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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85)화 (85/185)

#85

에드먼드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정복과 전쟁에 미쳐있는 상태라고 했다.

대륙을 통일하고 싶어 하는 야욕을 이따금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곤 했다면서.

덧붙여 신녀는 곁에서 그걸 살살 긁어주는데 도가 튼 자라고도 했다.

황제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군사력을 증진하는데 총력을 가했고, 올해 겨울이 오면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차근차근 시작해 나갈 거라는 게 구린내 삼인방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대의 왕국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이상하게 신녀가 유독 에임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에드먼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리 황제와 거짓 신탁을 고한 신녀를 증오한다지만, 그는 제국사람이었다.

이노아드에 뿌리가 있고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

이노아드의 사정을 이리도 낱낱이 얘기했다간 되레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가 증오하는 것은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사람들이지, 나라가 아닐 테니까.

“저기… 중간에 말 끊어서 죄송한데요.”

“뭔가?”

“그… 이런 극비를 함부로 제게 발설해도 되는 거예요? 제가 만약 이 정보를 주변국들에게 흘리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글쎄, 그럼 나야 좋을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무슨…….”

설마.

퍼뜩 떠오른 추측에 입이 다물렸다.

만약, 그가 원하는 것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면?

그저 황제를 죽이고 싶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다시 입술을 열었을 때는, 평범한 제국민 앞에서라면 절대 해선 안 될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 이노아드의 몰락을 원하는군요.”

“그래.”

명쾌한 해답이었는지 에드먼드의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졌다.

“황제가 손에 넣고자 바득바득 우겼던 것을,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것을 빼앗을 거다. 그리고 무너뜨릴 거다. 이노아드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야.”

이, 이 싸람이 미쳤나…!

나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들었더라면 당장에 반역죄로 목이 뎅겅 썰리고도 남을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까진 황궁 구석에 갇혀 지내는 신세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야. 그대를 만났잖아.”

“…저를 믿으세요?”

“그대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아.”

아무래도 진짜 미친 게 분명했다.

코딱지만 한 왕국으로 코끼리 같은 제국을 먹으라니.

“에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나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노아드의 십분의 일도 안 돼요. 계란으로 바위를 쪼개는 게 더 가능성이 있겠어요.”

“하지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잖나. 얘기를 듣자하니, 마탑과 연이 있는 마법사라며. 그 고고한 마탑이 그대의 편이 되어줄지 어떻게 아나?”

이 양반이 듣자듣자 하니까 아주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왜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이 고생 중인데.’

내 사람들에겐 절대 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외로워도 슬퍼도 꾸역꾸역 버텨냈다.

더군다나 루치펠만큼은 더욱 내 일에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중립의 아이콘인 마탑이 털끝만큼이라도 감정에 따라 기우는 날엔, 온 대륙의 화살이 그에게 쏠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탑은 끌어들이지 않을 거예요.”

“어찌됐든 대책은 있다는 거군.”

단호한 내 일갈에도 에드먼드는 눈을 접어 생긋 웃었다.

그새 내 목소리 기저에 깔린 저의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능구렁이 같은 인간.’

그래, 맞다.

내가 누구냐. 관심 받지 못하는 관종부터 시작해 끈질긴 관종을 거쳐, 현재 사랑받는 관종에까지 다다른 불굴의 메이블린이다.

원하지 않아도 계란으로 바위 치게 생겼는데, 대책이 없을 리가.

다만 아직 많은 변수를 다 파악하지 못했고, 확신할 수도 없는 터라 에임으로 돌아갈 때까진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시스템 상 오직 나만이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나는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 * *

에드먼드와 헤어진 나는 곧바로 란슬롯을 찾아갔다.

그에게도 내가 간밤에 겪은 모든 일을 알려줬다.

에드먼드와 나눈 얘기까지도, 전부.

란슬롯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역시… 폐단의 시작은 아마 현 교황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으면서였을 겁니다. 그 후부터 많은 신탁들이 제국민들의 이익과는 반하는 쪽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요. 언제나 그의 통치에 유리하게끔 내려지곤 했죠.”

교황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기 시작한 때라면, 아직 신녀가 등장하지 않은 시기였다.

더불어 란슬롯이 그의 부친을 잃은 시기이기도 했고.

“그 땐 신녀가 나타나기 전이었잖아요. 누가 신탁을 받았었는데요?”

“……교황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아니, 이놈들의 구린내 역사는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야?

이젠 곰팡이라고 불러줘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럼…신탁을 위조한 것이 신녀뿐만이 아니라…….”

다음으로 꺼낼 말은 그에게 있어 퍽 힘들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라, 나는 조심스럽게 서두를 열었다.

