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61)화 (61/185)

15. 사랑할 수밖에 없는

#61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식사 시간.

잔뜩 군침 돌게 하는 맛있는 냄새가 식탁 위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눈만 도르륵 굴렸다.

슈타커가 오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 곧 폭탄을 떨어뜨릴 예정이었다.

‘더는 미뤄선 안 돼.’

나는 한참이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말씀 드릴게 있는데요.”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에 내게로 쏠렸다.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든 말해보라는 자작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들 암흑가의 존재에 대해선 알고 계실 거예요…….”

조금은, 아니 상당히 갑작스럽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까지 내가 수장인 걸 알게 된 마당에, 자작과 오빠들, 미하일이 모른다면 그건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이들은 내 가족이었으니까.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서, 나는 폭탄을 투하했다.

“그 암흑가의 수장이 저예요.”

나는 그간의 사정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으며 던켈하이트의 주인이 나임을 밝혔다.

물론 베인과 얽혔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선 함구했다.

대신 슈타커를 공작위에 올려주는 조건과, 내가 왕국의 유일한 마법사로서 가지고 있는 힘 등 부차적인 것들로 수장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 놀랄 만큼 차분했다.

최소한 포크라도 떨어뜨릴 줄 알았는데.

기겁하기는커녕 담담한 분위기를 이어가며 윌리엄이 손깍지를 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알고 있었다니?

“어떻게요? 아니, 언제부터요?”

다급한 내 재촉에 이번엔 다니엘이 답했다.

“켈른이 말해주었거든. 안 지는 얼마 안 됐다.”

“근데 왜 저한테 묻지 않으셨어요?”

켈른의 가벼운 입에 대한 응징은 둘째치고, 알면서도 내게 한 마디도 안 했다니.

이런 엄청난 사실조차 신경 쓸 게 못 될 만큼 내게 관심이 없는 건가.

그간은 그러려니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조금 섭섭해지려던 때, 연어 파피요트를 올린 샐러드 접시가 내 앞으로 밀어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 중 하나였다.

“너를 믿으니까.”

대답은 노아가 했지만 모두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윌리엄도, 다니엘도, 미하일도.

‘설마 이 사람들…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로 뭘 하든 상관이 없었던 건가? 날 믿어서?’

이를 확신시켜주기라도 하듯 윌리엄이 쐐기를 박았다.

“네가 하는 일엔 언제나 다 이유가 있지 않았느냐. 네가 그른 길을 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바보가 되는 날인가 보다.

오후에는 슈타커가, 지금은 가족들이 날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내가 알지 못했던 그들의 시선을 말해주고 있었다.

날 어떤 관계로 여기고 있었는지, 그들이 보기에 난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날 믿는지 까지도.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 같았던 말씨엔 언제나 나를 염려하는 걱정이, 믿음이, 다정함이 스며있었다.

처음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이들을 정말로 사랑하게 될까 봐 애써 모른 척 해왔을 뿐.

미하일이 나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설령 그른 길을 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흰 전적으로 누님의 편이니까요.”

타인의 신뢰 위에 오롯이 서있을 수 있다는 건,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 위에서 잡은 사람들의 손을 놓지 않는 것.

“식겠다. 어서 먹거라, 메이.”

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멍하니 있던 나도 노아가 준 음식을 입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뢰가, 애정이 너무도 당연하기에 이럴 수 있는 관계.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이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

어쩐지 속이 뜨거워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진행하던 중 미하일이 참, 하며 물었다.

“누님이 요즘 바쁘시단 건 알지만, 그래도 축제는 즐길 수 있는 거죠?

이들에겐 내가 암흑가의 수장이라는 사실보다 곧 열릴 축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이란 사실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했다.

“물론이지.”

이들 사이에선 암흑가의 수장이고, 왕세자의 약혼녀고, 마탑의 선생님이고 뭐고.

난 그냥 슈트레커 가의 셋째 딸 메이블린 슈트레커였다.

그 사실이 못내 좋아 나는 웃었다.

* * *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고, 에임 왕국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축제기간을 맞이했다.

그리고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성인식과 왕실연회.

나는 입장하자마자 한차례 술렁이는 분위기를 만끽하며 당당하게 중앙 홀을 가로질렀다.

‘크, 작년엔 여기서 약혼을 발표했었는데. 이젠 파혼 얘기가 안 굴러다니는 데가 없네.’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은 곁눈질을 해서라도 한번 씩은 꼭 나를 힐끔거렸다.

딱히 잡아먹으려 드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저 요즘 가장 화자되는 소문의 주인공이 어찌 생겼나, 한 번 얼굴이나 보자, 하는 정도랄까.

1년 만에 파혼한 세기의 비운녀 같은 타이틀을 달기엔 그간 내가 쌓아온 것들이 너무 컸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고작 이 정도 일에 흠집 날 만큼 내가 물렀다면 진즉에 죽고 없었을 거다.

