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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64)화 (64/185)

#64

루치펠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만 들어가서 자. 데려다줄게.”

“여기가 내 집잉데 가긴 어딜 가아…….”

“알았어, 그럼 방으로 데려다줄게. 내가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가 않거든. 내 다리를 끊어서라도 참아는 볼 텐데, 너한테 실수하고 싶진 않으니까 나 좀 도와주라.”

몸이 달았지만 선은 지킬 수 있었다. 지켜야만 했다.

그녀는 너무도 소중하고 소중해서, 차라리 자신을 죽일지언정 털끝하나 손대고 싶지 않았다.

메이블린을 좋아하는 만큼 아껴주고 싶었다.

비록 그 상대가 자신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사이를 파고드는 뜨거운 숨이 사고를 잠식해, 루치펠은 딱 죽을 맛이었다.

“졸부님은 진짜 나한테 너무하단 걸 알아야 해.”

실랑이가 계속될수록 정신이 아찔해지고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끼쳐오는 술냄새에 꼭 저까지 취한 기분이었다.

‘미치겠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한참이나 웅얼대던 목소리가 멈췄다.

메이블린은 드디어 루치펠의 품에서 벗어나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라따, 알아써어. 간다, 가아… 기찮게 안 한다 이거야… 어이쿠, 무슨 방 한가운데 계단이 있냐.”

호기로운 기세로 대꾸한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바닥 위를 제자리걸음을 걸으며 올라갔다.

‘저걸 어쩌면 좋아.’

루치펠은 이마를 짚었다.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이 절로 새나왔다.

“하…….”

인내심을 길러주는 마법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왜 그런 마법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서, 하도 살점을 짓씹느라 입안이 다 헐어야만 하는지. 스스로에게 원망마저 들었다.

‘내가 앓느니 죽지.’

몇 번이나 애닳는 속을 다스린 그는 이내 메이블린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승차감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그의 품에서 곯아떨어졌다. 엷은 숨소리가 새근새근 흘러나왔다.

반면 루치펠의 심장은 그칠 줄 모르고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 박동이 어찌나 큰지, 제 심장소리에 그녀가 깰 것만 같았다.

루치펠은 서둘러 메이블린의 침실로 텔레포트했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뉘이고 목 끝까지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는 몰라도 메이블린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루치펠은 그저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참 예쁘게도 자네.”

낯간지러운 말이 잘도 튀어나왔다.

간질간질 할 정도로 흡족한 감정이 온몸을 빠듯하게 꽉 채웠다. 이런 사소한 행동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는 작은 새처럼 곤히 잠들어버린 메이블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자마자 불현듯 스스로에게 던져진 물음 하나.

‘내가 너 없이 살 수 있을까.’

단순히 좋아하는 것과 곁에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냐는 건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애정이었다.

난데없이 던져진 물음을 고민하고 있자니, 문득 몇 년 전 결혼해서 마탑을 떠난 마법사 녀석이 떠올랐다.

결혼식 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그에게 무심코 물었었다. 널 바쁘게 하는 모든 것이 성가시지 않느냐고.

그 때 어떤 대답이 돌아왔더라.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라고 했던가?

-널 좋아해, 와 네가 없으면 안 돼, 는 다른 거더라고요. 그렇게 오글거린단 표정으로 저 보셔도 어쩔 수 없어요, 탑주님. 저는 샬럿 없이는 못 살아요. 어느새 그렇게 돼버렸어요. 탑주님도 나중에 그런 사람 만나면 알게 될 거예요. 그 차이를.

녀석은 두 귓불이 빨개지도록 수줍게 답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었다.

벤은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누구보다도 더 길길이 날뛰었었지만.

기억이 그에까지 미치자 루치펠은 메이블린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고심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그의 인생에서 그녀가 사라지면 어떨 것 같냐 묻는다면, 허전한 것을 넘어서 쓸쓸할 것 같았다. 그것도 꽤 긴 시간동안.

‘갑자기 있던 조각이 빠지면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

외롭고, 그립고, 또 조금은 보고 싶을 것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떠올려본 루치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얕은 감정만으로 치부하기엔, 지금까지 쌓아온 마음이 너무 깊었다.

메이블린이 떠난다면 슬플 것이다.

아주 아주 많이, 슬플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끔찍할 만큼, 어쩌면 미쳐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멀쩡하게 살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예 모든 걸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없어야만 해. 그렇게 만들 거야.’

메이블린이 먼저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그가 먼저 그녀를 놓지는 않을 테니까.

루치펠은 달이 조금 더 기울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다가, 이내 일어섰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베일처럼 창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고요한 적막 가운데 문득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는 소리 없는 절규를 삼키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아, 젠장.’

여전히 메이블린의 입가를 맴돌고 있는 미소를 보며 루치펠은 다시금 깨달았다.

설령 그녀가 자신을 떠난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녀를 결코 놓을 수 없을 것이란 걸.

* * *

“으, 머리야…….”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눅진눅진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뭔가 되게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났다.

