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저주를 깨뜨리는 죽음
#68
잭이 오픈한 가게는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수도의 유명한 제과점과 비견할 만큼 맛이 좋다며 입소문을 탔다.
장사는 자연스레 날이 갈수록 잘 되었고, 나는 수많은 손님들 중 어엿한 우량고객이 되었다.
오늘도 대량으로 디저트를 구매해 마탑에 가지고 가는 길이었다.
마탑에 도착한 나는 짐을 풀어놓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치펠이 안 보이네요? 이디스도.”
“아, 둘 다 임무 나갔어요.”
“오, 같은 임무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탑주님은 왕족 의뢰라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쳇. 아쉽다. 같은 임무면 둘이 더 가까워질 기회가 생길 텐데.
나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부드러운 흰 빵에 생크림을 찍어먹었다.
그렇게 한창 마법사들과 모여앉아 디저트를 즐기고 있을 때, 이디스가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터덜터덜 걸어왔다.
“어, 메이 왔어요? 반가워서 포옹이라도 하고 싶지만, 지금 제 꼴이 말이 아니네요.”
이디스는 탁자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 앞에 요거트로 만든 푸딩을 밀어주며 벤이 물었다.
“이디스. 요즘 제국에 자주 가네?”
물컵을 탁 내려놓고 푸딩을 한 입에 털어 넣은 그녀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말도 마세요. 요즘 들어 공허가 열리는 빈도가 부쩍 증가하기라도 한 건지, 허구한 날 공허 수습하느라 죽겠어요.”
“아, 맞아. 나도 몇 번 갔다 왔어.”
“근래 제국에서 오는 의뢰는 죄다 공허 관련이라고요. 갑자기 마기가 몰리기라도 하나?”
옆자리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나는 그것이 공허발생 빈도가 늘어났다던가, 마기가 몰려서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야, 마물 처리 일등 공신들과 같이 지내고 있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앞장서서 처리해주던 공신들이 사라지니 급한 대로 마법사들이라도 불러 마물을 해치우는 모양이었다.
나는 땅콩 크레페를 오물거리며 신수 가족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헤아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반년이 넘었네. 나야 좋지만,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이노아드 제국에서 신수 가족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허 수습이었다.
제국은 영토가 넓은 만큼 타국에 비해 공허 발생 빈도가 조금 잦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도 문제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는 신룡과 늑대신수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들이 종적을 감춘 지금. 제국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일과 실버의 말에 따르면, 공허를 처리하는 기사단과 신관들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자신들에게 대부분 의존한 상태였다고 했다.
신관 여러 명이 달라붙어 몇 시간 동안 끝낼 것을, 자신들이 나서면 십 분도 안 되어 종결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면서.
“아무래도, 신수들이랑 무슨 마찰이 있긴 있었나 봐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제 신세에 대해 한탄을 늘어놓던 이디스가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는 길에 좀 알아보니까, 마지막 목격담이 나온 게 벌써 반년 전이래요. 제국을 지키는 수호룡이니 도망쳤을 리는 없고. 아예 더 꽁꽁 숨어버린 걸까요?”
“글쎄… 워낙 제국에서도 쉬쉬하는 존재들이라 자세한 건 아무도 모르지. 아무튼, 의뢰 강도가 세지면 탑주님이 곧 알아서 거르실 테니 걱정하진 마.”
…아이구야.
양심이 찔려 더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정말 얄궂게도, 근처 산책로로 나오자마자 루치펠을 맞닥뜨렸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제법 격식을 차린 옷차림이었다.
“시간 좀 걸릴 거라고 들었는데. 벌써 다 끝냈어?”
“아니. 그냥 와버렸어.”
“뭐? 그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되는 거야? 왕족 의뢰라며.”
“호위를 핑계로 자꾸 들러붙잖아. 국왕이 하도 간청하길래 들어줬더니만. 왕녀가 뭐 별거라고 알짱대는 게 너무 성가셨다고. 더 있다간 죽여 버릴 것 같아서 왔어. 졸부님도 내가 사고치는 건 싫잖아, 그치?”
아무래도 루치펠에게 반한 왕녀가 일부러 호위 의뢰를 맡기고 구애 작전이라도 펼친 모양이었다.
루치펠 성격에 얌전히 온 것은 다행이지만,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하나.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대화를 이었다.
“근데 웬일이야. 졸부님이 먹는 걸 다 마다하고 나와 있고?”
“어떻게 알았어?”
“이디스가 알려줬어. 아마 산책로로 나간 거 같다기에 와봤지.”
아니, 여주야. 나랑 루치펠을 엮으면 어떡해. 루치펠이 그렇게 싫나? 다른 남주 후보를 찾아봐야 하나?
이것저것 머리가 복잡해져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안 먹고 말지.”
한숨 섞인 푸념에 잘만 가던 걸음이 뚝 끊겼다.
루치펠이 느닷없이 내 시야에 끼어든 탓이었다.
오늘따라 더 멀끔한 얼굴을 슬쩍 기울이면서 그가 말했다.
“왜,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죽여줘?”
“…루시는 왜 맨날 결론이 그런 식이야.”
“그게 제일 편하니까.”
으, 이놈을 어쩌면 좋지.
나는 절로 좁혀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떴다.
“가끔은, 아니 대부분의 것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죽이지 않는 쪽을 더 선호해. 대화나 다른 수단들로 갈등을 풀지.”
“왜?”
“그게 관계를 망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죽이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졸부님이 그렇다니까.”
“말 잘 듣네. 저번처럼 또 해줘?”
