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적막 가운데 쫄쫄거리는 소리만 잔으로 떨어졌다.
“후작님. 이번엔 후작님이 원하셨던 건배 한 번 할까요? 여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나는 두 번째 잔 역시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이러는데, 먼저 제안한 후작이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그는 마지못해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씨근덕대는 그의 얼굴은 말라비틀어진 꽈리고추처럼 파들거렸다.
그러게 자기도 못 마실 걸 왜 우리 아빠한테 줘, 어?
“여신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자린데, 한 잔으론 부족하시죠? 한 번 더 건배해요.”
“아, 아니 영애, 난…….”
“아이, 사양하지 마시구요. 우리 후작님께 이 정돈 물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갑작스런 기행으로 주변은 보는 눈이 쫙 깔려있었다.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는 양반이 물러날 수가 없었을 뿐더러, 내 스킬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스킬 박수갈채(Lv.2)가 발동됩니다!]
[1분간 ‘드렁큰 무어’가 당신의 행동에 동조합니다.]
“그럼 건배-!”
후작이 울상을 지으며 연거푸 잔을 들이키고, 나는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단 한 잔이면 성인 남성을 자빠뜨리기에 충분하다는 독한 액체가 시원스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무어 후작은 그새 술기운이 올랐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경악스럽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건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저걸 어찌…….”
술병을 채운 액체의 높이가 점점 낮아질수록 수군거림은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이윽고 병이 완전히 바닥을 보이고.
탁.
빈 병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은 나는 무어 후작을 가소롭다는 듯 내다봤다.
그리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어딜 까불어, 까불긴.’
삽시간에 동상처럼 굳어버린 사람들을 제치고, 나는 윌리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아빠.”
벙찐 표정으로 있던 윌리엄이 얼떨결에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나는 거침없이 직진했다. 뭉쳐있던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갈라섰다.
다니엘과 노아, 미하일은 나와 윌리엄을 호위하듯 에워싸며 뒤따랐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술렁임이 들러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음껏 떠들으라지. 누구든 우리 가족 건들면 주옥 되는 거야, 알겠어?’
* * *
중앙 홀이 난데없는 신경전으로 한창 술렁일 때.
위층 발코니에선 검은 두 인영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알아서 처신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곁에서 들려오는 슈타커의 차분한 목소리에 칼리안은 날뛰는 속을 가라앉혔다.
그녀가 옆에서 제지해주지 않았다면 답지 않게 과한 태세를 취할 뻔했다.
‘언제나 이성을 최우선으로 좇던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스스로가 곱씹어 봐도 우습고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슈타커는 잠시 바람을 쐬러 테라스로 나왔다가 칼리안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갔다.
메이블린이 사이에 낀 소동을 발견한 그는 금방이라도 연회를 파토낼 작정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왕세자와 엮인 것 때문에 메이블린이 지금 무어 후작의 시비를 받는데, 칼리안이 나서봤자 나아질 건 없었다.
당장은 소동을 종결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후에 더 큰 추문과 가십거리가 그녀를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슈타커는 메이가 피곤해할 상황은 손톱만큼도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굉장한 무례임을 알면서도 다급하게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전하께서 나서시면 상황이 더 꼬일 수도 있습니다. 메이도 그를 원하지는 않을 테고요. 일단 지켜보시지요.”
“공작께선 메이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군.”
“잘 모릅니다.”
“한데 주저 없이 확언하겠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그대에게도 책임이 돌아가리란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공작.”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껄끄럽게 쏘아지는 시선에도 슈타커는 단호했다.
“아직 메이를 잘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그녀와 저 사이에 쌓아온 것들만큼은 압니다. 그러니 그저 믿는 겁니다.”
“그저 믿는다고?”
“예. 저런 어쭙잖은 시비에 넘어지기엔, 메이는 너무 단단한 사람이니까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메이블린은 칼리안의 도움 따위는 걸리적거렸을 만큼 상황을 그녀의 주도로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더 볼 것도 없이 소동은 무어후작의 완벽한 패배로 종결되었다.
칼리안은 이리 될 줄 알았다는 슈타커의 미소를 보며 짧은 생각에 잠겼다.
저 철혈의 공작까지 웃게 만드는데, 자신이 잠깐 이성을 제쳐두는 것쯤은 별수 없는 일이 아닐까.
칼리안의 보랏빛 시선이 슈타커에게 닿았다.
“그대는 어찌 그리 믿을 수 있는 건가?”
“절친한 친우이기에 그렇습니다.”
“친우라…….”
한참이나 그 단어를 곱씹던 칼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서 덜컥 튀어나와버린 얄쌍한 속마음 한 조각.
“나 역시 그리 남는 게 좋았으려나.”
자신 역시 차라리 친우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았을까 싶으면서도, 막상 그녀를 보면 그 다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짙은 욕망만이 들끓었다.
아무리 감정을 거르고 걸러도 앙금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는 욕망.
이미 각인되어 버린 그녀의 존재.
이를 확신시켜 주기라도 하듯 슈타커는 자조적인 그 질문에 기꺼이 답을 주었다.
“저하께선 그리하지 못하시리란 걸 압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나?”