그래도 이렇게 얌전히 침대에서 일어난 걸 보면, 잔뜩 취한 와중에도 알아서 침대로 기어들어가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리아의 타박을 피할 순 없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아가씨. 술병으로 성도 쌓겠어요.”

문을 열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난장판에 달리아가 기함을 토해냈다.

음,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어제 술판을 좀 과하게 벌이긴 했네.

뭐라 변명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유능한 하녀답게 빠릿빠릿하게 바닥을 치우고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거울 좀 보세요, 아가씨.”

“헉.”

하마터면 달리아가 쥐여 준 거울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이라인이 번져 눈은 판다요, 립스틱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조커마냥 귀 밑까지 올라가 있고, 머리는 성게 저리가라 삐죽삐죽했다.

이 꼴을 달리아만 봐서 참 다행이었다.

다른 누군가 봤다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사람 꼴로 돌아오는 사이 방은 언제 그런 난장판이 있었냐는 듯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아마 달리아에겐 청소 스킬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씻는 동안 시스템을 썼을 거야, 암.’

엄한 생각에 빠져 미적미적 옷을 입는 내게 달리아가 소식을 전했다.

“아가씨. 마탑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이디스야?”

“네.”

이디스는 임무를 끝내고 마탑으로 돌아갈 때마다 꼭 나를 만나 각 나라에서 산 기념품 따위를 주곤 했다.

그렇게 종종 들린 터라, 매번 중간에서 소식을 전해주는 달리아도 이디스를 친숙해했다.

나 역시 반가운 마음으로 이디스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념품 따위를 주려고 온 게 아닌지,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메이. 혹시 어제 마탑에 다녀갔어요?”

“축제 기간이라 어제는 왕실 연회에 참석하느라 바빴는데. 왜?”

“그럼 탑주님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아는 거 있어요?”

“아니. 루치펠이 어디 아프기라도 해?”

한겨울에 맨몸으로 내놔도 감기 한 번 안 걸릴 것 같은 녀석이 무슨 일이기에 그러지?

짧게 한숨을 내쉰 이디스는 반쯤은 혼란스럽고 반은 역겹다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그게… 머리가 좀 아프신 거 같아요. 오늘 아침에 보니까 기어이 미치신 거 같더라구요. 세상에, 볼에 누구 건지 모를 입술 자국을 달고 돌아다니는 거 있죠?”

“뭐? 이, 입술 자국?”

그 얼굴에… 입술 자국…?

확실히 루치펠이 미친 게 아닌가 의심되는 내용이었지만 그 절경을 놓칠 수야 없었다.

안 그래도 요사스러운 애가 입술 자국까지 달고 있으면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크겠어.

바빠서 자연경관도 제대로 구경 못하는데, 그런 절경이라도 구경해야지 싶었다.

나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이디스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가자, 마탑.”

* * *

와, 대박.

실제로 마주한 절경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끝내줘서 나는 떡 벌어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루치펠은 이디스가 말한 대로 뺨에 붉은 입술 자국을 매단 채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졸부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고.”

“어? 그게…….”

이대로 루치펠을 내보냈다간 남녀노소 불문하고 구혼자들의 꽃다발이 빗발칠 것 같았다.

그건 그것대로 또 상상이 되어서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쏟아지는 꽃송이 안에 푹 파묻혀 있을 모습도 엄청나겠지? 뭐, 저 얼굴에 안 어울리는 게 있기야 하겠느냐마는.

나는 부러 건들거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여어~ 누군 파혼했는데 여친도 생기구 말이야~ 아주 살맛 나~ 어?”

다소 40대 아저씨스러운 웃음을 껄껄 짓는데, 루치펠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파혼했다고?”

“아, 말 안 했었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진 말…….”

“축하해.”

아무리 신경 쓰지 말라고 했기로서니, 위로가 아니라 축하를 한다고?

그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한 쪽 눈썹을 찌푸렸다.

“놀리는 건지 정말 축하하는 건지 헷갈리는데.”

“진심이야. 잘했어, 졸부님.”

“그게 잘한 일은 아니지 않나…?”

“아냐. 다른 애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반문하기에 앞서 루치펠이 문 쪽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리고, 산사태처럼 마탑 식구들이 방바닥으로 쏟아졌다.

‘…다들 엿듣고 있었던 거냐고.’

“아야야…….”

모두가 신음하는 와중에 인간 탑 맨 위에 엎어져 있던 이디스가 고개를 팩 들었다.

“축하해요, 메이블린!”

이디스의 목소리를 선두로 깔려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저마다 축포를 터뜨리듯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정말 잘됐어요!”

“파티해요!”

“와아아!”

뭐야, 다들 왜 이래. 세뇌라도 받은 거야? 마탑은 파혼하면 축하파티 열어주는 관습이라도 있어?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루치펠을 돌아봤지만 그는 벌써 딴 세상에 가있었다.

“날씨도 좋은데, 파티는 밖에서 할까?”

루치펠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우리는 모두 보드라운 풀밭 위로 이동했다.

얌마, 왜 이럴 때만 행동대장으로 변신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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