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90)화 (90/185)

#90

가이즈는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메이블린을 밀어붙였다.

“그래… 네 년일 줄 알았다. 용케도 우릴 속였구나.”

“별거 아니었어. 다들 허술하기 짝이 없어가지고.”

“곧 그 숨통을 끊어줄 터이니 어디 맘대로 지껄여 보아라.”

“윽…!”

메이블린이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벽으로 밀쳐진 탓에 부딪친 등이 통증을 호소했다.

두 손목 역시 옴짝달싹 못하게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벽에 박제되다시피 눌린 상태였다.

아주 으스러뜨릴 작정으로 힘을 준 것인지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인상을 쓰는 대신 웃었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기꺼이 웃을 수 있을 만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왜 웃는 거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가이즈는 붙든 손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목이 바스라지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메이블린의 올라간 입꼬리는 더욱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티딕, 틱.

손목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가이즈의 억센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간 메이블린의 팔찌에서 새는 스파크였다.

‘이게 뭐지?’

옛적에 채운 봉인구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메이블린의 코어에선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니, 봉인구가 손상되진 않았다.

더구나 봉인구는 그를 풀 수 있는 특정 열쇠가 필요했고, 그 열쇠조차도 이미 소멸된 후였다.

가이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마법도 못 쓰는 상태면서 뭐가 그리도 여유로운…….”

콰앙!

가이즈의 말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멀리서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3년 전 에임에서 메이블린을 죽이기 위해 나섰던 신관들이 경비로 서고 있는 이스트 궁 쪽이었다.

‘믿고 있는 구석이 저것이었나.’

하일의 흑염을 본 가이즈가 조소를 터뜨렸다.

“신수들을 어지간히도 제대로 구슬린 모양이군. 복수 좀 하겠다고 저리도 날뛰는 걸 보면.”

“그러게, 있을 때 잘해주지 그랬어. 얼마나 박대하고 괴롭혔으면 죽자 살자 달려들겠냐고.”

“닥쳐라.”

“너희들 스스로,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거야.”

살기를 품은 두 시선이 호각을 이루며 오갔다.

이윽고 가이즈의 입매가 비틀렸다.

“기세 좋게 말은 잘한다만, 신수들을 강제로 인간화 시키는 주술쯤은 진즉에 완성했다. 평범한 사내와 여인을 억지로 가둬두는 건 일도 아냐.”

“끝까지 악질적이네.”

“그게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더럽고 잔인하더라도, 최후에 웃을 수 있는 자는 네가 아닌 나인 것처럼. 안타깝지만 너의 욕망은 부질없는 꿈이 되겠구나.”

콰앙! 조금 전보다 더 큰 불기둥이 치솟았다.

실버와 하일이 눈을 속일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거센 폭음에 가이즈의 신경이 찰나 흐트러졌다.

메이블린은 느슨해진 틈을 타 손목을 들었다가, 벽에 더 거세게 처박았다.

“누구의 욕망이 꿈이 될지는, 해봐야 알지.”

빠각. 금이 가다 못해 완전히 부서진 팔찌가 발치로 툭 떨어졌다.

마력을 억제하던 리미터가, 해제되었다.

댐이 무너지듯 억눌려있던 마력이 급속도로 터져 나오고. 그를 감당하지 못한 봉인구가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푸른빛이 넘실대며 메이블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소란에는 화끈한 폭발이 제격인데, 알아?”

가이즈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에 없던 엄청난 세기의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의 여자에게.

“단단히 미쳤군. 자살이라도 할 셈인가?”

“널 죽일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거대한 마법진이 창공에 떠올랐다. 가히 하늘을 가릴 만한 크기였다.

가이즈는 그 기세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야만 했다.

“자칫하면 신수들도 죽을 거다. 소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주술이 진행된 모양이야. 그들이 죽길 원하나?”

저 정도 크기의 마법진이라면, 이스트 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죽음에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운 좋게 가까스로 몇 놈들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평범한 인간의 몸이 된 신수들은 죽을 것이다.

‘이 여자에게 신수들이 소중한 존재라면, 제 손으로 죽이는 멍청한 짓은 못할 테지.’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가이즈는 생각했다.

한데.

“말했잖아.”

여자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해답을 던졌다.

“너희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우린 죽음도 불사할거라고. 줄곧 이 날만을 고대해 왔어.”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을 한 손으로 떠받치고서, 메이블린은 잠시 이스트 궁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실버와 하일은 주의를 돌리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고.

‘진짜는, 내 쪽이다.’

신수들이 벌인 소동으로 그들을 잡기 위한 신관들을 제외하고는 다 대피했을 테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신호탄을 쏘아 올리듯 하늘을 향하던 팔이 획을 그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지대한 폭발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메이블린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와하하하! 다 터져라! 전부 다 터져버려! 코끼리도 냉장고에 넣는다는 대학원생의 한을 맛봐라!”

콰쾅!!

“다음은 불철주야 카페인 꽂고 사는 헬조선 직장인의 비애다!”

쿠콰쾅!!

두서없는, 그야말로 난장 그 자체인 폭발이었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급류가 역류하듯, 거침없는 힘.

가이즈는 재빨리 결계를 치고 동태를 살폈다.

보아하니 마력은 넘쳐나도 제대로 조절할 줄은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앞서 경고했던 방식으로.

푸곽!

눈앞에서 여자가 터져 나갔다. 그 잔해를 미처 두 눈에 담기도 전에 광대한 화염이 그녀를 휩쓸어 갔다.