“메이는 그러기엔 너무 근사한 사람이니까요. 같은 여자인 저조차도 종종 마음이 동하곤 하는데, 사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리도 티가 나던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그것도 꽤, 많이.”
칼리안의 시선이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야할 홀은 뒤숭숭했다.
그 분위기를 만든 주인공, 메이블린은 그녀의 가족들을 데리고 막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무수한 이목이 쏠려있음에도 일말의 거리낌 없이 당당한 기세.
칼리안은 내딛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러다 결국 시원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러니 내가 포기할 수 있나.”
빛나는 별을 눈앞에 두고서도 좇지 말라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슈타커 역시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메이블린을 내다봤다.
“이해합니다. 빛을 좇는 건, 본능이니까요.”
마치 제 길의 이정표라도 되는 듯이.
* * *
모두 연회를 즐기기 바빠 거리는 한산했다.
한가득 차오른 보름달만 하늘 높이 걸려있는 가운데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다각다각 울렸다.
나는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구경했다.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건만 은은한 달빛이 스며든 탓인지 색달라 보였다.
마치 잘 뽑은 엽서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그 풍경을 조금 더 구경하다가, 밤바람이 쌀쌀해 도로 앉았다.
몸을 짧게 떨자마자 커다란 외투가 어깨 위를 덮었다.
“나 때문에 괜히 연회를 즐기지도 못하고… 미안하구나, 메이.”
윌리엄이 벗은 외투를 정돈해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로선 조금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윌리엄이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원인제공자를 따지자면 나인데.
거기에 괜히 끼어들기까지 해 일을 망친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터였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모든 소란이 죄다 그의 탓인 양 미안한 기색이었다.
때문에 나는 부러 더욱 쾌활하게 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빠. 저는 아빠의 센스에 완전 감탄했어요.”
“감탄… 했다고?”
“그럼요. 어딜 가든 제 얘기뿐이라, 꽤나 피곤하던 참이었거든요. 파혼이 뭐 별거라고. 빨리 나가고 싶었는데 잘됐죠.”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윌리엄은 언제 의기소침했었냐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으론 내가 먼저 시비를 걸어서라도 쓸데없는 군소리들을 막아주마.”
나는 그가 둘러준 외투의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흐린 눈으로 애써 웃었다.
‘고마운데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스스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하겠다 하시면 어떡해요.’
물론 그래도 내사얼의 일등 멤버는 여전히 아빠겠지만.
진짜로 얼굴에 먹칠을 한다 해도 저 번듯한 미모를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윌리엄의 뜬금없는 포고로 대화의 노선은 금세 틀어졌다.
잠자코 앉아있던 삼형제가 기다렸다는 듯 차례차례 입을 열었다.
“저는 솔직히, 누님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 그간 참아왔지만 누님이 훨씬 아까웠습니다.”
“그래, 그 누런 녀석이 가당키나 하냐고.”
“비교하기도 어처구니없는 놈이었다. 한낱 왕세자인 주제에 감히 메이를 넘본 것부터가 얼토당토않았어.”
한낱 왕세자라니. 백작도, 후작도 아닌 세자저하신데. 통상적으로 생각해서, 자작 영애 신분에 가당키나 한가?
아무래도 다니엘은 제국의 황태자라도 데려와야 만족할 심산이었다.
“설령 제국의 황태자가 청혼한대도 메이한테는 부족해.”
아니, 방금 한 생각 취소다. 다니엘은 신을 데려온다 해도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나는 우리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짧은 몇 분 새 흘러나온 말들 중 극히 일부만 누군가 주워듣더라도 당장에 반역감이었다.
왕국에 하나뿐인 왕세자를 이토록 매도하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왕국을 축복하는 연회가 열리는 이 밤에.
“그놈은 저보다 누님을 더 아끼지 못할 겁니다.”
그건… 미하일 네가 가족이니까…? 아무래도 피가 섞인 쪽이 좀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않을까…….
“나보다 키도 작잖아.”
그건 노아 오빠가 너무 큰 거고. 당신 지구였으면 농구선수 탑 먹었을 거야.
“처음부터 재수 없었다.”
다니엘 오빠… 그건 그냥 기분 탓 같은데.
이쯤 되니 내가 칼리안 깎아먹기 모임에 참여한 것은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깎아먹기 릴레이는 더 이상 깎아먹을 게 남아있긴 한가 싶을 때쯤이 되어서야 멈췄다.
동시에 마차도 저택에 도착했다.
네 남자는 나를 매우 진귀한 귀중품이라도 되는 양 마차에서 내려주었다.
“내 손 잡아.”
“어두우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메이.”
“누님 물건은 제가 챙길게요.”
“겉옷은 저택에 들어가서 돌려 주거라.”
꼭 금지옥엽 공주님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일 만큼 조심스러운 손길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바빠서 가족들이 전부 모인 것도 오랜만이네.’
오늘 한정 특권이라고 생각하니 이대로 들어가기가 좀 아쉬워졌다.
연회도 일찍 파했겠다, 나는 화원 쪽을 가리켰다.
“꽃향기가 좋은데, 잠깐 산책하다 들어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