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72)화 (72/185)

#72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씻겨낼 듯 거세게 쏟아졌다.

그럼에도 잭이 딛고 서있는 바닥은 선혈이 낭자했다.

눅눅한 비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여 코를 찔렀다.

사방이 온통 지독스러운 그 냄새뿐이었다. 어디가 근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제 손인지, 지금 자신을 가지고 장난감 마냥 굴리고 있는 저들의 손인지, 그도 아니라면 한구석에 싸늘하게 널브러져 있는 재키인지.

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

겨우 붙은 숨만 내쉬고 있는 잭의 머리채를 그레이가 잡아 올렸다.

“그러게 붙잡는 게 좋을 거라고 했잖아. 왜 달려들어선 굳이 피를 봐. 안 그래, 아가씨 오빠? 아니다. 이젠 죽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부르면 실례이려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애초에 부른 적이 없으니 오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쌍둥이는 그저 클라인의 복귀가 늦어지기에 나갔다가 그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온 것뿐이었다.

그 긴박한 상황에 구조요청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럼에도 메이블린이 잡혔다는 소식에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므로.

‘지난번에 빚진 목숨, 이제 갚습니다 주군.’

퉁퉁 부은 눈에 살기가 어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잭은 증오로 타오르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너,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온 살점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겨 들개들에게 던져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만들 거야.”

“그래, 그래. 뭐라 안 할 테니까 저승에서 다 해. 쌍둥이 같은데, 사이좋게 손잡고 같이 가고.”

촤악!

어둠에 섞여 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흩뿌려지고.

잭이 재키의 시체 위로 풀썩 엎어졌다.

* * *

나는 골이 띵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꽁꽁 묶인 다리가 곧장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더라?’

이마를 짚으려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도 쓸 수 없었다.

뒤로 단단히 결박된 손에는, 코어를 봉인하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제야 상황이 차차 인지되기 시작했다. 제국에서 온 신관들이 날 급습했고, 눈을 뜨니 낯설다 못해 소름끼치는 창고 안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고개를 들었다. 한구석에 란슬롯이 검게 썩어 들어가는 몸을 하고서 널브러져 있었다.

“란슬롯! 정신 차려요! 란슬롯! 내 말 들려요?”

그는 이따금 달뜬 숨만 내쉴 뿐 미동조차 없었다.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 같았다.

몸부림을 치자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슈타커가 선물로 준 머리핀이었다.

단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머리핀.

머리끝에 달랑거리던 게 운 좋게 손아귀로 떨어졌다. 나는 칼날을 소매 사이로 숨기며 밧줄을 조금씩 잘랐다.

밧줄이 내 피로 축축해졌을 무렵. 내 앞으로 검은 무리가 다가왔다.

“정신이 드나?”

무리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무감각한 눈으로 날 살폈다.

“너, 뭐야.”

“이노아드 교황청 소속 대신관, 가이즈다.”

“고귀하신 대신관님께서 날 찾은 이유가 뭐냐고.”

궁지에 몰린 상태였음에도 나는 사납게 달려들었다.

가이즈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유약한 귀족 영애일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이야.”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더니, 뜬금없는 감상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런 외진 왕국에도, 가끔씩 여행객이 오더군. 작아도 볼 건 있는 모양이지. 확실히, 바다가 꽤 아름답긴 했어.”

“헛소리 하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해. 개 짖는 소리 오래 듣는 취미는 없어서.”

가이즈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는 내가 앉아있는 나무 의자의 등받이를 짚고서 상체를 숙였다.

은밀한 말씨가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한데 카렌과 실버는 그 아름다운 경치 대신 널 택한 듯하더군. 그대한테 뭐 볼 게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자연경관이 훼손되면 여행객들은 발길을 끊고 돌아가는 법이지.”

“날 죽인다고 해도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하!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와?”

앙칼진 목소리가 첨예한 분위기를 파고들었다.

가이즈의 뒤를 지키고 있던 적갈색 머리의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꿈 깨. 신수들이 너 하나 죽는다고 눈 하나 깜박할까? 아니. 그들에게 너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야. 정말 네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찰나의 시간이라…….