그리곤 연이어 귀청을 강타하는 굉음.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부서지고, 끝내 먼지가 되어 흩날릴 때까지.

폭발은 계속되었다.

* * *

“빌어먹을…!”

가이즈는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이스트 궁으로 향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테러가 드디어 멈췄다.

폭발은 잠잠해졌다고는 하나, 그 뒤처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피해의 규모를 확인해야만 했다.

개중에서도 가장 먼저 알아봐야 하는 것은,

“신룡과 늑대 신수는 어찌 되었느냐!”

신수들의 생사였다.

올 겨울에 벌어질 전쟁을 위해선 그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제국의 위세를 보여주고자 함에 있어 그들만큼 효과적인 패는 없었다.

한데 그들이 있어야 할 이스트 궁은, 매캐한 연기와 처참하게 우그러진 건물 흉곽만이 남아있었다.

가이즈는 화상을 입어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감싼 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그 때, 멀리서 그레이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뛰어왔다.

“가이즈님!”

“생존자는 얼마나 되나.”

“전부… 전부 즉사했습니다.”

“신수들도 죽었다는 말이냐?”

“그것이… 거세게 저항하기에 강제로 인간화 시키는 주술을 걸었습니다. 막 잡으려던 찰나,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에 휩쓸려서…….”

으드득. 꽉 악문 가이즈의 턱이 새하얗게 질렸다.

최악의 가정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 간사한 여자는, 목숨까지 버려가며 제국에 기어이 큰 흉을 남기고야 만 것이다.

“가이즈님. 괜찮으십니까? 피가…….”

“비켜라.”

그레이가 가이즈의 화상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폈지만 차갑게 밀쳐졌다.

절뚝거리는 그레이를 뒤로 하고서 가이즈는 피가 흥건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입 안이 썼다. 복수하고 싶어도 그 대상은 이미 죽어버렸다.

승자가 존재하지 않는 패배는, 죽을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 *

나는 숨이 가빠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신나게 달렸다.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폭발 때문에 이따금 다리가 휘청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드디어 안녕이야!’

나는 리미터 없인 마력을 조절할 수 없었고, 그를 원했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무자비하게 쓸어내리기만을.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 폭격 속에선, 도저히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끔. 아주 잔악하게 퍼부었다.

망자를 좇는 어리석은 추격자는 없다.

죽음으로써 벗어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주는 수밖에.

‘정확히는 죽은 척 좀 해준 거지만.’

조금 전 가이즈가 보았던 내 죽음은 환영이었다.

근래 들어 날 의심하는 눈초리가 짙어지기에, 혹여 들키는 날이 올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것이었다.

이미 한 번 속았는데, 또 속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눈앞에서 완전히 죽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가 본 게 환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실존하는 모습을 바꿀 순 있어도, 없는 형체를 만들어 내는 마법은 여태껏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내 특기였다.

술식을 짜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긴 했으나, 결국 나는 해냈다.

지금 이 순간, 왜 하필 수학과에 갔냐고 욕을 한 바가지로 부었던 과거의 나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메이블린!”

“여기예요!”

멀리서 실버와 하일이 날 발견하고 뛰어왔다.

란슬롯은 탈출 인원을 줄이고자 이틀 전에 미리 제국을 빠져나갔다. 아마 지금쯤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앞에 다다르자마자 실버가 그을음이 묻은 꼬질꼬질한 얼굴로 날 살폈다.

“메이. 괜찮나?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실버랑 하일은요? 괜찮아요?”

“덕분에.”

하일의 전신에는 검은 비늘이 촘촘히 돋아있었다.

인간화를 막는 마도구의 도움으로, 그녀는 어떠한 화염에도 끄떡없는 갑옷을 두를 수 있었다.

실버도 그녀의 도움을 받아 무사한 것 같고.

“일단 여길 빠져나가죠.”

나는 둘을 이끌고 능숙하게 비밀 통로로 이끌었다. 지키는 순찰병은 없었다.

‘에드먼드가 잘 치워준 모양이네.’

자기만 믿으라고 하더니,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입구는 정말 깔끔했다.

덕분에 우리는 아무런 제재도 없이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꺾어요! 두 번째 블록 밟지 않도록 조심하고요!”

나는 외운 지도 내용을 상기시키며 신수들을 선두로 뒤에서 지시하며 달렸다.

내가 앞장서겠다고 했지만 즉각 거절당했다.

혹여라도 실수로 트랩을 맞닥뜨렸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트랩이 뭐가 됐든 간에, 말랑말랑한 내 몸뚱이보다는 단단한 드래곤의 외피가 더 멀쩡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삼분의 일 정도나 왔을까.

-크르르…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알기로, 실버와 하일은 신수의 모습인 상태에서도 저런 음산한 울음은 내뱉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가 저런 소리를 내는 거지?’

지하도 순찰을 설 때마다 이따금 들렸던 비명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 소리를 따라 근원으로 향했다.

한창 지도를 만들 때도, 흘려보냈던 신성력이 거대한 무언가에 막혀 튕겨져 나왔던 부근이었다.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울음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사나워졌으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른 나는 기함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캬악! 컹컹! 크르르…!

수십, 수백 마리의 검은 덩어리들이 철창 안에 떼로 갇혀있었다.

그것들은 나를 보자마자 더 격렬하게 짖어댔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도, 개도 아닌.

마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