루치펠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는 것 마냥 손을 뻗었다.
잘 정돈된 보드라운 흑발이 내 손바닥 밑에서 흐트러졌다.
아, 이거 중독되면 어쩌지.
* * *
이노아드 제국, 에스콰이아 숲 중앙부.
아름드리나무가 우지끈 허리를 꺾으며 쓰러지고, 그에 깔린 상급 마물 그리핀이 괴성을 내질렀다.
“오늘따라 상급 마물이 왜 이렇게 많아. 쯧.”
“이 놈이 마지막이야.”
긴 칼날이 그리핀의 몸체를 거침없이 꿰뚫었다.
공허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들과의 전투도 어느덧 끝자락이었다.
키에에에엑…….
마침내 그리핀이 검은 액체를 줄줄 흘리며 쓰러지고, 공허가 닫히기 시작했다.
긴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풀썩 엎어진 마물의 사체에서 낑낑거리며 발을 뺐다.
로브에는 제국 교황청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하 씨, 더러워.”
여자는 마물의 체액이 묻은 옷자락을 탈탈 털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악취에 토악질은 덤이었다.
“우웩, 이게 뭔 고생이야. 간만에 여행이나 좀 떠나려고 했더만 쉬지도 못하네.”
그녀의 볼멘소리에 공허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앞을 지키고 서있던 남자가 음산하게 경고했다.
“한가한 소린 집어치워라, 실비아.”
“쳇. 짜증나서 그렇죠. 귀찮은데 마법사들이라도 부르면 안 돼요? 저번에 그 이디슨가 뭔가 하는 애 실력 좀 괜찮던데.”
“입 조심해라. 다시 한 번만 더 마탑에 의뢰를 넣었다간 너부터 처리하겠다. 그쪽에서 의심하기라도 하면 괜한 억측이 새나갈 수도 있어. 여지조차 줘선 안 된다.”
“넵. 아무렴요. 명심하겠습니다.”
농이라도 지껄였다간 그대로 땅에 얼굴이 처박힐 것만 같았다.
무시 못 할 살벌한 기세에 실비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하여간 저 목석같은 놈. 대신관이면 다야? 그렇게 꼿꼿하다가 언젠가 부러질 거다.’
앞에선 개길 수 없으니, 속으로라도 불운을 빌어주는 수밖에.
툴툴거리며 너른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그녀는 전투 중에 생긴 상처들을 확인했다.
곧 푸른빛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뭉쳐지다 상처 위를 덮었다.
같이 공허를 수습한 동료들도 하나 둘 주저앉아 몸을 회복했다.
직전 마물과의 전투에서 능한 싸움실력을 보여줬던 그들은 신성력 역시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이노아드 제국의 교황 직속 수하, 성기사단 출신 신관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상급 마법사와 비견할 만한 실력자였다.
더불어 조금 전 실비아를 타박한 사내, 가이즈는 제국에 몇 없는 대신관들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보이는 자였다.
때문에 웬만한 비상사태가 아니고선 좀처럼 나서는 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신수들의 부재로 앞장 서 공허를 처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사라졌다는 일말의 소문도 퍼져나가선 안되었다.
설령 자신들이 신수들을 대신해 마물의 체액을 뒤집어쓰며 진흙탕에서 구르는 한이 있더라도.
제국을 지키는 신룡이 제국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륙 전체가 그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달려들 것이었다.
교권의 추락은 자연스럽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테고.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해.’
가이즈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뒤에서 한창 부서진 잔해들을 치우던 짧은 잿빛 머리의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겉옷을 벗어던졌다.
그을음이 묻은 하얀 로브가 홱 날아갔다.
“그놈의 드래곤인지 늑대새낀지 나타나기만 해 봐. 이번에 주변정리 확실하게 해서 아주 떠날 생각을 담지도 못하게 해야겠어.”
치료를 마친 실비아도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불평을 토해냈다.
“그니까, 신수면 신수답게 제국을 지켜야 할 것 아니야. 태어나길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놈들이 왜 이렇게 밖으로 나도는지 모르겠다니까. 죽은 듯이 처박혀 있다가 공허나 좀 처리해주고 들어가면 좀 좋아?”
그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피곤해서 말을 삼가고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생각은 같았다.
‘하루빨리 신수들을 찾아야 한다.’
제국에 공허가 열릴 때마다 쏟아지는 마물들을 처리해주던 신룡과 늑대 신령.
그들은 잠시 휴가를 떠난다는 쪽지만 남겨둔 채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후에 닥치는 대로 수소문했지만 대체 어디로 숨은 건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모두가 그동안 신수들에게 의존하고 있던 터라 한시바삐 되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한창 투덜거리며 잔해를 수습하고 막 자리를 뜨려던 찰나.
정보를 얻기 위해 대륙 각지로 보냈던 사제 중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차, 찾았습니다!”
우렁찬 외침에 시선이 삽시간에 그에게로 쏠렸다.
대신관 가이즈가 신관들을 밀치고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어디냐.”
사납게 긁는 저음에 사제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에, 에임 왕국의 헤스턴우드에서 흑염에 그을린 지대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에임이라… 참 엄한 곳에도 숨어 계셨군.’
가이즈의 손아귀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사제는 졸린 목덜미를 문지르며 가쁜 숨을 켁켁 몰아쉬었다.
아랑곳 않고 몸을 돌린 가이즈는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신관들에게 일갈했다.
“당장 출발하지. 다들 준비해.”
성큼성큼 앞서는 그의 입매가 음습한 희열감으로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