졌다. 그리곤 매서운 타박이 쏟아졌다.

“너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면 어떡해! 걱정했잖아!”

“아니, 그게…….”

“아무래도 안 되겠군.”

“뭐가 안 돼… 꺄악!”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떴다. 실버가 포대자루 매듯 날 들쳐 업었다.

내려달라고 주먹으로 팍팍 쳤지만 당연하게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말랑말랑한-실버의 표현으로- 인간의 솜주먹이 콘크리트 같은 신수의 근육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주먹만 더럽게 아팠다. 벽에 내려쳐도 이것보단 덜 아플 정도였다.

“잘했어, 실버.”

실버가 하는 양을 본 하일은 말리기는커녕 짤막한 칭찬과 함께 앞장서서 다시 달렸다.

나는 별수 없이 착실한 내비게이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블록 후 왼쪽, 그 다음 우측 하단에 있는 트랩 피해서 오른쪽, 그 다음엔… 끝이네요.”

신수들의 인외적인 속도 덕분에 통로는 빠르게 출구에 다다랐다. 멀리서 환한 빛이 흘러들었다.

마침내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커다란 늑대로 변한 실버를 타고 달렸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산이나 숲을 타다가, 밤이 되면 하일의 등에 올라타 하늘을 날았다.

그러던 찰나에, 반가운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누군가의 강력한 의지로 ‘블로킹’이 뚫립니다!]

[‘세계의 잠금장치’가 해금되었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강하게 인식됩니다.]

[당신은 ‘잊히지 않는 관종’입니다.]

더불어 잠겼던 스킬들도 다시 전부 풀렸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돌아왔으니 잘되었다.

나는 곧바로 가장 필요했던 것을 발동시켰다.

[스킬 ‘재능의 축복(Lv.2)’이 발동됩니다!]

[3분간 ‘루치펠 럭스’의 재능을 축복받습니다.]

좋아, 이제 루치펠 버프 좀 받아볼까.

“하일, 제가 신호하면 인간화 해주세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는 없고, 좋은 소식이에요. 텔레포트를 할 거거든요. 실버는 내 손 꽉 잡아요.”

나는 그의 손을 끌어다 잡고 힘을 주었다. 뜬금없는 텔레포트 소식에 실버의 눈썹이 휘었다.

“리미터가 없는 상태에서는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피곤해서 에임까지는 못하지만, 란슬롯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까지는 갈 수 있을 거예요.”

“무리하는 거면 괜찮다. 더군다나 힘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텔레포트하면 몸이 어떻게 찢어질지 모른다고 했잖나.”

내가 일전에 한 말이 있어서인지 퍽 의심스러워하는 어조였다. 하지만 나는 걱정 말라는 식으로 씩 웃기만 했다.

그도 그럴게,

‘지상 최강의 마법사로 빙의한 상태니까.’

“자 그럼 갑니다. 하나, 둘….”

“잠깐…!”

“셋!”

실버가 다급하게 날 말렸지만, 그가 말을 마쳤을 땐 이미 란슬롯 앞이었다.

철푸닥, 쿵, 쿵. 우리는 실버를 선두로 차례차례 천장에서 떨어졌다.

실버가 빵, 하일이 패티, 내가 양상추.

이윽고 부스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란슬롯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무사히 오셔서 다행입니다!”

란슬롯은 기어이 완벽한 햄버거를 완성시키고 싶었는지, 맨 위의 빵을 자처하며 달려들었다.

* * *

“이디스. 잠깐 이리 와봐.”

루치펠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온 이디스를 계단참에서 벤이 붙잡았다.

“탑주님 말이야… 또 멍 때리셔?”

“네. 요즘 들어 부쩍 그러시네요. 많이 나아지신 줄 알았는데.”

둘은 속닥거리며 루치펠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래 들어 루치펠은 불러도 답이 늦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몰히 하는지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아무래도 저러시는 게… 저번에 제국 축제에 다녀오신 이후부터인 거 같아. 그 때 뭐 별일 없었어?”

