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불멸의 연인을 위한 작별인사
#73
내가 가진 시스템의 법칙 중 하나.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고사든.
죽음은 반드시 회귀로 연결된다.
관심수치를 채우지 못한 죽음은 룰렛을 돌려 임의적인 과거로,
관심수치가 차기 전 맞이한 죽음은 진행 중이던 시스템이 시작한 날짜로 돌아간다.
지금 같은 경우는 후자였다. 다행히도 수치가 400%가 되기 전 죽었으니 시스템이 활성화된 날인 열흘 전으로 돌아왔다.
“으으…….”
나는 괜스레 심장 부근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확인할 게 있었다.
잠옷인 얇은 슬립 차림인 것도 잊고 나는 던켈하이트로 달려가 다짜고짜 외쳤다.
“클라인! 잭! 재키! 괜찮아요?”
때 아닌 소란에 막 자다 일어난 얼굴인 쌍둥이와, 벌써부터 업무를 시작한 클라인이 눈을 훼둥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나는 그들을 구석구석 들춰보고 살피며 멀쩡한지 확인했다.
“어디 아픈 덴 없고? 막 칼에 찔린 듯 쓰리다거나, 속이 울렁거린다거나, 몸이 욱신거린다거나.”
“…없는데요.”
“머리가 어지럽거나 목이 날카로운 거에 쑤셔진 것 같은 느낌은?”
“음…. 저흰 괜찮아요. 혹시 악몽이라도 꾸신 거예요?”
잭과 재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살아있음을 확인한 나는 쌍둥이를 와락 껴안았다.
“하, 무사해서 다행이야. 안아줘, 얘들아. 나 좀 안아줘.”
얼떨떨하게 있던 잭과 재키가 좋아라 나를 마주 안았다. 몇 초 지나자 서로 비키라고 밀어내기까지 했다.
나는 한쪽에 멀뚱히 서있는 클라인을 향해 눈짓했다.
“클라인도 안아 주세요. 저는 지금 진정이 좀 필요해요.”
“그럼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것보단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원해요.”
“…….”
“어서요.”
나는 양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클라인은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충신답게 순순히 너른 품을 내주었다.
커다란 손이 어설프게 등을 쓸었다. 서툴지만 담담한 손길을 느끼며, 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가슴,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고요.’
살았으니 됐다.
돌아온 이상, 다시는 죽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 * *
쌍둥이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골몰한 생각에 잠겼다.
‘먼저 나서서 그들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나 외에는 죽이지 않을 거야. 신수들이 접촉한 사람만을 죽여야 저주가 효력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나만 깔끔하게 죽으면 해결될 일이라는 건데…….
실비아에게 얻은 정보에 따르면 신관들이 이곳에 처음 온 날은 10일 전.
그리고 하일이 내게 미심쩍은 태도를 보인 것은 9일 전이었다.
그 날, 즉 내일 신관들이 신수 가족을 찾아갈 것이다.
‘오늘 밤까지 결론을 지어야해.’
회귀한 직후 나는 많은 가정을 떠올렸었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내가 먼저 준비했다가 칠까?
만약 그들을 여기서 전부 죽인다면?
그런다고 쉽게 끝이 날까?
확신할 수 없었다. 제국은 신수 가족을 되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죽으면 새로운 신관들을 꾸려 보낼 게 분명했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지나가는 개미 밟아 죽이듯 짓이기며, 모든 것을 통제 아래 두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었으니.
내가 맞닥뜨린 그들은 제국의 극히 일부였다.
광기에 잠식된 짐승은 팔다리 좀 다쳤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는다. 쉽게 죽지도 않는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으려면, 대가리를 쳐야한다.
그러니 기꺼이 호랑이굴로 들어가 주는 수밖에.
란슬롯에게는 던켈하이트에서 오는 길에 만나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해두었다.
미래를 알았으니 사전에 몸을 피할 수 있게끔.
-많이 고될 거예요, 란슬롯.
-괜찮습니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준비도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제게 알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염려되지만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 내가 준 정보만으로도 잘 처신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만나야 할 존재들은 정해져 있었다.
* * *
다음날 저녁. 나는 계획대로 신수 가족을 찾아갔다.
회귀 전과 다름없이, 콜린에게 줄 옷을 들고서.
“잘들 지냈어요? 하루 안 봤다고 너무 보고 싶어져서 말이에요.”
“너, 당분간은 오지 마.”
에잉. 회귀 전엔 잠깐 고민이라도 하고 말했었는데.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겠지.’
하일은 만나자마자 매몰차게 날 밀어냈다.
물론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론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나는 태연스럽게 의자를 빼고 앉았다.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신수들이 제국에서 아무리 소처럼 일만 했다지만, 300년을 지킨 나라를 등지고 고작 반년 만난 내 말을 믿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사위는 던져봐야 아는 거니까.’
사실 불신하더라도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시켜야만 했다. 그들이 내 편에 서줘야 성공시킬 수 있는 계획이었다.
나는 혹여 앞으로의 대화가 새나가지 않게 방음벽도 쳤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하일과 실버가 내 앞에 앉았다. 콜린은 실버의 품에서 곤히 잠든 채였다.
새근거리는 콜린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노아드 제국에 갈까 해요.”
“뭐하러?”
하일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뜬금없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가서 깽판 좀 치려고요.”
“얼마나.”
