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능청스럽지만 날이 선 어투가 공기를 베어냈다.
“같은 수도에 사니까 우리보다는 친분이 있을 것 아니야. 너랑은 사이가 그닥 나쁘지도 않았고.”
실비아는 란슬롯의 뺨을 두어 번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가서 좀 데리고 와봐. 적어도 내쫓지는 않겠지. 우리도 최대한 곱게 처리하고 싶어서 그래.”
곱게? 그 단어만큼 이들과 안 어울리는 게 또 있을까.
란슬롯은 조소를 터뜨렸다.
“제국에서는 이미 절 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섭하게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얼마나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인데. 잘 지켜야지, 성유물.”
‘저리도 뻔뻔할 수가.’
꽉 말아 쥔 란슬롯의 주먹에 핏발이 섰다.
성유물을 핑계로 외딴 곳에 자신을 버렸다는 걸 지금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지그시 악문 턱을 본 실비아가 얄궂게 웃었다.
“이번 일만 잘 완수하면 너도 그 공을 인정받아 다시 이노아드로 복귀할 수 있을 거야. 잘 생각해봐. 너는 출세하고, 우리는 임무 완수하고. 서로 손해 볼 거 없잖아?”
“저는 더 이상 제국민이 아닙니다. 에임의 국민입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하, 이게 말귀를 못 알아먹네.”
좀처럼 굽힐 줄 모르는 란슬롯의 고집불통 태도에 실비아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두꺼운 벽에 대고 말하는 게 이보단 나을 듯싶었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야, 우리도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다 신녀님의 뜻이라서 그래. 그분은 언제나 옳으니까. 틀리는 법이 없다고.”
신녀? 란슬롯의 단정한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몇 달 전에 제국에 신탁을 받은 여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다.
막강한 신력과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으로 단숨에 황제는 물론이고 민심까지 사로잡았다던 여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여태 보여준 행보는 겉으론 기적 같아 보일지 몰라도 끝은 언제나 교황의 뜻과 일치했었다.
결국 둘이 판을 짜고 일을 벌이고, 무지한 황제와 국민들은 그에 놀아나는 것일 테다.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 란슬롯은 그들을 한껏 비웃었다.
“신녀…? 하! 고작 몇 달 전에 나타났다는 그 사기꾼 말입니까?”
“말조심해라, 란슬롯.”
신녀가 언급되자 잠자코 뒤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던 가이즈가 나섰다.
“네 놈이 그 천한 입에 함부로 올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대단한 광신도들 납셨군.’
란슬롯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곧장 그에게 박혔다.
“정당성을 잃은 교황에 이어, 이젠 누군지도 모를 여자까지 함부로 섬기는 겁니까?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셈입니까? 악취에 익숙해져서 본인들이 썩은 지도 모르는… 윽!”
퍼억! 단단한 주먹이 란슬롯의 뺨을 후려쳤다.
“입 닥쳐,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놈이 뭘 안다고 지껄여.”
흉흉한 인광이 실비아의 눈동자를 맴돌았다.
신녀에 관해 한 마디라도 더 내뱉었다간 아예 란슬롯을 죽일 심산이었다.
그것은 가이즈를 비롯해 다른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공기가 그의 목을 옥죄였다.
그러나 란슬롯은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터진 입술에 맺힌 핏방울을 닦아내고서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것이 설령 신이라도.”
“이 더러운 변절자 새끼…!”
실비아가 다시 한 번 더 주먹을 날렸다. 란슬롯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세차게 돌아갔다.
퍼억, 퍽. 무차별적인 폭행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란슬롯은 피하지도, 막지도 않으면서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에 몸이 꺾이는 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만.”
가이즈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때 하나 묻지 않은 구두는 숨을 헐떡이는 란슬롯 앞에 다다라서 멈췄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구나.”
차갑게 굳은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적나라한 모욕감을 이겨내기 위해 란슬롯은 이미 엉망이 된 입술을 더욱 짓씹어야만 했다.
“그래, 네 말대로 해주마. 이제 아무리 엎드리고 빌어도 너는 두 번 다시 이노아드를 밟지 못할 것이다. 평생 그깟 성유물이나 끌어안고 살거라.”
“원하던 바입니다.”
란슬롯이 꿋꿋하게 대답했다.
원수들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있을지언정 가이즈를 올려다보는 눈만큼은 발간 불꽃이 어른거렸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가이즈는 노기를 숨기지 않고 몸을 돌렸다.
신전은 다시 썰렁해졌다. 신관 무리가 전부 나가고서야 란슬롯은 힘겹게 일어났다.
“흐읍…!”
욱신대는 근육들이 아우성을 쳤으나 신성력으로 고통을 잠재웠다.
그보다는 더욱 급한 것이 있었다.
‘메이블린 아가씨에게 알려야 해.’
메이블린은 일전에 자신을 방문했을 때 신수들의 존재에 대해 함구해 달라 부탁했었다.
상당히 간절했던 것으로 보아 제법 가까운 사이일지도 몰랐다.
신관들은 당분간 신수들의 주변을 탐색하는 기간을 가질 테니,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기까진 아직 시간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안에 언질을 주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란슬롯은 신전을 나섰다.
그러나 채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윽…!”
