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88)화 (88/185)

#88

“…….”

허를 찔린 듯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리도 멀쑥한 사람이 미련퉁이가 되어서는 이별 앞에 절절매는 모습이라니. 초면임에도 퍽 안쓰러웠다.

꼭 비를 맞으며 웅크리고 있는 강아지 같아, 나는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당신이 정말로 잊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겠는데, 아니라면. 그냥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잊을지 말지 정도는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잖아요?”

“내가… 그래도, 될까.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내가 볼 때 당신은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걸 더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요.”

“정말 그렇게 보여?”

“뭐, 제 말이 당신을 뒤흔들 지표로 작용해선 안 되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러네요.”

석상처럼 우두커니 있던 남자는 내 말을 부정할 것처럼 굴다가, 이내 힘겹게 마른세수를 했다.

“…헛된 바람이라는 걸 아는데, 다시 만나고 싶어. 언제고 웃으면서 돌아올 것만 같아. 어딜 가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거든.”

“약속을, 했다고요…….”

연인이 그래도 매몰차게 차버리고 돌아서진 않았던 모양이다. 저런 약속까지 하고 떠난 걸 보면.

누군진 몰라도, 흡사 내 상황과 비슷했다.

‘그래서 생판 처음 보는 남자랑 이토록 오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거리낌이 없는 거겠지. 은연중에 느껴지는 동질감 때문에.’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던 찰나.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더 말동무를 해주고 싶었지만 이젠 정말로 가봐야 했다. 너무 늦으면 가이즈나 동료 신관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나는 대화를 차차 마무리해갔다.

“만약 상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거라면,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물론 전 절대 잊을 생각이 없지만요, 아무튼. 드디어 만나러가요. 내일만 지나면 다 만날 수 있어요.”

“잘됐네.”

“그러니까 당신도 포기하지 마요. 언젠가 선물처럼 나타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제가 그 사람이 아니라 확답은 못하겠지만, 만약 나라면 당신 같은 사람을 놓치진 않을 거예요.”

저렇게나 절절하게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하는 양반이다. 곁에 있었을 땐 더 잘해줬을 거다.

처음 보는 나도 아는 사실인데, 그 연인은 더 잘 알았겠지.

그럼에도 떠나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을 테고.

‘부디 오래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묘한 동질감을 떨쳐내기 위해 부러 개운하게 웃었다.

“그럼 참견은 여기까지만 하고. 전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

막 떠나려는 나를 남자가 붙잡았다. 고즈넉한 어둠 속에서도 번져나가는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게 익숙지 않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나긋한 어조로 조곤 거렸다.

“조언해줘서 고마워. 만약 내가 그 사람을 먼저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랑 더 얘기를 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별 말씀을. 행운을 빌어요.”

난 진심을 담아 그가 행복하길 빌어주었다.

당신도, 나도. 다 잘 될 거예요.

* * *

‘하… 좀 잘 되게 냅두면 엉덩이에 뾰루지라도 나냐, 망할 운세야.’

이 새벽에 고함이라도 지르며 복도를 질주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치솟았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왜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리질 않는지.

“실비아.”

조용하게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뒤에서 날아오는 한 마디에 우뚝 멈춰 섰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오, 망할. 저 인간은 왜 아직도 안자고 있는 건데.’

나무토막 같은 뻣뻣한 동작으로 몸을 돌리니 가이즈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위압감을 풍기며 서있었다.

다만 그 눈빛만은 평소와 달랐다.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다.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천천히, 날 훑었다.

새벽 공기 때문인지 유난히 시리게 느껴지는 눈이었다.

이윽고 얼어붙은 시선이 내 목덜미에 머무름과 동시에, 지옥문처럼 그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항상 그 목걸이를 차고 다니는구나.”

그야 이건 실비아의 모습으로 바꿔주는 마도구고.

“그 팔찌도.”

이건 당신들이 채웠던 봉인구니까.

이 외에도 루치펠이 일전에 준 리미터까지 합하면 난 총 세 개의 마도구를 항상 차고 다녔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제국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철저하게 실비아여야만 했다.

마력이라곤 한 톨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실비아.

봉인구는 코어를 막아 마법을 실행시키는 걸 억제했고, 리미터는 일반 마법사들보다 양이 훨씬 많은 내 마력을 억눌러 줬다.

리미터만 찼다면 마력이 조금은 새어나가 들켰을 텐데.

에임에서 날 죽이려고 고맙게도 봉인구를 채워준 덕분에, 깔끔하게 신분세탁을 할 수 있었다.

‘근데 항상 긴 로브를 걸치고 다녀서 겉으로 보였던 적은 별로 없었지 않나?’

날 주시해오기라도 한 건지 가이즈는 거침없이 의문을 표했다.

“며칠 전 오늘을 위해 드레스와 함께 장신구도 줬었다. 왜 드레스만 입고 장신구는 착용하지 않았지?”

“그게… 평소에 하고 다니던 것들이 편해서요.”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좀 화려하게 꾸미고 싶었을 텐데. 그러라고 준 것이 아니냐.”

