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받는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든 탓인지 고급 스킬 몇 개가 잠긴 것이다.
개중에는 탈출하는데 가장 필요했던, ‘재능의 축복’도 있었다.
타인의 능력을 차용할 수 있는 스킬.
‘루치펠 능력 빌려서 난장판 만든 다음에 텔레포트 하려고 했는데!’
속이 쓰리지만 난장판도, 텔레포트도 더 이상 무리였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나중에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 쳐도 텔레포트는 위험했다.
마법을 쓰려면 봉인구를 깨뜨려야 하고 그럼 리미터를 해제해야 하는데, 리미터를 버리는 즉시 어마어마한 마력이 터져 나올 것이었다.
나는 아직 스스로 그 마력을 조절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텔레포트를 하면, 온몸이 조각조각 나서 대륙 전역에 흩뿌려질지도 몰라.’
물론 스크롤을 쓰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크롤을 쓰는 덴 지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신수들은 불가능했다.
‘혹여라도 다시 도망칠 경우를 대비해 교황청에서 주술을 걸었지.’
어떠한 스크롤도 효과가 없도록 만드는 주술.
신수가족에게 스크롤은 그냥 비싼 휴지조각이었다.
‘결국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건데…….’
교황청 놈들에게 엿도 먹이고 바로 튀어도 아무도 눈치 못 채는 길이 있을까?
나는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는 소릴 냈다.
그동안 란슬롯은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아, 하고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왜요? 다른 방도가 있어요?”
“이것이 해결책이 될 진 모르겠지만… 황궁 지하에 비밀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비밀 통로요?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네. 원래 용도가 그런 곳입니다.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를 대비해 만들어둔 것이니까요.”
“아는 사람은요?”
“황제와 교황, 대신관과 고위 신관들 몇몇을 비롯해서 많지 않습니다. 통로 입구에는 항상 순찰병을 두는데, 황실 기사 한 명과 교황청 소속 신관을 한 명 세워둡니다.”
“마침 제가 신관이니까…….”
“네. 실비아로 변장하실 거라면, 그 직무에 자원하는 게 설계도를 수월하게 완성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탈출은 거기로 하고, 난장판은 그 방법으로 일으키고, 나머지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구만. 후후, 완벽해!
두 시간 넘게 이어진 공론 끝에 할 일의 윤곽이 얼추 잡혔다.
나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일단 순찰병에 자원한 뒤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걸로 하죠.”
“급한 일이 생기면 영상구를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좋아요. 휴, 한숨 돌렸으니 조금만 쉬어요.”
한 바퀴 돌린 목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란슬롯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손목도 뚝뚝 꺾었다. 란슬롯의 표정이 더 기이해졌다.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요. 시원해서 나는 소리예요, 시원해서.”
그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애써 수긍해줬다.
앞으로의 계획도 세웠겠다, 우리는 잠시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뭐, 정확히는 주로 내가 질문을 하고, 란슬롯은 대답을 하는 형식에 가까웠지만.
“여기서 지내는 거 괜찮아요? 숨어 살아야 하잖아요. 답답하다던가, 심심하다던가. 뭐 그러진 않아요?”
“에임에서도 교류가 잦았던 편은 아니어서 그런지 딱히 불편하진 않습니다. 이노아드에서 지낼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음… 그거 다행인거죠? 아닌가?”
“다행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란슬롯이 그렇다면야.”
조금 이상하지만, 란슬롯이 괜찮다니 나도 괜찮다고 해주기로 했다.
나는 그가 사온 진한 초콜릿 쿠키를 오도독 씹으며 물었다.
“근데 란슬롯은 제국에서 뭘 하다 에임까지 오게 된 거예요? 란슬롯 정도 능력이면 교황청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고도 충분히 남았을 텐데.”
“그게… 불미스러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지른 과오로 인해 피할 수 없는 형벌이 내려졌거든요. 본래라면 저도 죽었어야 할 몸인데, 간신히 목숨을 면한 것뿐입니다.”
“그럼 란슬롯 가족들은…….”
“어렸을 적에 전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사형당하시고, 그 충격 때문인지 어머니께서도 병을 얻어 한 달 만에 아버지 뒤를 따르셨죠.”
“……괜한 걸 물어서 미안해요.”
아오, 망할 입.
나는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란슬롯은 괘념치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너무 어릴 적이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걸요.”
“그래도 미안해요.”
“…….”
쓰게 입가를 일그러뜨리는 그의 눈은 과거의 어느 날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허공을 훑던 시선이 다시 나를 마주했다.
“사람들 모두가 아버지를 힐난하며 손가락질했지만, 저는 아버지가 그릇된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였더라도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그것이 정도라면, 기꺼이 갈 수 있습니다. 설령 신탁에 반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선택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으나, 한 가지 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갖는 그 확신을 란슬롯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애초에 그 확신을 준 것이 란슬롯이었으니까.
“란슬롯.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대답 기억해요? 란슬롯이 자신을 믿냐고 물어봤을 때요.”
란슬롯이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오, 기억하고 있었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에게 갖는 확신은, 그가 내게 준 확신은, 믿음이었다.
그 땐 활자로 읽은 그를 믿는다는 뜻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봐온, 내가 겪어온 그를 믿는다.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어요. 란슬롯을 믿어요, 완벽하게.”