일전에 하일이 했던 말이 여자의 목소리와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야, 뭘 그런 반응을 보여. 어차피 우리한테는 지나고 나면 한순간일 뿐인 시간이고, 개미 눈물만큼 사는 인간들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나는 말문이 막혀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하일에게 나는 그저 작은 왕국에서 만난 스쳐가는 행인 중 하나일 뿐일 테니까.

내 표정을 확인한 여자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지껄였다.

“게다가 드래곤일 때나 무적이지, 인간화인 상태에선 그냥 계집에 불과해. 그들을 강제로 인간화 시키는 주술을 드디어 구현해냈어. 말을 안 들으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면 된다고. 다만 최소한의 피를 묻히고 싶어서 널 죽이는 거야, 알아들어?”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개소리도 참, 정성껏 하시네.”

하일한테 내가 스쳐가는 행인이면 뭐.

실버나 콜린에게 우연히 만날 사람일 뿐이면 뭐.

‘나한테 그들은 그저 지나가는 존재가 아닌데.’

“너희, 진짜 악질적이야. 그동안 이런 식으로 신수들을 제국에 묶어놨어? 조금이라도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생기면 죽여서?”

“멍청하진 않네. 있을 곳은 제국밖에 없다는 걸 인지시켜줘야지. 안 그러면 자꾸 밖으로 겉돌거든. 신수래봤자 한낱 짐승인 주제에 왜 항상 인간들 사이에서 안식을 찾으려 애쓰는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그러니 우리가 매번 번거롭게 나서야 하잖아.”

가이즈가 뒤로 물러나고, 어느새 내게 가까이 몸을 붙인 여자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눈을 강제로 마주치게 했다.

“철없는 귀족 아가씨, 구원자 행세도 상대를 봐가면서 했어야지.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제국의 신룡이 집 지키는 개새끼정도로나 보였나 보지. 아무리 탐이 난다지만, 남의 집 개를 뺏어 가면 쓰나.”

“개새끼라고… 하하, 하…….”

실소를 터뜨리던 나는 이내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어디 똥밭에 구른 새끼들이 더러운 줄도 모르고 입을 놀려.”

“아가씨… 온실 속 화초인 줄만 알았는데 입이 꽤 험하네?”

여자는 그런 나를 철장에 갇힌 쥐가 찍찍대는 것 마냥 보며 가소롭게 웃었다.

“이걸 보고도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올 수 있을까?”

여자의 품에서 동그란 구체가 하나 나왔다.

영상구가 띄운 화면은 어둠이 내려앉은 탓에 정확히 어디인지 식별할 순 없었다.

하나 여자가 영상구를 눈앞으로 더욱 들이밀자, 익숙한 거리의 풍경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한 가지 이질적인 것이 있다면, 거리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는 것.

현재 나를 둘러싼 검은 무리들과 같은 로브를 입은 시체 세 구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있어선 안 될 두 사람도 보였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잭과 재키의 시체.

어찌나 난도질을 해놨는지 여기까지 혈향이 끼치는 듯했다. 헛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우욱.”

“아가씨, 너무 억울해 하진 마. 우리 쪽도 셋이나 죽었다고. 웬 멍멍이가 설치는 통에.”

“너… 너!”

악에 받친 목소리는 울분에 가로막혀 문장을 토해내지 못했다.

나는 되는대로 몸부림치며 여자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철썩! 철썩!

거세게 뺨을 쳐올리는 손길에 고개가 돌아갔다.

홧홧할 만도 하건만 아무런 통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죽여 버릴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악을 쓰는 사이 화면 속 풍경은 계속 바뀌는 중이었다.

피로 물든 거리를 벗어나 마지막 종착지는 슈트레커 저택이었다.

잿빛 머리의 남자가 수하들을 데리고 저택 지붕에 올랐다. 그는 지붕을 탁탁 치며 나를 가리켰다.

“거기, 잘 판단해. 자꾸 저항하면 다음은 이 아래야.”

“아, 안 돼.”