“아유, 저한테 그런 건 과분하죠. 너무 화려해서 어울리지도 않았어요.”

“네가 한때 가지고 싶어서 안달 냈던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그걸 다 마다하다니, 별일이구나.”

제길. 실비아는 단 것은 싫어하면서 보석은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아오, 좋아할 거면 나처럼 둘 다 좋아하지! 왜 하나만 좋아해서! 날 헷갈리게 해!

진땀이 등골을 더듬으며 삐질삐질 흘렀다. 나는 그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

“하하… 물욕을 버리니 몸이 가볍더라구요. 보석도 좋지만, 외양보단 인간미를 좀 더 가꾸고 싶어졌지 뭐예요…….”

“…….”

“일종의 정신적 다이어트랄까요… 혹은 살을 비우는 것보단 마음을 비우는 게 진리라는 깨달음을 얻었달까요…. 가이즈님도 해보실래요? 완전 효과 짱인데. 하하, 하.”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놓는 와중에도 날 살피는 가이즈의 눈초리는 거두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마른 침만 연신 삼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여기서 걸리면 답도 없었다. 시스템도 비활성화 돼있는 상태라 죽어도 회귀를 못했다.

새로운 관종 시스템이 열리려면 적어도 아침이 되어야 했다.

‘내일이면 드디어 다 쫑낼 수 있는데. 제발 좀 그냥 넘어가자, 이 새끼야.’

지금 날 보내주면 넌 내일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내가 특급으로 보내줄 거라고! 익스프레스 천당열차! 1등석 예약, 오케이?

다행히 내 간절한 마음의 소리를-순화시킨 버전으로- 듣기라도 한 건지 가이즈가 고개를 돌렸다.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쉬어라.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축제 준비로 다시 바빠질 테니.”

나를 지나쳐간 구둣발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휴우, 살았다. 안도의 숨을 내쉰 나는 누구와 더 마주칠세라 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 * *

대망의 축제 둘째 날이 밝았다.

나는 아직도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새벽에 가이즈를 마주쳤던 지점을 지나갈 땐 괜스레 가슴이 섬짓해졌다.

‘…진짜 위험했었지.’

만약 들켰더라면… 으, 상상하기도 싫었다. 지난 몇 년의 생고생이 수포로 돌아간다니.

그것만큼 끔찍한 악몽은 없었다.

나는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어깨를 두드리며 예배당으로 향했다.

원래는 전날 교황 호위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아침기도에 빠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이즈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덜려면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구석 자리에 착석한 나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밤새 잠을 설친 탓인지 졸음이 조금 몰려왔다.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 졸진 못할 텐데…….

‘미쳤어, 미쳤어. 정신 차리자. 졸면 안 돼.’

나는 졸음을 떨치기 위해 입 안쪽 살을 씹었다.

그러나 몇 분 전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몸은 어느새 의지를 반하고 눈꺼풀을 꿈벅이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에서 눈을 뜨기 전, 제우가 침대 위로 날 눕혔을 때처럼.

배터리 수명이 다 된 조명마냥 눈 앞 풍경이 깜박였다. 불안정한 시야 사이로 제단 중앙에 위치한 조각상이 보였다.

제국을 수호하는 신, 모로스를 빚어낸 조각상.

이노아드는 신에 대한 믿음이 강력한 국가였다.

신이 버린 나라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신의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는 에임과는 달리.

덕분에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도, 큰 천재지변이 닥칠 때도, 하물며 나라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도.

이곳 사람들은 전부 신부터 찾았다. 그것이 교황 세력이 이토록 커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간절하게 빌면, 응답을 종종 주기도 했다던데.’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나는 이노아드의 국민도 아닐뿐더러,

‘이곳에 깽판을 놓으러 온 내게 이노아드의 신인 모로스가 답을 줄 리가.’

그렇다고 비는 척이라도 하고 있던 기도를 멈출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주변엔 보는 눈들이 있었고, 성실한 신관을 연기해야만 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잠시 모았던 두 손을 풀고 귀를 후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나.]

신성하다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 음성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공간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파드득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사위가 환한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도 싹 사라졌다.

세상엔 오로지 목소리의 주인과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를 해칠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아이인지도 모를 음성이었다.

선득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었다.

‘뭐, 뭐야. 선잠에라도 든 건가?’

그러기엔 모든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를 깨우쳐주기라도 하듯 목소리는 계속해서 오감을 두드렸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처음엔 걱정 많이 했다. 이젠 더 이상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지만.]

직장 상사 같은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지만 제법 부드럽고 따듯한 음성이었다.

문득 이 영문 모를 공간에 떨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한 대상이 모로스였다는 게 떠올랐다.

모로스는 인간들의 기도에 종종 응답을 주는 신이었고.

‘설마… 나 신이랑 대화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이 순간 머릿속을 가득 지배하는, 본능적인 사고는 하나뿐이었다.

음성의 주인이 모로스라는 것.

‘허… 이렇게나 불온하고 나태한 신자한테 신이 찾아왔다고? 자기 나라에 깽판 놓고 갈 애한테?’

진짜? 정말? 이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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