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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82)화 (82/185)

#82

“뭣…!”

명백한 조롱조에 남자의 관자놀이가 벌건 핏발로 물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의식한 모양인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웠다.

“큼, 큼.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이 근방에서 저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드실 겁니다.”

어우우, 끈덕진 놈.

하도 평가를 원하는 것 같기에 나는 꼼꼼히 그의 얼굴을 뜯어봐 주었다.

내 시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확실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조금 느끼하긴 했어도 퍽 잘생긴 용모긴 했다.

하지만 내 시력이 몇이냐. 지난 몇 년을 내사얼 1순위 슈트레커 가족들과 칼리안, 루치펠, 클라인만 보고 살며 날마다 개안을 거듭했던 안목이다. 쉽게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이를 모르는 남자의 으쓱이는 어깨는 뽕이라도 넣은 건지 의심될 정도로 치솟아 있었다.

‘에잉, 귀찮아서 대충 넘어가려 했더니만.’

그 어처구니없는 환상을 좀 깨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는 무심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러네요.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남자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압니다. 잘생겼다는 거.”

“못생겼어요.”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남자는 귀에 벌레라도 들어간 표정으로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뭐, 준수하다고는 해줄게요. 근데 막 그렇게 으스댈 정도는 아니에요.”

‘너랑 사귀느니 루치펠 발톱하고 사귀고 말지.’

남자는 내가 선언한 문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곧 떽떽거리는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으, 귀 아파.

“너, 너 내가 누군 줄 알긴 알아? 터버 프로그라고 프로그! 내가 이 지방 영주의 장남이야! 너 같은 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사람이라고!”

“그래서 안 쳐다보겠다는데 왜 자꾸 제 앞에 알짱거리세요.”

“완전 미친 여자군!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삿대질 하는 남자가 짜증나 막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무슨 문제 있나?”

정중하면서도 기저에 깔린 위압감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

언제 온 것인지 실버가 나를 보호하듯 남자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올 걸 그랬군.”

실버의 찬란한 은발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남자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아니면 신생아로 빙의라도 한 건지 못 알아들을 옹알이만 내뱉었다.

“어, 어어…….”

후후, 어때. 얼굴에서 샤방샤방 빛이 나지? 너랑은 차원이 다르지?

실버의 옆에 나란히 선 나는 두 손을 들어 그의 턱 밑을 받치는 자세를 취했다.

“이런 게 진짜 자체발광이죠. 당신이 하는 건….”

나는 그의 전신을 주욱 훑다가, 픽 실소를 터뜨렸다.

“그냥 발광이고.”

뭐 더 재볼 것도 없이 압승이었다.

이미 실버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한데, 뒤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하일과 란슬롯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늦장 부리지 말고 빨리 와. 먹다 만 건 저 놈 간식하라고 놔두고.”

늘씬한 흑발 미녀와 고아한 분위기의 미남.

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린 남자를 향해 샐샐 눈웃음을 날려주었다.

봐라,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일행 있다고 했잖아요.”

“이, 이이…!”

자기반성하란 의미로 지나쳐가며 속삭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좀 많이, 부족하다는 거. 알겠죠? 그럼 전 이만.”

세상은 넓고 미인은 많단다, 우물 안 개구리야.

나는 하일과 실버의 팔에 하나씩 팔짱을 끼고 신나게 뛰었다.

* * *

“다들 잘 지냈어요?”

“너는 어째 얼굴이 더 좋아졌다.”

“에이, 잘 먹고 잘 자야 칼도 더 잘 벼르죠.”

“잘하셨습니다, 아가씨.”

하일이 제 타박을 받아친 란슬롯을 쏘아봤지만 그는 꿋꿋이 잘했다며 내 편을 들어주었다.

헤헤, 란슬롯은 이미 내 광신도라니까.

그에게 감사의 의미로 찡긋 윙크를 날려준 나는 오는 길에 봐두었던 가게로 일행들을 이끌었다.

“일단 이동하죠.”

하일과 실버, 란슬롯과 나.

이렇게 넷은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나 계획과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게에 들어간 우리는 가장 안쪽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펍 느낌의 주점은 아직 낮이라 한산했다.

“야, 너는 참…….”

대낮부터 럼주를 벌컥 들이킨 하일이 볼멘소리를 냈다. 조금 전에 만난 버턴지 개구린지 하는 놈이 여간 짜증났던 모양이었다.

“그런 개구리 새끼는 그냥 무시하지 뭘 굳이 밟아줘. 혹 시끄럽게 난동이라도 피우면 어쩌려고.”

“제가 아는데, 그런 놈들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소란 못 피워요. 보아하니 자기 외모에 퍽 자긍심이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인간이었어요. 절대 말 못하죠.”

이런 얼굴들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고는.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탁자에 빙 둘러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하, 힐링된다. 진정한 꽃밭이란 이런 거구나. 좌, 우, 정면 어딜 봐도 빛이 나네.

“뭐야, 왜 자꾸 보는 건데. 실비아 얼굴이라 재수 없어.”

“메이. 입은 다무는 게 좋겠다. 침이 떨어지겠어.”

“씁, 히히.”

헤실헤실 웃는 나를 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기 전에 나는 냉큼 화제를 바꿨다.

“참, 콜린은 잘 지내고 있대요?”

지금은 사정상 인간아이의 모습으로 켈른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지만, 콜린은 기본적으로 신수였다.