허리께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옷자락이 붉은 피로 축축하게 물들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짙은 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너라면 이럴 줄 알았지. 기다리고 있길 잘했네.”
옆구리에 칼을 박아 넣은 실비아가 상기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려고 했어, 응?”
반면 란슬롯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점점 창백해져갔다.
메이블린이 관련된 일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성급하게 굴고 말았다.
‘젠장… 너무 안일했어. 손속에 자비가 없는 놈들이었는데.’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등골이 삐걱거렸다. 온 신성력을 쏟아 부어도 회복이 더딘 걸 보니 상급 마물의 독이라도 쓴 모양이었다.
“흐암, 밤 새느라 힘들었다. 졸려서 죽는 줄 알았네.”
실비아는 기지개를 쭉 피며 곁에 있는 하급 신관에게 명령했다.
“일 마무리 될 때까지 가둬놔. 허튼 짓 못하게 계속 독 투입하고.”
“이 정도면 치사량인데요…?”
그녀가 던진 독약을 받아든 신관이 양을 확인하고 입을 떡 벌렸다.
실비아는 귀찮으니 더 말을 얹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저 놈 쉽게 안 죽어. 신성력이 교황님보다 더한 놈이라고. 그 정도는 써야 맥을 못 추리지.”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괜히 정신 말짱해서 골치 아파 지는 건 사양이야.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조차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가지 못할 만큼 만들어야 해. 알았어?”
“넵. 알겠습니다.”
“그럼 가 봐. 나도 대신관께 보고하러 가야하니까.”
꾸벅 인사한 신관이 축 늘어져 있는 란슬롯을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남은 붉은 줄을 보며 실비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보고를 위해 가이즈를 만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제 어쩔 수 없네요, 가이즈님. 가지 좀 치셔야 겠는데요.”
뒤돌아 앉아 있던 가이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대답이 돌아왔다.
“감시가 끝나는 대로 작업을 시작한다. 한 명도 빠뜨리지 말고 조사해.”
실비아는 희열감에 젖어 입꼬리를 올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 * *
타다다닥.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짙은 외투를 뒤집어 쓴 무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일주일에 걸쳐 신수들의 행동반경을 조사한 감시팀이 하나 둘 은밀하게 본거지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본래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조사한 뒤 신수들이 지속적으로 접촉한 이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현재 제국에서 출몰하는 마물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그러니 일주일동안 접촉한 이들만이라도 없애야 했다. 신수들은 그 정도에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것이었다.
백 년 넘게 세뇌되다시피 겪어온 ‘저주’가 또다시 발현되었다면서.
감시팀을 이끌었던 신관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복귀해 가이즈에게 보고했다.
“이름은 메이블린으로, 슈트레커 자작의 네 자식 중 셋째이자 왕실 수석 사무관이었습니다. 마탑과 유일하게 교류를 하는 마법사라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는 귀족 영애입니다.”
저주를 내심 꽤나 두려워하곤 있었는지, 신수들이 만나는 사람은 메이블린 슈트레커. 그 여자가 유일했다.
가이즈는 의자 등받이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 외에 주의할 만한 움직임은 없었나?”
“던켈하이트라는 마을에도 종종 들리는 듯했으나, 찻집에서 시간을 때우다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신수들과의 관계는?”
“몇 번 만나진 않았지만 그 사이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돈독했습니다.”
가이즈의 입매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돈독한데다 유일한 관계라…….’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이 없었다.
그녀만 죽이면 신수들은 제 분수를 깨닫고 필시 자발적으로 제국에 기어들어올 것이다.
그 예상에 확신을 주듯 그레이가 보고를 이어나갔다.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저택의 명의도 그 여자의 것이었습니다. 신수들 역시 그녀를 잘 따르는 듯 보였고요.”
에임.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잘 모르던 작은 왕국이었다. 패권을 쥐기보다는 이리저리 휘둘리기 바쁜 나라.
그런 약소국에 최강 병기나 다름없는 신수들이 나타났으니 오죽할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붙들고 싶겠지.
어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절대 그 뜻대로 되게 둘 순 없었다.
이젠 별수 없이 정리를 시작하는 수밖에.
‘다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신룡.’
음산한 목소리가 가이즈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잡아서 데려와.”
* * *
뭔가 이상했다.
어둑한 시간대와 음산한 골목이 주는 기분일지는 몰라도, 괜스레 뒤가 찜찜했다.
내일이 콜린 생일이라기에 선물만 얼른 사서 돌아간다는 게,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체돼버렸다.
‘뭐야, 왜 이렇게 깜깜해. 너무 외딴 곳으로 들어왔나.’
나는 조금 번거롭더라도 구석진 골목에서 마법을 쓰곤 했다.
넓은 거리에서 갑자기 텔레포트하면 사람들이 놀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막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든 것인데. 기민해진 감각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나는 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나와라.”
휘오오-
썰렁한 바람이 골목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허공을 지그시 응시했지만 내 근엄한 선포가 무색하게도, 낙엽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헤헷.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그렇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인영이 시야에 가득 찼다.
“당신 누…!”
퍽! 뭐라 정체를 묻기도 전에 단단한 뭔가가 뒤통수에 직격했다.
잠깐 나왔다 들어갈 요량이었던 터라 하필이면 루치펠이 준 목걸이도 놓고 온 상태였다.
나는 부질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