“란슬롯의 아버지… 신탁에 반발했다가 처형당하셨다고 했죠. 그 때의 신탁도, 거짓이었다는 거네요. 란슬롯과 란슬롯의 아버지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기 위한.”

“교황이 아버지를 모함해서 일을 벌였을 거라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신탁에까지 손댔을 줄은 미처…….”

꽉 쥔 란슬롯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턱이 하얗게 물들도록 꽉 악문 이는, 아마 모든 진실을 알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오는 것일 테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복수를 원하는 마음을 알지만, 지금의 우리로서는 교황을 대적할 수 없어요.”

“……압니다.”

란슬롯이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제국에 있는 우리는 실버와 하일을 합해 겨우 넷이었고, 상대는 황제, 신녀와 손잡은 제국의 교황이었다.

탈출하기 전 암습으로라도 처리할까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고, 경비도 삼엄해서 위험부담이 컸다.

지금 이 상태에서 교황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자살시도나 마찬가지였다.

‘살을 취하자고 뼈를 내줄 순 없는 노릇이지. 그런다고 해서 교황이 란슬롯한테 용서를 빌지도 미지수고.’

하지만.

“그렇다고 기회가 영영 없는 건 아니에요. 없으면 만들면 돼요.”

“……예?”

“그새 잊었어요? 이젠 둘이니 쉽게 부러지진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 기회, 반드시 만들어줄게요.”

“어떻게… 말입니까?”

란슬롯은 어느새 피가 나도록 물었던 입술을 떼고 동그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여유롭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이쯤에서 제가 물어봐야 할 타이밍이네요.”

“무엇을…….”

“란슬롯, 저 믿어요?”

그가 답지 않게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이 질문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이었다.

자신은 한낱 작은 신전의 사제일 뿐인데, 믿을 수 있겠냐고.

란슬롯도 그 날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그리고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믿습니다. 완벽하게.”

그 때의 나는, 지금의 그와 완벽하게 똑같은 답을 해주었었다.

* * *

“탑주니임~ 계세요~?”

“……들어와.”

휴. 이디스는 가슴을 한차례 쓸어내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루치펠은 책상에 앉아 의뢰 보고서들을 검토 중이었다.

날카롭고 퇴폐적인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한층 밝아진 모습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더니.

탑의 마법사들에겐 정말 감사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다 놓아버리고 산 송장마냥 평생을 살 줄 알았던 제 주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느리지만 천천히 생기를 되찾고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따금 스트레스 푼답시고 여기저기 뻥뻥 터뜨리시긴 하지만, 이게 어디야.’

이디스는 사상자가 없다는 것에 감사하며 쾌활한 낯으로 용무를 꺼냈다.

“곧 이노아드에서 대대적인 축제가 시작되는 건 아시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용건만 간단히, 하고 덧붙여온 말에 이디스는 괜스레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 제가 이번에 한 공작부인 호위를 맡아서 황궁 연회에 참가하는데요, 탑주님도 같이 가실래요? 오랜만에 바깥바람도 좀 쐬시고, 기분전환도 하시고.”

“난 됐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이미 연회 참석 명단에 탑주님 이름도 올렸단 말이에요.”

“너…!”

“물론 가명으로요. 그래도 꺼림칙하시면 외양정도는 쉽게 바꿀 수 있잖아요. 저도 그럴 예정이거든요. 사람들 들러붙는 일도 없을 거예요, 네? 그냥 즐기다 오시기만 하면 돼요.”

이디스는 루치펠이 더 성을 내기 전에 빠르게 멀어졌다. 이미 왼쪽 다리는 문 밖에 걸친 채였다.

“아무튼, 그런 걸로 알고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쌩하니 사라졌다.

“저게 진짜…!”

열을 내던 루치펠은 곧 옅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서류에서 잠시 눈을 돌리고 뻑뻑한 고개를 젖혔다. 보드라운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따스한 온기를 타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상념이 피어올랐다.

‘얼마나 됐더라…….’

메이블린 슈트레커가 죽은 지, 어느덧 3년 째였다.

헤어지는 연인들마다, 이별을 한 사람들마다 숱하게 말했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자신이 겪은 무엇이든 세상의 명제에 끼워 맞추고픈 법이 없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메이블린 슈트레커의 존재는 차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흔적을 발견해도 더 이상 옛날만큼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제 머릿속에 들어와 잔뜩 헤집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지워지는 느낌.

점점 빛바래지는 기억.

그러나 그 느낌은 그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미묘하고 또 미세한 것이라, 그는 그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겼다.

‘축제라…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

이런 식으로라도 당장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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