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헤드윈은 뻑뻑한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냈다.
“반역 가문이란 낙인도 없고, 멸시당하지도 않고, 추방당하거나 거리에서 굶지도 않는단 말인가?”
아, 드디어.
요제프는 전신에 차오르는 희열감을 느끼며 뱀처럼 속삭였다.
“그럼, 물론일세. 내 그것만큼은 옛 정을 봐서라도 반드시 지켜주겠네. 우리 둘이 오늘 나눈 대화에 대해서도 영영 모를 거고. 아들은 내게 맡기고 자네는 편히 눈감아도 좋네.”
챙그랑. 단검 한 자루가 헤드윈의 앞으로 떨어졌다.
날에는 손톱길이 만큼만 파고들어도 즉사하는 독이 발려있었다.
헤드윈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힘겹게 검을 움켜쥐었다.
서늘하게 번뜩이는 칼날이 서서히 가슴께를 향해 기울고. 헤드윈 앞에 무릎을 접고 앉은 요제프는 비열하게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참, 그거 아나? 자네의 부친께서도 자네를 지키기 위해 내게 이 자리를 넘겼다는 걸.”
“그게… 그게 무슨 소린가?”
주저하는 헤드윈의 손 위에 요제프가 제 손을 얹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네, 친우로서.”
푸욱. 칼날이 헤드윈의 가슴에 단단히 박혔다.
“허억…!”
망연히 뜬 눈이 크게 벌어지고, 퍼렇게 질린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헤드윈의 상체가 풀썩 고꾸라졌다.
“흐읍… 헉…….”
희미하게 내쉬던 숨이 차차 늘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끊겼다.
빳빳하게 허리를 피고 선 요제프는 벌레 건드리듯 헤드윈을 발로 밀어 뒤집었다. 축 늘어진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의 완벽한 승리다.’
후련함에 절로 몸이 떨렸다. 이리도 개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타닥타닥. 작은 불씨가 티끌처럼 타올랐다.
나는 슬쩍 눈을 굴려 옆을 확인했다.
같이 보초를 서는 순찰병은 하루가 고되었는지 아까부터 연신 고개를 자울거리는 중이었다.
‘오늘은 더 수월하겠네.’
나는 성서에서 능숙하게 신성력을 한 줄기 뽑아냈다. 란슬롯이 매번 빵빵하게 채워주는 덕에 마음껏 써도 무리는 없었다.
뽑아낸 신성력은 내 의지대로 어두컴컴한 통로를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
이제 해야 할 건 가만히 서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것뿐.
그러다가 교대할 시간 때쯤 신성력을 회수하면 돌아온 신성력이 알아서 지도를 그려주었다.
그렇게 황궁 지하의 비밀 통로를 순찰한지가 벌써 한 달 째였다.
그럼에도 지도는 이제 겨우 초반밖에 그리지 못했다.
뭐 그렇게 숨길 게 있는 건지 보안이 철통이라, 요일마다 순찰병들을 다르게 두었다.
때문에 지도를 그린 건 오늘로서 고작 네 번째였다.
이 속도라면, 넉넉하게 3년 정도는 잡아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어.’
황궁 지하도는 감쪽같이 제국을 탈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자,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리가 복잡하고 중간중간 트랩이 많기 때문에 보다 확실하게 지도를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서두르다간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경주를 완주하는 게 중요했다.
“으음…….”
순찰병은 이제야 잠기운에서 벗어났는지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떴다.
잠은 옮는다더니, 이젠 내가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기운을 몰아내고자 시답잖은 대화라도 하려고 말문을 텄다.
“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끄아아아아악!
깊은 통로 안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퍼뜩 벽에 기대고 있던 자세를 고쳤다.
내가 튼 말꼬는, 이제 더 이상 시답잖은 것이 아니게 되었다.
“방금 안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비명소리 비슷한…….”
“예. 들었습니다.”
내 의문을 단박에 잘라내려는 듯한 응수였다. 심지어 그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뭐야, 이 무미건조한 대답.
내가 이상한 거야? 누가 고문이라도 받는 듯한 소리였는데…….
나만 심각한 분위기를 잡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안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
순찰병이 날 보며 바람 빠진 웃음을 피식 흘렸다.
“보기보다 순진하시네요, 신관님.”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가끔씩 들리긴 합니다만,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이 안은 오로지 신녀님과 성하, 폐하께서만 출입이 허가되니까요.”
한마디로 그들만의 공간이니 뭘 하든 관심 가지지 말라는 소리였다.
‘아는 사람 몇 없는 비밀 통로에다가, 신녀와 교황, 황제만 출입한다라…….’
대놓고 수상한 냄새가 팍팍 나는 곳이었다.
‘어째 내로라하는 제국 최고의 윗분들께서만 이리도 구린내가 나는 건지.’
그 후로 교대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나는 공허처럼 뻥 뚫린 공간을 끈덕지게 응시했지만, 비명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 * *
‘헉, 맛있다. 너무 맛있다.’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도 잠시 잊고 쿠키며, 파이며, 시럽과 설탕을 잔뜩 올린 샤베트까지 정신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제국 놈들은 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었지만, 디저트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그렇게 한창 닥치는 대로 욱여넣던 찰나에, 이마가 따가워서 고개를 드니.
“실비아. 단 것은 역하다며 입에도 안 댔던 걸로 알고 있는데.”
가이즈가 서느런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교황청에서 지낸 지 일 년이 넘어가는 즈음부터, 가이즈는 종종 이렇게 의심의 눈초리로 날 보곤 했다.
