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녀가 죽은 일주일
#77
하늘을 쪼갤 듯한 천둥이 시퍼런 날처럼 떨어졌다.
축축하고 음울한 어둠이 마탑을 휘감았다. 모두가 비통 속에서 숨을 죽였다.
비가 그칠 줄 모르고 퍼붓는 밤은, 마탑에 메이블린의 사망 소식이 퍼진 때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메이가… 그러니까 메이블린이… 죽었대요.”
이디스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끅끅 울음소리를 냈다.
그를 마주한 루치펠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힘겹게 여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알아듣게 좀 말해, 이디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누가 죽어?”
“메이블린이 탄 마차가… 사, 사고가 나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흐윽! 술식을 발동시킬 새도 없이 산산조각나서… 그래서, 그래서… 메이는… 흐읍, 흑!”
이디스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렸다.
루치펠은 정신없이 에임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이블린 슈트레커의 죽음을 확실하게 목도했다.
‘말도 안 돼.’
그녀의 가족들이 산산조각이 난 마차 앞에서 넋을 놓은 채 통곡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루치펠은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뭐야, 뭔데… 뭐냐고…….”
세상이 자신만을 남겨둔 채 저 멀리 떠나가는 듯했다.
세상의 끝에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다.
‘메이블린이… 죽어? 죽었다고?’
몇 번을 곱씹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평생을 매달려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외계의 언어처럼 들렸다.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만에 하나일 뿐인 가정이래도 끔찍하기 그지없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황이 지금 일어났다.
너무도 처참해서 감히 마주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이, 현실이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손톱이 파고드는 지도 모르고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네가, 네가 나를 두고… 이럴 순 없는 거잖아. 이래선 안 되는 거잖아!”
처절한 절규가 섬광처럼 밤하늘을 갈랐다.
차가운 빗물이 뺨을 타고 흐르다 턱 끝에 맺혀 떨어졌다. 그보다 더 축축한 목소리가 흐느끼듯 새나왔다.
그는 그녀를,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애를 쓰고 빌어도, 그녀를 잊게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메이블린… 이럴 순 없는 거잖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지금,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 *
참혹하게 바스라진 마차 잔해로 뒤덮인 절벽 아래.
세찬 빗줄기 속에서 한 소년이 미친 듯이 땅을 헤집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찬란했을 금발은 빗물에 젖어 자꾸만 눈을 찔렀고, 단정했던 의복은 진흙에 절여져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다니엘이 한숨을 쉬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미하일. 이만 가자. 밤이 깊었어.”
“형님 먼저 가십시오. 전 못갑니다.”
미하일이 다니엘의 팔을 거세게 뿌리쳤다.
결국 보다 못한 노아가 억지로 미하일을 일으켰다.
“강물이 불어서 위험해. 시체는 진즉에 떠밀려갔다고. 여기 있어봐야 못 찾아.”
“시체라니요. 누가 죽었단 말입니까? 제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누님, 죽지 않았습니다.”
미하일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노아의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적막한 가운데 얄궂은 빗소리만 타닥타닥 귓전을 때렸다.
한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다니엘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말했다.
“…일단 아버지께 가자. 조금 전 깨어나셨다고 연락이 왔다. 혼자서 메이… 메이, 의 죽음을 감당하느라 힘드실 거다.”
그는 목이 메는지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는, 툭 치기만 해도 터져버릴 물방울처럼 위태로웠다.
눈가에 물기가 가득한 얼굴로 노아가 미하일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실이 끊어져 버린 마리오네트처럼 미하일이 흐느적거렸다.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어떡하면 좋죠? 어떻게 해야 하죠? 누님이 더 이상 곁에 없는데, 제가 어떻게 살 수 있는 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뻥 뚫려버린 공허한 문장이 다니엘과 노아의 가슴을 무도하게 후벼 팠다.
그들 역시 무자비한 상처에 아파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서보려던 두 형제도 부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릎이 풀썩 꺾였다.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허망하게 새나왔다.
“나도, 나도 모르겠다, 미하일… 나도 모르겠어…….”
“다 꿈이었으면 좋겠어. 눈 뜨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게 어젯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노아가 질끈 눈을 감았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자꾸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질퍽거리는 진흙탕 아래로 발이 푹푹 빠지는 듯했다.
