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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80)화 (80/185)

#80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더욱 숨죽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고참으로 보이는 신관은 골치 아픈 악동이라도 떠맡은 양 인상을 찌푸렸다.

“아, 걔. 그냥 냅둬.”

“예? 하지만 성유물 넥타르를 관리하고 계신데…….”

“상관없어. 교황님께서도 신경 끄라고 하셨고. 별로 중요한 성유물도 아니라 반드시 회수할 필요도 없어. 효과 좀 쎈 회복 물약일 뿐이야.”

손을 휘휘 저으며 한사코 말린 그는 신입 사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신참. 내가 친히 자비를 베풀어 알려주는 건데, 여기서 란슬롯 사제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아. 특히 교황님 앞에선 더더욱.”

작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한층 은밀해졌다. 신입이 괜스레 쫄았는지 몸을 움츠렸다.

“왜… 요?”

“감히 신을 모욕했다가 추락한 가문의 핏줄이야. 자비로우신 교황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작은 왕국에 좌천시키는 걸로 봐줬지. 그러니 입조심해. 너도 하루아침에 그 꼴 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알겠어?”

“네, 넵.”

대화를 일단락 낸 신관은 성큼성큼 걸어 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붙는 신입 사제의 모습도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나는 구석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이거 어째… 구린내가 나는데.’

제국에서 한 번이라도 도난 된 이력이 있는 성유물들은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 나라의 신전에서 보관되곤 했다.

그와 함께 성유물을 지키는 신관을 같이 보냈는데, 먼 타국에서 할 일이라곤 오직 그뿐이라 좌천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보직이었다.

더군다나 란슬롯처럼 에임까지 온 사제라면, 제국에서 거의 버린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란슬롯 가문은 모종의 사건으로 멸문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고, 란슬롯의 부친은 사형당한데다 란슬롯 본인은 좌천이라…….’

나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초상화 앞을 서성였다.

[요제프 슈와츠 살롭]

유독 화려하게 그려진 현 교황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 곁에 서있었다.

“이곳엔 무슨 일이느냐, 실비아?”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져서인지 기척을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색이 바랜 듯한 붉은 머리, 당최 무슨 생각인지 모를 회색 눈.

내가 밟고 있는 이 어마어마한 성의 주인, 교황이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입매는 호선을 그리곤 있었지만 중년의 남자는 서늘하다 못해 싸한 느낌이 드는 인상이었다.

‘이 사람이… 교황. 신수 가족을 제 꼭두각시마냥 조종하는 인간.’

하일과 실버가 외부와 단절한 채 살아온 시간은 백 년.

교황과 알고지낸 시간도 백 년.

신수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있지도 않은 저주 운운하며 곁을 무자비하게 쳐내라 지시한 것도 그였고, 란슬롯을 좌천시킨 사람도 그였다.

결국 교황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뒷배였다.

‘란슬롯 일이나 좀 캐볼까.’

나는 일단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지어냈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가이즈님께 건의드릴 게 있어서요.”

“뭔가?”

“성하께 감히 말씀드려도 될는지…….”

“해보거라. 듣는 다고 귀가 닳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럼 사양하지 않고.

“란슬롯 말이에요.”

교황의 웃는 낯이 일순 섬뜩하게 조여들었다 풀어졌다.

“그 자가 왜?”

“성하께서 너무 자비로우신 건 아닌가 해서요. 신성모독까지 한 집안인데, 고작 좌천시키는 걸로 마무리 지으시다니요. 그걸로는 도무지 성에 안 찹니다. 게다가 이번에 에임에 갔을 땐…….”

열띤 내 토로에 교황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야, 피를 보는 건 그 아버지대로 충분하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어린 것이 불쌍하잖니. 그 아이는 아직도 내가 모함을 씌운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찰나지만 비릿한 웃음이 스쳐갔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난 확신할 수 있었다.

‘교황 네놈이 란슬롯의 가족들까지 죽였구나.’

그 고고하기 마지않는 자리를 유지하려고, 피로 낸 길을 걸으면서.

겉으로는 티끌 하나 없는 척 인자한 웃음으로 더러운 거죽을 가리고.

본디 네 자리에 있었어야 했을 이들은 거짓과 술수로 몰아내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멋대로 뻗어나간 주먹이 당장 그의 코뼈를 부러뜨릴 지도 몰랐다.

“역시, 성하께선 너무 인심이 후하세요. 조금은 엄하게 구셔도 되는데.”

“실비아 같은 아이만 있다면 나도 근심이 없을 텐데 말이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교황은 흐뭇한 얼굴로 날 살피고는 회장을 나갔다.

나는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에 친히 조소를 날려주었다.

‘그래, 마음껏 고마워해라 이 천하의 개새끼야. 내가 돌아가면 네 묫자리부터 파놓을 테니까.’

* * *

긴 코트 자락이 바닥에 끌릴 듯 말 듯 발치에서 흔들렸다.

다소 빠른 걸음으로 회장을 벗어난 요제프는 뒤뜰 별관에 있는 작은 예배당으로 향했다.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면 으레 그곳을 찾아가곤 했다.

“서, 성하!”

“잠시 혼자 있고 싶군.”

교황의 갑작스런 행차에 안에서 청소 중이던 사제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예배당을 나갔다.

그는 신성한 제단을 앞에 두고서 의자에 아무렇게나 몸을 뉘였다.