‘아오, 저 독사 같은 인간. 조심해야 하는데.’
어느새 목걸이에 손이 갔다.
가이즈의 까만 눈동자는 가끔씩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제대로 차고 있는지 확인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실비아의 얼굴인지 확인하려고.
‘음, 눈코입 다행히 이상 없군.’
목에 걸렸던 빵조각이 다시 넘어갔다.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가 애정하는 제자를 연기했다.
“아, 그게… 식성이 요즘 좀 바뀌더라구요. 몇 번 먹다보니 괜찮은 거 같기도 해서요. 하하. 인생이 쓰니까 먹는 거라도 단 걸 먹어야죠.”
“……그래도 자중해라. 여기는 신전이지, 디저트 가게가 아니다.”
“넵. 안 그래도 질려서 막 버리려던 참이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이즈는 더 첨언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로 서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나의 달달구리들을 분리수거 해야만 했다.
‘흑흑, 아가들아… 엄마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올해의 지못미 상을 스스로에게 수여하며 나는 어서 다음 달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한 달에 한 번, 일일휴가를 내고 마음껏 아가들을 만끽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 * *
“아니, 어떻게 단 걸 싫어할 수가 있지?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잠도 잘 오고, 무엇보다 너무 맛있지 않나?”
나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오늘은 드디어 하루 휴가를 낸 날이었고, 교황청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 아주 멀고 먼 지방에 도착해 마음껏 활보하는 중이었다.
나는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디저트 가게를 찾아 헤맸다.
가이즈의 눈이 무서워 근 한 달을 단 건 입에도 대지 않았더니 여간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니었다.
왜 실비아는 단 걸 싫어해서, 내게 이런 시련을 안겨주는지!
“하긴, 그러니 성격이 그리 괴팍했겠지.”
고작 식성 하나로 인격까지 단정 짓는 상당히 급진적인 이론이었으나, 에임에서 겪었던 실비아의 인성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기도 했다.
‘아휴, 디저트 하나 속 편히 먹으려고 외곽까지 나와야 하는 내 신세란.’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걷는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오는 길 내내 불퉁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기실 수도에서 머나먼 외곽까지 나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한 두어 달 됐나?’
오늘은 실버와 하일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딱히 들킬까 하는 우려는 없었다.
신수들의 인간화 모습을 본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교황청 내에서도 고위급 신관들을 제외하곤 손에 꼽았다.
언제나 신수의 형태로 나타나 공허만 처리하고 곧바로 사라졌으니.
더구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시골 마을에선 그들의 존재자체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한 마디로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길 수 있단 말씀!’
그들과 만나기로 한 시각까진 아직 여유가 좀 있어, 나는 눈앞에 보이는 디저트 가게에 냉큼 들어갔다. 당도가 떨어져도 한참 떨어져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여기서 저기까지. 다 주세요.”
점원의 떨리는 동공에서 진심이냐는 저의가 느껴졌다.
나는 멋있게 금화를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팁이에요.”
후후, 제 뒷모습에서 으른의 향기와 멋짐 포스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내 꿈이었던 돈 많은 백수는 되지 못했지만 둘 중 하나는 이뤘다. 돈 많은 거.
나는 점원 언니의 반짝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바깥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금화 때문인지 내 멋짐 때문인지-당연 후자일 것이다-는 몰라도,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나는 행복하게 웃으며 달콤한 아가들을 하나하나 음미했다.
한데 이곳에서도 가이즈 못지않은 방해꾼이 존재했다.
“굉장히 맛있게 드시네요.”
내가 지금 먹고 있는 버터보다 더 느끼한 인상의 남자가 내 앞에 무턱대고 앉았다.
‘아오, 모처럼 맛난 거 먹고 쉬려는 와중에 뭔…….’
정말 피곤하게도, 실비아는 제법 미인의 범주에 속하는 얼굴이었다.
성직자이긴 했지만 평민의 신분이었고, 그 신분에 보기 좋은 얼굴을 가지고 다닌다는 건 날파리들이 많이 꼬인다는 뜻이었다.
“혼자 왔나보네요.”
으웩, 멘트도 개구리잖아.
“제 이름은 터버 프로그입니다.”
이름도 개구리였네.
남자는 개굴스러운 제 이름이 이래도 된다는 보증수표인 것 마냥 굴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좀 있는 집 자식인 거 같은데, 관종이지만 이런 관심은 사절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속에 버터를 채운 빵을 와작와작 뜯어먹었다.
마치 널, 이렇게 뜯어먹고 싶다는 듯이.
“일행 있어요. 엄청 많이 시켰잖아요.”
‘물론 혼자 다 먹을 거지만.’
싫다는 티를 팍팍 냈건만. 남자는 매너는 없어도 끈기는 있는 모양인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 그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앉아 드리죠.”
“필요 없는데요.”
“아가씨가 혼자 쓸쓸하게 앉아 있는 걸 보고만 있을 만큼 신사도가 부족하진 않습니다, 저.”
으, 멋진 멘트 날렸다고 뿌듯해하는 저 낯짝 좀 보라지.
아까부터 근질거리던 입이 결국 폭발준비에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내게도 슈트레커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어휴, 결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 공주 DNA를 깨운 건 너다, 이 어리석은 중생아.’
다니엘 오라버니, 내게 저 놈을 발라버릴 수 있는 힘을 줘!
나는 먹던 빵도 내려놓고 남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런 걸 신사도라고 생각하시는 걸 보니….”
그리고 보란 듯이 검지로 머리를 두어 번 톡톡 쳤다.
“신사도가 아니라 뇌에 주름이 좀 부족하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