오히려 칼리안이 먼저 자기가 차였다고 발표해버려서, 나는 세기의 비운녀는커녕 세기의 팜므파탈 정도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때문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굳이 다가와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슈트레커 자작, 모처럼의 연회니 내 잔이나 한 번 받아주게.”

바로 이런 사람을 제외하고.

나는 기름이 반드르르 흐르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무어 후작이었다. 지난 번 슈타커가 발을 걸었다던 영애의 가문.

그는 웬만한 장정들도 몇 모금이면 나가떨어지게 한다는 지독한 술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아닌, 윌리엄에게.

나를 직접적으로 건드렸다간 나설 사람이 왕세자나 공작 급이니 타깃을 바꾼 듯했다.

‘찌질하게 이런 식으로 복수하기냐.’

윌리엄은 평소 술을 잘 입에 대지 않았다. 술보단 차를 더 자주 마시곤 했다.

그도 이를 알고 일부러 독한 술을 권유한 것이다.

무어 후작은 입매를 음흉하게 늘어뜨리며 잔을 윌리엄 앞으로 들이밀었다.

“여신의 은총이 올해도 함께하길 빌며, 건배 하세.”

당연히 윌리엄은 이를 거부했다.

“저는 제 잔으로 하겠습니다.”

윌리엄이 만취했다고 추태를 부리는 성정은 아니지만, 축제, 그것도 왕실 연회에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어 후작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설익은 소년도 아니고, 자작께서 이 술 하나 못 드시나?”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런 설익은 내기에 응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요.”

“이건 내기가 아니라-.”

“그럼 더 이상 강요받을 이유가 없겠군요. 연회는 즐기러 온 것이지, 취하러 온 것이 아니잖습니까. 후작님께선 후자를 원하신다 해도,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저한테까지 강요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자네…!”

물론 윌리엄이 들이받는다고 해서 밀리는 성정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니엘의 말빨은 윌리엄의 유전자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어느새 주변에 몰려든 부인들이, 심지어는 무어 후작부인까지도 윌리엄의 말에 동조하며 제 남편을 사납게 쏘아봤다.

이건 달리아에게 들은 사실인데, 부인들 사이에선 알게 모르게 모종의 팬클럽이 있다고 했다.

‘모임 이름이… 내사얼이랬나?’

통칭 내가 사랑하는 얼굴들. 그 중 일순위가 윌리엄이었고.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서 목에 걸린 생선가시 취급을 당하는 것은 윌리엄이 아닌 무어 후작이었다.

아무튼, 무어 후작은 한쪽에서 나를 까내리다 슈타커에게 봉변을 당한 제 딸, 젤러스가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여러 부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남자의 자조오온심!을 지키겠다는 얄팍한 허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윌리엄을 계속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슈트레커 자작, 그저 한 입 거리일 뿐인 잔을 두고 그리 말하시니 더욱 의심스럽군. 술잔하나 제대로 못 비우는 양반을 두고 왜 이리들 난리법석인지, 참.”

원색이 드러나는 모욕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다니엘이 발끈하며 나섰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아무 말도 안 했네만. 창피함에 이젠 환청이라도 듣는 모양이지.”

무어 후작이 기분 나쁘게 껄껄댔다. 꽉 쥔 다니엘의 주먹엔 힘줄이 돋았다.

“그 무슨…!”

히익. 다니엘을 제외한 슈트레커 가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무어 후작의 도발에도 줄곧 태연하던 윌리엄조차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다니엘이 곧 변신하겠다는 신호가 오고 있었다. 공주-이하 공포의 주둥아리-로.

그의 바른 청년 이미지에 먹칠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다니엘의 공주모습은 우리 가족만 알아도 충분했다.

나는 다급하게 둘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곤 무어 후작의 손에 들린 잔을 생긋 웃으며 가져갔다.

“어머~ 이 빛깔 고운 것 좀 봐.”

샐샐 눈웃음을 한 번 날려주고.

“향도 누구처럼 지독스러운 게, 한입에 털어 넣기 딱이네요.”

단숨에 잔을 털어 넣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언행일치인지. 당신도 곧 털어먹어 주겠다 이거야.

나는 입가를 닦으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크으, 술맛 조오타.”

[스킬 ‘무관심(Lv.1)’이 발동됩니다!]

[1분간 모든 공격이 무력화 됩니다.]

앞으로 1분간은, 보드카를 사발로 들이붓는다 해도 취하지 않는다. 내게 위협을 끼치는 모든 영향은 무력화된다.

즉, 저게 맹독이라 해도 내겐 물 한 잔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원래라면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한 도수에 오만상을 절로 찌푸렸겠지.’

그러나 스킬로 무장한 나는 눈 한 번 꿈쩍하지 않고 다음 잔을 따랐다.

난데없는 소란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이제 이런 식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아도 관심 수치 채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지만,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후작의 빈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스타트는 끊었고. 그럼 2라운드 시작해볼까요, 후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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