까만 얼룩 같은 밤이었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 * *
“내일은 수색대 인원을 두 배로 늘려라. 숲을, 아니 이 왕국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
“예, 저하!”
늘어선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명령을 받은 근위대장마저 물러나고, 칼리안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메이블린… 제발…….’
그녀는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기어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일어서게 만들어 놓고선, 느닷없이 사라져버렸다.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영영 가버렸다.
마치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칼리안은 망연하게 멈춰 섰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아득한 공포가 그를 잠식했다.
뭘 해야 하지?
아니, 애초에 뭘 할 수 있지?
알 수 없었다.
“……저하.”
반대편에 앉아있던 슈타커가 줄곧 창밖에만 고정하던 시선을 칼리안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칼리안을 만나고자 미리 와있던 참이었다.
“제 앞에서 그리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무례를 용서하게. 지금은 격식이니 체면이니, 그런 것들을 따질 여유가 없어서.”
칼리안이 손등으로 눈가를 가린 채 말했다. 슈타커는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유리잔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침전된 분위기 속에서 굴렀다.
칼리안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감감한 시선이 빠르게 비어가는 술병에 닿았다.
“그러는 자네도 평소엔 손도 안 대는 술을 되는대로 들이켜고 있지 않은가.”
“……술동무나 해주시렵니까.”
칼리안의 타박에도 슈타커는 병을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여 왔습니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칼리안은 말없이 잔을 가져갔다.
쪼르륵, 떨어지는 짙은 액체가 꼭 미처 삼키지 못하고 토해내는 우울 같았다. 지독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찔렀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비슷한 처지의 친우끼리 나누는 대화가, 미치지 않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 아니면 그저 위안이 되거나.”
“…….”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슈타커가 푹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뚝 내뱉어진 안개처럼 희미한 음성.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분명치 않은 문장이었다. 대상이 누군지도, 무엇에 자신이 없는지도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꼭 그를 입 밖으로 꺼내기 무서운 사람 같았다.
그 말만 남긴 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답했다.
“나 역시 그래.”
그도 그녀와 다를 바 없는 감정에 잠식되어가는 중이었으니까.
“…한 잔 더 하겠나?”
이번엔 슈타커가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술병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그들은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이 나간 얼굴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 *
쏴아아아-
어두컴컴한 파란 지붕의 찻집 안.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지붕을 세차게 두드렸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턱을 괴고 있던 잭이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몰라.”
한 팔을 옆으로 베고 누운 채 똑같이 시름시름 앓고 있는 재키가 힘없이 답했다.
온통 눅눅하게 젖은 습기에 질식될 것만 같았다.
잭의 시선이 메이블린이 항상 앉던 자리에 머물렀다.
“우리 임무도 많이 밀렸는데.”
“알 게 뭐야.”
“실감이 안 나. 주군이… 주군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나도 그래.”
“…….”
“……이런 걸로 네 말에 동의하고 싶진 않았는데.”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딸랑- 때마침 문가에서 들린 종소리가 그들의 우울을 잠시나마 떨쳐냈다.
셀턴과 클라인이 비에 젖은 머리를 털며 들어왔다.
잭과 재키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되었냐고 묻고 싶었으나 채 입술을 떼기도 전에 말문이 막혔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물음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둘의 안색이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못 찾으셨군요.”
“……그래.”
가득 잠긴 셀턴의 목소리가 수면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가 뻐끔거리는 양 새나왔다.
메이블린이 실종된 지도 일주일 째.
매일같이 인원을 늘려가며 수색에 나섰지만 그녀가 돌아오는 날은 없었다.
장마로 불어난 강물은 흔적도 없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언제나 강철 같은 굳건함을 유지하던 클라인도, 이번만큼은 버틸 수 없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색 반경을 다시 조정해야 해서.”
클라인은 움푹 파인 눈가를 문지르며 지하로 내려갔다. 제대로 잠을 청한 것이 벌써 이틀 전이었다.
억지로 누워봤자 재수 없는 별별 잡생각만 났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 생각도 못하게 몸이라도 부지런히 놀리는 게 나았다.
쏴아아아-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 없었던 마탑주는 이 순간이 미치도록 무서웠고.
어떤 상황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왕세자는 비탄에 빠졌으며.
한결같이 우직함을 지키던 암흑가의 보스는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 해의 가을장마는, 유난히 지독스럽게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