아빠와 오라버니들, 미하일 만큼은 지켜야 했다.

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얌전히 몸을 말았다.

내가 고분고분해지자 여자도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았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도 즐거워 죽겠다는 양 조잘거렸다.

“아, 듣자하니 우리 쪽 애들 죽인 놈이 지금 오고 있다네? 잘됐다, 그 놈 먼저 아가씨가 보는 앞에서 숨통을 끊은 다음에 아가씰 죽여줄게. 그럼 더 극적이겠지? 생각만 해도 벌써 짜릿하다!”

쌍둥이가 있었던 걸로 보아, 지금 오고 있다는 사람은 아마 클라인일 터였다.

잭과 재키를 잃고 란슬롯도 저지경인데다, 가족이 위협받고 있는데 클라인까지 끌어들일 순 없었다.

‘생각해, 메이블린. 생각해.’

머리가 하얗게 물들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심장이 꼭 머릿속에 들어 있어서 사방이 울리는 듯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뭘 해야만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관심 수치: 394/400%

남은 시간: 11시간 12분 09초]

그래, 이게 있었지.

나는 입 안에 고인 피를 퉤 뱉었다.

“너희들. 히어로의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법칙도 몰라? 내 가족들 건드리지 마. 신수들도 내 가족이야. 잭과 재키는, 클라인은 소중한 사람들이고.”

갑자기 180도 변한 내 기세에 가이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희같이 더러운 족속들한테 개새끼 취급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킬 거야.”

잔뜩 고였던 눈물이 마르니 시야가 한층 선명해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할 수 있는지 또렷하게 보였다.

“내 사람들이야.”

그러니 내가 지금부터 하는 미친 짓은, 온전히 내가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관없대도, 내가 상관있으니까.

나는 눈앞의 여자를 향해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곧 죽을 마당에 그런 게 궁금해?”

“어, 궁금해. 곧 죽으니까 누구한테 죽는지 정도는 알아도 되잖아.”

“…실비아 호른이다. 이거 진짜 이상한 년이네.”

실비아는 내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나는 버팅기지 않고 그녀의 손길대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암만 그래봐라.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죽어도 예상 못할 거다.’

“좋아, 실비아. 그럼 나이, 사는 곳, 자주 머무르는 장소, 이곳에 온 날짜, 가족과 친구 관계는?”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질문에 실비아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젖혔다.

“하! 내가 그런 걸 말해줄 것 같…….”

[스킬 박수갈채(Lv.2)가 발동됩니다!]

[1분간 ‘실비아 호른’이 당신의 행동에 동조합니다.]

스킬창이 사라지자마자 실비아가 자신의 인적사항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물렸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이름 실비아. 올해 스물 넷, 키는 나랑 비슷하고 녹색 눈에 적갈색 머리. 교황청에 거주하며 외동에 말투는 조금 싸가지 없음, 동료 신관 그레이와 친밀하고 열흘 전에 도착함.

오케이, 접수 완료. 이제부터 돌려줄 시간이다.

길고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난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철없는 실비아, 악당 행세도 상대를 봐가면서 했어야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실비아의 인상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너희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나는 아까부터 조금씩 잘라내고 있던 밧줄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단도가 된 머리핀엔 핏물이 발갛게 배어 있었다.

‘아, 이렇게 쓰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그들을 향해 단도를 겨누며 천천히 일어났다.

실비아를 비롯한 신관들은 그런 날 보고 허리까지 꺾으며 깔깔대기 바빴다.

“왜, 과일이라도 깎으시게?”

“멍청한 짓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군.”

나는 칼날의 방향을 서서히 돌렸다.

정신없이 웃음소리가 쏟아지던 공간이 한순간에 적막으로 물들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 칼로 널 찌르기라도 하려고? 진짜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멍청한지는, 대 봐야 알겠지.”

[관심 수치: 399/400%]

나는 어벙한 얼굴로 서있는 그들을 향해 있는 힘껏 상큼하게 웃었다.

“딱 기다려, 개 같은 새끼들아.”

다시 볼 땐 니들이 죽을 테니까.

푹. 칼날이 심장께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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