“글쎄요…. 연회장에선 코빼기도 안 보이셔서 모르겠어요. 딱히 누굴 만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럼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물론 폐인 같았던 옛날보다야 좋긴 하다만.”

“그러니까요, 그게 어디예요. 우리는 그저 우리 할 일만 열심히 하자고요.”

“하긴, 실의에 빠지시느니 몽상에 빠지시는 게 백 배 낫지.”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마탑은커녕 자신조차 돌보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제 주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정상적으로 먹고, 말하고,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벤은 그것이 메이블린에 대한 망각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거란 걸 알았다. 그렇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어렵사리 되찾은 일상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신 역시 그녀에 대해 거의 잊고 사는 중이었다.

이디스가 아주 가끔, 옆에서 그 이름을 꺼내지 않는 이상 먼저 떠오르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루치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뭐지?”

이디스가 놓고 간 보고서를 훑던 중, 펜을 찾기 위해 더듬거리던 손가락에 뭔가가 걸려 툭 떨어졌다.

푸른 마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목걸이가 왜 여기에… 아, 메이블린이 남기고 간 거지.’

루치펠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걸이를 치웠다.

한때 그토록 아팠던 사람이 이젠 소소한 추억이 되었다.

너무도 괴로워서 하루하루 버텨내는 게 고작이었던 날들이, 대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하찮게 느껴졌다.

그렇게 넘기려던 찰나.

기묘한 감각이 본능적으로 전신을 스쳤다.

‘내가… 잠깐이나마 그걸 잊었다고? 그녀를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인데?’

이상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아무리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지만 그녀는 결코 작은 한 조각이라도 잊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이 상황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직 잊고 싶지 않은 거죠?”

축제에서 만난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물음은 지난 며칠 동안, 끈질기게도 그를 괴롭혔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치솟아서,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그 물음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답을 찾으면, 더 이상 적어도 떠오르진 않겠지 하고.

하지만 그 반대였다.

기어이 해답을 낸 순간부터, 루치펠은 더욱 지독한 혼돈에 휩싸였다.

‘아직 잊고 싶지 않은 거냐고?’

그래, 잊고 싶지 않다.

아니, 절대 못 잊는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루치펠은 메이블린을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내가… 널 그리는 것을 노력해야 하는 날이 오다니.”

차라리 기억을 잃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던 그녀였다.

그랬던 사람이 단박에 떠오르지 않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벌써 그 목소리가 어땠는지,

환하게 웃던 표정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눈으로 자길 바라봤었는지,

가까이 올 때면 무슨 향기가 났었는지.

전부 희미했다.

더불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일 년 전부터 노골적으로 느끼곤 했던, 불가사의한 힘.

루치펠은 더 이상 그 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제 머릿속을 휘젓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왜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의도적으로 관심을 끊어야 해?

왜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면 안 돼?

왜 내게서, 메이블린을 앗아가려 해?

‘싫어. 그런 건 싫어.’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어본 적 없는, 결코 그럴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말이 기어코 튀어나왔다.

“나는 메이블린이 좋아.”

자각한 순간 터져 나온 본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짙고 명확했다.

더 이상 그녀가 곁에 없다 해도, 그녀 외의 다른 사람은 평생 동안 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에게 있어 연인은, 메이블린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누군가를 친구나 동료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

루치펠 럭스가, 메이블린 슈트레커를 좋아한다는 진심.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

그는 잊고 안락을 찾기보다 괴로워도 기억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쩌저적-!

무언가가 사정없이 깨지는 소리가 온정신을 지배했다.

그와 함께 메이블린을 억누르던 무형의 힘이 한순간에 거두어졌다.

어두운 먹구름이 가린 듯 흐렸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그녀가 더욱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많이 사랑했나봐.”

더 선명하게,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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