“아마… 황궁 정도는 폭파시키고 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일이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게 지금 우리한테 할 말이야? 비록 떠나왔더라도 우린 이노아드에서 300년을 나고 자랐어.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켰고.”
“알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지금 너를 당장 흔적도 없이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어. 그런데도 하겠다고?”
“네. 해야만 해요.”
빈틈없는 내 대답에 가만히 있던 실버도 나서 말을 보탰다.
“하일은 지상에 남은 유일한 드래곤이다. 더불어 이노아드를 수호하는 막강한 신룡이기도 하지.”
뿌드득. 하일의 팔에 검은 비늘이 돋고, 손톱이 톱날처럼 변했다.
그녀는 보라색 동공을 번득이며 내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이노아드의 수호룡이 이노아드에 깽판을 놓겠다는 말을 잠자코 들어줄 리가 없었다.
까딱하면 죽겠거니, 싶었는데.
“그래. 나 네 생각보다 강해. 그러니까, 우릴 이용해. 우린 네 편이야.”
손톱대신 날아오는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
얼굴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내게 실버가 물었다.
“제국의 신관놈들이 너한테도 찾아간 게지. 우리 곁에서 떨어지라고 협박이라도 하던가?”
“음… 그랬죠? 정확히는 죽이려고 했지만.”
하일이 이를 바득 갈았다.
“역시, 그 개자식들.”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나는 대충 말을 둘러댔다.
“근데 그게,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에요. 제가 이능력이 좀 있잖아요. 그게 가끔, 진짜 가끔, 제 미래도 보여주거든요. 보니까 열흘 후에 제가 죽더라고요. 그 신관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 손에서.”
꽉 쥔 실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린 제국을 증오한다. 벗어나고 싶어. 그들은 우릴 공허를 처리해줄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아. 다른 나라의 침략을 견제하는 용도로 쓰거나.”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내뱉는 단어.
그간 참아온 분이 행간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일은 한참이나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있다가, 노기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저주 때문에 격리당한 채 지냈어. 와중에 조금이라도 마을이 피해입거나 하면 다들 우리를 매도했지. 그거 하나 못 지키냐면서.”
“…….”
“그러다가, 몸을 피해서 비밀스럽게 지내던 거처에 네가 찾아온 거야.”
“…그렇게 이용만 당하며 살았는데도, 나한테 또 이용당하길 원한다고요?”
묻는 것조차 아픈 말.
이용하라는 그 말을, 먼저 꺼낸 건 신수들이었다.
하일과 실버가 주저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널 살릴 수만 있다면.”
“그놈들은 우리가 돌아가거나, 네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한 번 문 먹잇감은 절대 놓지 않는 집요한 새끼들이라고.”
그리 말하는 그들의 얼굴은 너무나도 씁쓸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었군요.”
신수들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모조리 죽은 게 저주라던가, 마냥 우연이었던 게 아니란 것을.
일전에 신수들과 지내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고 했었다.
-현 교황. 신성력 때문인지 우리 저주가 안 먹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정화가 된다나 뭐라나. 걔하고는 알고 지낸 지 백 년 가까이 됐는데도 멀쩡해.
-공허가 열릴 때마다 우리한테 위치를 알려주는 것도 그 사람이다.
신수 가족이 격리되어 산 시점은, 그들이 교황을 만난 시점과 비슷했다.
교황은 신수 가족을 자신의 입맛대로 사용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주변인들을 쳐내고 고립시키며, 보이지 않는 목줄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저주는 없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오욕과 점철된 거짓만 존재했을 뿐.
짧은 탄식을 내뱉는 실버의 입매가 자조적으로 비틀렸다.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 와서 널 보고 깨달은 거지. 저주 같은 건 없다고. 우릴 기어코 찾아낸 놈들을 보고 확신하게 됐고.”
그 잇새로 흘러나오는 다정한 목소리는 내 고개를 다시 들게 만들었다.
“그러니 우릴 이용해서라도 살아남아라. 너까지 죽게 할 순 없다.”
“하지만…!”
“우리가 제국으로 돌아갈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 금방 돌아가면, 한순간의 변덕으로 치부될 거야. 널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알아서 조용히 사라져 줄게.”
그렇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소중한 사람들까지 잃었으면서, 나더러 또 이용하라고?
웃기는 소리.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말아요.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앞으로도 꾸준히 당신들을 찾아올 거예요. 그놈들이 절 표적으로 삼을 수 있도록.”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너는 상관없잖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언제든… 우릴 떠날 수 있잖아.”
이 싸람들이 진짜. 날 뭘로 보고!
나는 발끈해서 큰소리로 일갈했다.
“나 안 떠나요. 상관없다고도 하지 말아요. 우리가 더 이상 그런 관계 아닌 거, 잘 알잖아요.”
“이건 우리의 일이야. 너까지 휘말리게 할 수는 없다고.”
정곡을 찔렸는지 하일의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나는 더 고집스럽게 파고들었다.
“휘말리는 게 아니라 내가 뛰어드는 거예요. 그냥 솔직하게 말해 봐요. 기꺼이 들어줄 테니까. 당신들 나한테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에요.”
“…….”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콜린은 자세가 불편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실버가 콜린을 다독이며 품으로 더욱 끌어안았다. 이내 콜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를 잠자코 바라보던 하일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정말이지 너는…….”
이번에도 회피할까 싶었는데. 신수들은 침묵을 고수하는 대신 힘겹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