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인연 혹은 악연
#84
나는 기쁨에 겨워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지하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막 궁을 나가려던 찰나.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낯익은 실루엣이 종종걸음으로 슥 지나갔다.
‘누구지?’
나는 바로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폈다. 수상한 실루엣은 내가 아는 이였다.
일 년에 한두 번, 특별한 연례행사가 있을 때만 먼발치에서.
그것도 항상 베일로 얼굴을 가린 모습만 봤던 여자.
‘신녀가 이 시간에, 그것도 황궁까지 웬일로?’
나는 구린내를 좇는 개처럼 그녀의 뒤를 몰래 밟았다.
굽어진 몇 개의 골목과 좁은 복도를 지나고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문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몸을 낮추며 문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미세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문틈에 귀를 갖다 대니 안의 상황을 볼 수는 없어도 소리는 대략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란슬롯이 준 신성력으로 청각을 극대화시켰다.
가장 먼저 들리는 건, 굵고 낮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을 약속한지 세 달이 지났다.”
“폐하,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이건 교황의 목소리인데?’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총 세 사람의 것이었다.
신녀는 방금 들어가는 걸 봤고, 아는 목소리 하나는 교황의 것이고. 나머지 한 명은 교황이 폐하라고 부르는 걸 봐서 황제라는 소린데.
신녀, 교황, 황제.
‘구린내 삼종세트가 다 모였잖아.’
나는 귀를 더욱 바싹 붙였다.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하느냐.”
“겨울이 오기 전까지 마쳐놓도록 하죠.”
“지금까지도 충분히 시간을 주지 않았느냐. 겨울까지 마치지 못하면…….”
“폐하.”
“…….”
잠시 대화가 끊겼다.
황제는 뭘 부탁한 거고, 신녀는 대체 뭘 마치겠다는 거지?
고민을 더 이어갈 새도 없이 모두가 숨죽인 사이로 신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제가 맡은 일이, 잘못된 적이 있었습니까? 이 내가, 틀린 적이 있었느냔 말입니다.”
“물론 내 그대를 믿지만…….”
“그대의 청으로 정통성도 없는 당신을, 받지도 않은 신탁을 앞세워 그 자리까지 올려줬습니다. 그런데도 고작 계절 하나를 기다리지 못하시겠단 겁니까?”
뭐? 신탁을 위조했어? 누구보다도 공명정대해야 하는 신녀가?
‘이거, 구린내가 아니라 아주 썩은내였고만.’
황제는 켕기는 게 많은지 신녀 앞에 변변찮은 대응도 하지 못했다.
“…내 말이 경솔했네.”
“신녀님 또한 폐하를 위하는 마음에 언성이 높아진 것일 뿐이니 무례를 용서하소서.”
“그럼 그렇게 알고 가겠네. 부탁하지.”
교황의 중재로 밀회는 끝났다. 곧 황제가 문가로 다가왔다.
신녀와 교황사이에서도 더 이상 말소리가 오가지 않는 것이, 다 같이 나올 참인 듯했다.
으아아, 숨을 곳, 숨을 곳!
구린내고 썩은 내고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하는 판이었다. 나는 구멍을 찾는 미어캣처럼 주위를 빠르게 스캔했다.
그런데.
‘망할!’
하필이면 긴 복도 한가운데였다. 아무리 전속력으로 달린다 한들 구린내 무리들이 나올 때까지 복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기척을 숨기고 뛸 자신도 없었고.
저벅저벅.
묵직한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매우 수상해 보이겠지만- 순찰을 마치고 돌아가다 길을 잃은 신관 실비아를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식은땀을 비 오듯 쏟으며 최대한 복도 끝으로 뒷걸음질 치던 때.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느닷없이 손이 뻗쳐 나왔다.
“읍…!”
“조용.”
커다란 손이 내 입을 단번에 틀어막았다.
고개를 드니 뒤에서 날 결박하듯 끌어안은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입모양으로 작게 쉿, 소리를 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내 입을 막은 손을 풀어주었다.
이윽고 세 사람의 발소리가 전부 사라지고. 사위가 완벽하게 조용해졌다.
나는 남자의 품에서 나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어… 유명인사신가 봐요. 근데 제가 유행에 좀 둔해서…….”
안 그래도 넓은 제국, 황궁에만 거주하는 사람이 몇인데.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그가 뭐 황가의 핏줄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굳이 알 필요도….
“유폐된 것이 타격이 좀 크긴 했군.”
……유폐?
“뭐, 상관없네. 지금부터 알면 되니까.”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이런 상황에조차 능글거리는 말투, 태양 아래 찬란하게 빛날 것이 분명한 백금발과 금안.
불현듯 생각나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슬란…?”
남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 떨렸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슬란 레오 러셀바드?”
남자가 더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참 이상한 아가씨군. 나는 모르면서, 내 조상의 이름은 안다? 그것도 삼백 년 전 사람을?”
“조상이라면… 당신이 아슬란의 후손이란 말이에요?”
“꼭 그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알다마다. 그의 유년시절이 어땠고, 누굴 사랑했고, 어떻게 제국의 황제가 됐는지까지 전부 읽었는데.
그렇다고 당신의 조상이 로맨스 소설에서 남조1이었어요, 라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재빨리 핑계거리를 쥐어짜냈다.