하일과 실버는 말할 것도 없었고.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동물들을 통해서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교황청 놈들도 하일과 실버의 집에 새 몇 마리가 머물렀다 가는지 까진 알지 못했으므로 퍽 훌륭한 소식통이었다.

다행히도 콜린은 별 탈 없이 지내는 모양이었다.

실버와 하일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그래. 키도 많이 커서 아마 자길 보면 못 알아볼 수도 있을 거라더군.”

신수들의 성장 속도는 인간들보다 배로 빨랐다. 지금쯤이면 벌써 사춘기를 겪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춘기 겪는 콜린이라니. 으으, 빨리 보고 싶다.

“생활하는 데 뭐 불편한 건 없대요? 켈른이 박대하고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주 지극정성이래. 다만….”

혹시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엄마랑 아빠랑 떨어져 있어서 외로워한다던가?

“다만 뭐요?”

“켈른이 자기 좀 그만 껴안았으면 좋겠대. 이제 애도 아닌데 자꾸 애처럼 안으려 해서 뿔이 저절로 튀어나오려고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나.”

하일이 못 말린다는 듯 푸슬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켈른 이 양반, 나도 못하는 부둥부둥을 하다니!

‘처음 콜린을 맡겼을 땐 그리도 떨떠름해 하더니만, 아주 팔불출이 다 된 모양이네.’

에임에서 지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착잡해졌다. 나도 덩달아 럼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애써 잊으려고 했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나는 날엔 모든 걸 관두고 돌아가 버릴까봐 겁나서.

하지만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비오는 날이면 꼭 그날의 악몽을 꿨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모두 죽고, 세상이 온통 핏빛으로 물드는 꿈.

그래서 더욱 돌아갈 수 없었다.

제국에게 에임 같이 작은 왕국을 짓밟는 건 일도 아닐 테고, 그보다 더 작은 나와 내 사람들을 죽이는 건 더 쉬울 테니까.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를 눈치 챈 란슬롯이 내 등을 말없이 쓸어주었다.

‘모든 걸 아는 나조차도 이런데, 그들은 더하겠지. 지금은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 툭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나는 부디 그럴 수 있기만을 빌었다.

만고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이겨내야만 했다.

나는 이미 예정된 여정에 발을 올렸고, 이제 반이나 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금방 갈게요.’

* * *

“나가.”

“……탑주님.”

“나가라고. 내 말 안 들려?”

살얼음판을 걷는 듯 살벌한 음성이 이디스를 날카롭게 찔렀다.

그녀가 보고 있는 남자는 더 이상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산들바람에도 가볍게 살랑거리던 검은 머리칼은 잔뜩 흐트러졌고, 그 너머로 볼 수 있는 건 가맣게 죽은 눈뿐이었다.

“벌써 일 년이나 지났어요. 이제 그만…….”

세상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내.

루치펠 럭스는 피폐한 낯으로 이디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디스. 마지막이야. 나가.”

꽉 잠긴 루치펠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디스는 심장이 먹먹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아, 정말. 이를 어쩌면 좋을까.

순간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이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얼굴로 외쳤다.

“저도 슬퍼요. 너무 비참해서 날마다 죽겠다고요! 근데 탑주님 혼자 있는 거 아니잖아요. 탑주님한텐 마탑이 있잖아요. 탑주님에게 수백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요!”

“…….”

감히 면전에서 소리를 지르는 무례까지 저질렀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옛날 같았다면 불경스럽다며 갖은 고된 임무로 저를 괴롭혔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입은 웃고 있지만 서느런 낯으로 무언의 압박을 주던가.

하지만 현재의 루치펠은 마치 주인 없인 움직일 수도 없는 인형처럼 축 늘어져있을 뿐이었다.

“…이런 건, 탑주님답지 않아요.”

결국 이디스는 응어리를 꾹꾹 눌러 삼킨 원망을 내뱉곤 방을 나갔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죽은 듯이 굳어있던 루치펠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에는 짤막한 글귀가 적힌 편지 한 장과, 푸른색 마석이 달린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메이블린이 제게 남기고 간, 모든 것.

결코 떠나보낼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기억.

루치펠은 이미 수없이 읽어 닳아버린 편지를 차마 그러쥐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나더러 어떡하라고. 자꾸만 눈앞에서 알짱대는데, 안 잊혀지는데.”

별거 아닌 일에도 와르르, 하고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상처가 마를 날이 없을 만큼 입술을 아무리 짓씹어도, 괴로운 숨은 시시각각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런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는 목걸이를 끌어안듯 품으로 가져가며 푹 고개를 수그렸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분노한 제 주인이 애환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리진 않을지, 늘상 가슴을 졸였다.

혹 무차별적인 학살이라도 일으킬까 봐.

루치펠을 평소 탐탁지 않게 여겼던 마탑의 원로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이참에 그가 아예 정신을 놓고 탑주자리에서 물러나길 바랐다.

하지만 무수한 우려와 갖은 속셈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한 줄기 남은 이성을 붙들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깊은 비통에 빠뜨린 장본인.

메이블린 슈트레커였다.

-가끔은, 아니 대부분의 것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죽이지 않는 쪽을 더 선호해. 대화나 다른 수단들로 갈등을 풀지.

-왜?

-그게 관계를 망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죽이면 안 돼, 알았지?

그녀가 스치듯 떨군 한 마디, 한 마디가. 용암이 끓는 화산처럼 위태로운 루치펠의 분노를 터뜨리지 못하게 했다.

자신이 그러는 것을 누구보다도 원하지 않을 이가 그녀라는 걸, 루치펠은 이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빈자리가, 더 사무치도록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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