“…….”
“사람들은 곧고 단단한 것일수록 부러뜨리길 원하잖아요. 란슬롯이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그렇게 믿는다면 됐어요.”
“저는…….”
“이제부턴 나도 같이 믿어줄 테니까 외로워하지도 말고요. 그땐 부친 혼자셨다지만, 지금은 둘이니 쉽게 부러지진 않을 거예요.”
침묵을 지키던 란슬롯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어 내뱉는 목소리도 조금 먹먹했다.
“……아가씨께선 항상 친절하시네요.”
“자기는 안 그런 줄 아나 봐요. 란슬롯이 더해요. 여기까지 같이 와줬잖아요.”
“아가씨의 뜻이 제 뜻과 일치했을 뿐입니다. 저 역시 신수들이 제국에 얽매이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요.”
하여간, 끝까지 인정 안 하지.
‘가족도 아닌 사람이 대뜸 제국에 같이 숨어살자 하는데 따라나서기가 어디 쉽나.’
나는 그의 두 손을 잡고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그래도 함부로 나서기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고마워요.”
“저야말로 아가씨의 여정에 동행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만 감사해요.”
“노력해보겠습니다, 아가씨.”
내 타박 섞인 목소리에 란슬롯이 살풋 웃었다.
그가 그만 감사하는 걸 노력한다면, 나는 란슬롯이 고작 미소가 아니라 허리를 꺾으며 웃는 날이 오도록 노력해보기로 했다.
‘……음. 그건 좀 무린가. 상상도 안 가네.’
그럼 소리 내어 웃는 것까지만.
* * *
“아휴, 괜히 쫄았네.”
나는 바짝 굳은 몸의 근육들을 풀며 걸었다.
조금 전 황실연계업무 담당 신관에게 지하도 입구의 순찰병을 자원하겠다고 말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교황과 황제는 다소 배타적이었던 옛날과는 달리, 꽤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 중인 모양이었다.
아예 황실과 연계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와 팀이 따로 꾸려져 있는 걸 보면.
어찌 됐든, 실비아는 생각보다 유능한 인재였다.
갑작스런 내 청에도 신관은 되레 반색을 표했다. 실비아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하면서.
교황이 황실 행사에 참석하거나 외출할 때도 종종 대동된다고 했다.
곁에서 정보를 최대한 얻어야 하는 나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순찰은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니 그동안 길이나 좀 익혀볼까.’
교황청은 상상했던 것보다 그 부지가 상당해서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배당이라도 한 번에 찾아가려면 구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최대한 두리번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일이 있는 척 구석구석 쏘다녔다.
그러다 문득 긴 복도 구조의 회장에 다다랐다.
“와… 대박.”
큼지막한 그림들이 벽면에 줄지어 붙어 있는 그 곳은, 역대 교황들의 초상화가 걸린 회장이었다.
교황 혼자만 그려진 것도 있고, 가족들까지 같이 그려진 초상화도 있었다. 1대부터 시작해 현대 교황의 모습까지 빼곡하게 벽면에 들어차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며 회장을 걷던 나는 16대 교황의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치 지중해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머리칼을 늘어뜨린 남자.
그리고 그 옆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인과 아이.
역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교황, 라슬로 위즐 헤르스만.
과연 전작 소설에서 읽은 모습 그대로였다.
오래토록 가정을 유지한 교황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그의 초상화는 유독 눈에 띄었다.
더불어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야, 판박이네, 아주 판박이야. 이건 뭐 붕어빵이 아니라 복제인간 수준인데.’
작중 란슬롯은 정보가 가장 공개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저 막강한 신성력을 가진 신관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어마어마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다음 대 교황의 초상화 앞으로 이동했다.
이 자도 역시 아쿠아마린색으로 빛나는 청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 대인 18대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18대 교황은 직위에 앉았던 기간이 유난히 짧았다.
수명이 200살에 육박하는 교황들 특성 상, 제위 기간이 평균 100년인 반면 18대 교황은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19대 교황, 즉 현 교황의 머리색은 전대 교황들과 완전히 정반대라는 것이었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전대 교황들이 있었나?’
막 1대부터 다시 살펴보려던 찰나.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구석에 꺾어져 보이지 않는 공간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잘못한 것도 찔릴 것도 없었지만 괜히 마주쳐서 좋을 건 없었다.
간신히 몸을 구겨 넣자마자 두 신관이 회장을 가로지르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근에 신수들이 돌아왔다던데, 소문 들으셨어요? 교황청 어딘가에 있단 소리잖아요. 으, 말만 들어도 소름끼칩니다.”
“시답잖은 저주는 신경 쓰지 마. 오후 예배 마치고 나면 떠나있을 테니까. 그보다, 성유물은 다 확인했어? 저번 주에 리스트 뽑아준 거.”
“네. 도난 된 이력이 있는 것들까지 각 나라에 전부 기별을 마쳤습니다. 한데…….”
종이뭉치를 팔락이던 녀석이 말끝을 늘이며 주저했다. 그러자 앞질러 가던 신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그… 에임 왕국에 있는 란슬롯 사제에게서만 답신이 없습니다.”
음? 뭐? 란슬롯? 내가 아는 그 란슬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