“그게… 그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은 적이 있어서요. 유명하신 분이시잖아요. 아무튼 실례해서 죄송했습니다, 태자 전하.”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반갑게 마주하며 매달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애정하던 소설 속 인물의 자취를 직접 겪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난 최소한의 인간관계만을 추구해야했다.
그래서 대충 고마움을 표하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고 도망가려고 했더니만.
“정말 유행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지는 모양이야.”
“……네?”
“나는 더 이상 황태자가 아니야.”
남자는 뜬금없는 아웃팅으로 날 붙잡았다.
“하지만 아슬란의 후손이시잖아요. 그는 분명….”
“그래, 황제였지. 하지만 러셀바드의 피가 흐른다고 나까지 그 길이 보장된 건 아니잖나?”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그는 자신이 유폐되었다고 했다.
구린내 삼인방 뒤를 따라붙어 엿들은 대화에서 신녀 역시 정통성도 없는 자를 제위에 올려줬다고 했고.
“그럼 현 황제는…….”
“신녀가 받은 신탁에 의하면 그가 제위에 올라야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룬다는군. 애꿎은 자리싸움에 피 흘리기 싫어서 난 일찌감치 물러났지.”
“원래 당신의 자리였는데, 분하지 않으세요?”
“덕분에 내 머리는 이렇게 멀쩡히 목에 붙어 있잖나. 감시를 목적으로 황궁에 거의 붙잡혀 지내는 신세긴 하다만, 살아있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어쩐지, 아슬란의 후손에게서 그렇게 썩을 대로 썩은 인물이 나온 게 이상하다 싶었다.
황제는 위조신탁의 가장 큰 수혜자고, 신녀는 장본인이고, 교황은 묵인으로 가담한 자였다.
이 셋은 신탁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여태껏 제국의 권력을 나눠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탈출계획과 신수 가족, 교황청 일에 집중하느라 복잡한 궁 내 사정 같은 건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근데 이리도 치열한 혈투가 있었을 줄이야.’
입술을 잘근거리며 골몰한 생각에 잠겨있는 내게 그가 느긋한 시선을 내렸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뭘 그렇게 엿듣고 싶어서 도둑고양이 행세를 한 건가?”
“…제가 말씀드려야 할 의무가 있나요?”
“의무는 없지만, 난 적어도 아가씨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난 우리가 꽤 잘 맞는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저들에게 더 큰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유폐된 생활로 눈칫밥 먹으며 살아서 그런지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정이 아무리 안타깝다고 해도 내 코가 석자였다. 가능한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나보다 더한 증오심에 잠긴 목소리로, 날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예?”
“저들은 내 어미와, 아비와, 동생을 죽였어. 다 죽은 와중에 나 혼자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
“살려달라고 고개를 조아리고 빌빌 기어서? 아니. 본보기이기 때문이야. 누구든 자신의 자리를 넘보면 가차 없이 쳐내겠다는, 나처럼 만들겠다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못한 본보기. 그게 나다.”
애써 억눌러도 격한 분노로 타오르는 저 눈. 너무나도 잘 알 수밖에 없는 눈이었다.
나 역시 그런 눈으로 교황과 신관들을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니까.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을 무너뜨리고 싶은 게 내 심정이야. 그러니 말해봐. 이제 아가씨 차례야. 아가씨는 왜 저들을 증오하게 된 건지.”
나는 흉흉한 인광이 이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느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이곳에서, 그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나와주세요, 궁예!’
나는 스킬창을 열었다.
[스킬 ‘관심법(Lv.3)’이 발동됩니다.]
[30초간 ‘에드먼드 다윈 러셀바드’의 생각을 3문장 관심(觀心)합니다.]
머릿속으로 속삭이듯 그의 속내가 흘러들어왔다.
에드먼드가 여태 내게 쏟아낸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나와 동일한 대상을 향해 짙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같은 배를 탔다면야.’
나는 곧장 그의 소매를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죠. 할 얘기가 무척 기니까.”
* * *
우리는 중앙 궁에서 벗어나 가장 외진 곳에 도착했다. 혹시 몰라 신성력으로 결계도 쳐두었다.
사람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 나는 내 진짜 정체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간의 사정을 대략 얘기했다.
시스템에 관한 것은 어차피 말해도 못 믿을 테니 제외하고.
이놈이 변심하는 거 같으면 죽고 회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죽는 거 그까짓 거, 처음 한두 번이 어렵지 이젠 없어선 안 될 치트키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에드먼드는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어서인지 내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주었다.
회귀할 필요는 없어진 것 같은데…. 문득 의문점이 하나 떠올랐다.
“근데, 아까 신녀와 황제가 얘기했던 걸 조금 들었거든요. 겨울까지 뭘 준비하겠느니 마느니 하던데. 뭔지 알아요?”
“아, 그거라면… 전쟁을 말하는 걸 테다.”
“……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진 단어. 전쟁.
놀란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여상한 낯으로 고개만 지그시 끄덕였다.
설마….
그제야 한구석에 밀어두었던, 미심쩍은 가정 하나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아무리 공허를 막는데 급급했다지만 제국에 실력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내가 제국에서 겪은 자들만 봐도 그랬다.
철저하게 훈련된 황궁 정예 기사들은 물론이고 가이즈를 비롯한 교황청 소속 신관들까지. 충분히 공허를 수습할 수 있는 무력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신수들을 찾아다녔다.
신수들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을 일으킬 작정이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