방금 전 들은 이름이 미처 삼키지 못한 음식물처럼 목구멍에 걸렸다.

‘란슬롯…….’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교황이 된 후 신관들이 눈치껏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탓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절대로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그 이름은 기억 속에서 점차 빛바래져가던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20년 전.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즐겁기 그지없었던 그 날을.

* * *

“성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왜 자꾸 거짓을 말하십니까. 신 앞에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두려워해야 하는 건 자네야, 헤드윈. 나는 분명 신탁을 받았고, 나와 같이 있었던 대신관들도 모두 인정했네. 한데 왜 자네만 그리도 못마땅하게 구는가?”

“모로스께서 그런 신탁을 내리실 리가 없습니다. 주변국들을 속국으로 지배하라니요. 너무 무리한 확장입니다. 외세의 위협도 없는 지금, 굳이 주변국들을 칠 이유도 없습니다.”

헤드윈은 더욱 간절하게 요제프에게 매달렸다.

진달래를 닮은 분홍색 눈이 애달픈 빛을 띠웠다.

“안 그래도 흉년이 몇 해 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면 애꿎은 백성들만 굶주리고 땅은 황폐해져, 더욱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러니 속국을 늘려 자원을 수급하자는 게 아닌가. 모로스께서도 다 뜻이 있으신 게야.”

“이 상태에서 전쟁은 모든 나라를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혹 성하께서 잘못 들은 것은 아니십니까? 터무니없는 신탁입니다. 이노아드의 번창을 바라는 모로스께서,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말조심 하게, 헤드윈! 기어이 신성모독을 하겠다는 겐가! 자네의 그 발언 때문에 자네는 이미 대역죄인이 되었어!”

성난 야수와도 같은 노호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굽힐 줄 모르는 기세를 가히 꺾을 만한 거센 호통이었다.

그러나 헤드윈은 굳건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섰다.

커다란 바위처럼 꿈쩍 않는 그를 보며 요제프는 은밀하게 입술을 뗐다.

“다들 감히 신을 의심하는 자네를, 당장 퇴출시켜야 한다고 한데 입을 모아 말하고 있네. 알다시피, 신탁에 반발하는 것은 신성모독 중에서도 상당한 중죄이지 않은가.”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헤드윈의 어깨를 가만히 쓸었다.

“이대로라면 자네는 작위를 박탈당한 채 이노아드에서도 영원히 추방을 당할 것이네. 우리의 신을 섬길 수 없다면, 다른 신이라도 섬겨야지 어쩌겠나.”

어깨 근처를 맴돌던 손은 이내 겉옷을 거칠게 벗어재꼈다.

팍! 교황청의 문양이 새겨진 로브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헤드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자신은 그저 옳은 길을 따졌을 뿐인데. 진실을 고집한 대가는 한겨울의 서리보다 혹독했다.

그는 어릴 적 둘도 없는 제 친우였던 요제프가 부디 조금이라도 남아있길 바라며, 공허한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지금만큼은, 내 한때 친우로서 말하겠네. 요제프.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 부디 진실을 고하게. 내 이렇게 빌겠네.”

작은 창가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흘러들었다.

헤드윈의 머리 위로 쏟아진 빛이 채도 높은 청발을 후광처럼 빛냈다.

그를 바라보는 요제프의 흐린 회색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저 머리칼이 지독스럽게 싫었다. 잘난 그 터럭 한 올 만큼도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다 태워서, 더러운 강물에 떠내려가게 던져버리고 싶었다.

자신은 교황이고, 그는 대신관에 불과함에도 그 꼿꼿함을 기어코 유지하는 것이 꼴사나웠다. 참을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스로 고개를 조아리고, 빌고 있었다.

‘이리도 기꺼울 수가.’

거무죽죽한 입꼬리가 사냥감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꿈틀거렸다.

요제프는 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헤드윈을 내려다봤다.

“자네가 먼저 죄를 시인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면, 자네의 아들만큼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게 하겠네. 내 친히 잘 돌봐주도록 하지.”

“요제프! 자네가 정녕 이런 식으로…!”

발끈하며 일어나려는 헤드윈의 무릎을 요제프는 가차 없이 짓밟았다.

“자네 아들이 올해 몇 살 이던가? 세 살? 네 살?”

“윽… 내 아들은 건드리지 말게!”

“건드리다니, 그 반대야. 한창 따듯한 집에서, 풍족하게 먹으며 자랄 시기 아니던가. 자네는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하고 나라에서도 쫓겨나, 손가락질 받으며 거리에 나앉는 삶을 아들에게 주고 싶은 것인가? 자네가 생각하는 아비의 도리란 그런 것이야?”

한껏 비웃는 어투에, 헤드윈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위하는 척 지껄이는 더러운 속을 모를 리가 없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다간 다음 타깃은 제 자식이 될 거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자신의 하찮은 몸뚱이는 얼마든 짓밟고 뭉개도 좋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지킬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무늬만 대신관일 뿐인 허수아비였다. 현재 교황청 내의 세력은 모조리 요제프를 떠받들고 있었다.

자신이 칼을 뽑으면, 반대편에선 지체 없이 백 개의 칼을 던질 것이었다.

제 부질없는 몸뚱아리가 쓰러질 때까지.

결국 아이를 지키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입술을 떼는 헤드윈의 턱이 덜덜 떨렸다.

“정말… 정말, 나만 죽으면… 란슬롯은 살려주는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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