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다음날. 메이블린은 그녀가 찬 남자와 또다시 대면해야만 했다.
그것도 한 사람을 더 껴서.
“주, 주군. 전 아직 준비가…….”
“켈른 당신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준비 안 됐다고 말할 양반이야.”
메이블린은 아침부터 던켈하이트에 쳐들어가 켈른과 한바탕 숨바꼭질을 했다.
좇고 도망가길 수십 번. 현재는 기어코 찾아낸 켈른을 칼리안의 집무실로 질질 끌고 가는 중이었다.
속사정은 이미 다 실토하게 해서 들은 뒤였다.
처음에 어쩌다 칼리안에게 정체를 들켰는지 들었을 땐 신랄하게 혀를 차줬었다.
‘하여간, 아무리 칼리안이 자기를 믿는다는 걸 믿어도 말이야. 은근 허당끼가 있단 말이야. 무슨 비상금 꿍쳐 놓듯 그런 곳에 숨겨 놓고도 여태 안 들켰다는 게 용하지.’
평생 숨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왕 들켜버린 거 매듭을 꼬인 채로 둬서 좋을 건 없었다.
메이블린은 어르고 달래다가 종래엔 협박으로 데리고 온 켈른을 칼리안 앞에 대령했다.
한때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켈른을 향해 칼리안이 넌지시 물었다.
“지난 독사건, 자네가 한 것인가?”
“…….”
“…….”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 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켈른은 낯빛을 굳히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기실 못 연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그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켈른의 청남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이구, 이러다 날 새겠네.’
결국 보다 못한 메이블린이 나섰다.
“켈른은 그냥 재정만 담당해요. 돈 세탁… 뭐 그런 거요. 켈른의 허우대를 보세요. 힘 좀 쓰게 생긴 몸은 아니잖아요? 쇠꼬챙이 같은 게 툭 치기만 해도 부러질걸요.”
메이블린의 엄지손가락이 켈른을 가리켰다.
이도저도 못하고 서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그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 말이 좀 심한 것 아닌가.”
메이블린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일은 켈른과는 상관없어요. 저도 그 땐 암흑가에 들어가기 전이라 목숨 걸고 독을 마셨고요.”
칼리안은 눈앞에서 숨이 넘어가던 메이블린의 모습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알면서도 독이 든 잔을 거침없이 들이키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녀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가 아니고, 정말로 믿을 만해서 믿는 거다.
믿을 만한 메이블린은 칼리안과 켈른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두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길에 부질없이 끌려왔다.
“그럼 이제 화해하는 거죠?”
“…….”
“…….”
여전히 말이 없는 두 남자를 향해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솔직히 요즘 밀린 업무가 한둘이에요? 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있는 서류 좀 봐요. 날마다 야근하느라 죽겠다구요. 켈른도 그래요.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설명하면 될 것이지 무턱대고 도망치면 안 되죠.”
“크흠, 흠…….”
두 남자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흘렸다.
메이블린은 하나씩 잡은 그들의 손을 기어이 서로 붙잡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 큰 어른들끼리 꿍하게 있지 말고 이만 화해해요, 네?”
칼리안과 켈른의 시선이 서툴게 얽혔다.
어차피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문제였고, 오히려 그녀 덕에 훨씬 수월하게 풀린 셈이었다.
사실, 그녀의 말마따나 서로의 부재가 생각보다 크기도 했다.
자물쇠로 걸어 잠근 것 마냥 꾹 다물려 있던 두 입술이 동시에 열렸다.
“……알겠네.”
“……알겠다.”
마주잡은 두 손이 상하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를 보며 메이블린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씩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세요, 저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저하 얼굴은 지극 정성이니까요.”
“…듣기 나쁘진 않군.”
“성은이 만극합니다.”
능청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칼리안은 결국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을 집어삼킬 만큼 커다랗던 문제도 별거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영애는 말을 참 잘해.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 사이 화해를 마친 켈른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제 눈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자신이 방금 뭘 본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설령 믿는다 쳐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굴 좋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우리 수장님께서 저하께 마법이라도 건 모양이었다.
분명 파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런 마당에 무슨 고백?
켈른의 기함에도 칼리안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나머지 이유들은 천천히 말해주겠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말해줄 수 있지만, 그랬다간 며칠 밤을 꼬박 새도 부족할 것 같거든.”
말끔한 얼굴에 아침 햇살처럼 싱그럽기 그지없는 미소가 덧그려졌다.
“기대해 볼게요. 하하, 하…….”
거칠 것 없는 불꽃 플러팅을 가까스로 받아내며 메이블린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돌겠네.’
피차 서로 없던 감정, 계약이 끝나도 달라지는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생전 안 그러던 양반이 이러니 더 미칠 노릇이었다.
* * *
한가로운 오후. 한 무리의 귀족 영애들이 거리를 거닐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여러 명의 목소리가 가벼운 웃음소리와 간간히 섞여 조잘거렸다. 그녀들이 즐기고 있는 것은 비단 쇼핑뿐만이 아니었다.
결코 빼먹을 수 없는 세간에 자자한 사건들부터 시작해서 그랬다더라, 하는 풍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오갔다.
그러다보니 근래 가장 핫한 이슈로 꼽히는 왕세자의 파혼 소식을 입에 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먼저 시작할까 서로서로 눈치만 보던 중 한 영애가 조심스럽게 화두를 열었다.
“세자저하의 파혼 소식은 다들 들으셨지요?”
“물론이죠. 정말 충격이었어요.”
“슈트레커 영애의 가문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잘 어울리는 연인이지 않았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안타깝다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젤러스 무어 후작 영애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얹었다.
“저는 이리 될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지요.”
상당히 즐거워하는 기색이 읽히는 어조였다.
이를 부정하지 않듯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젤러스가 상당 시간동안 칼리안을 흠모하고 있었음을 아는 영애들은 서둘러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간 어떤 수모를 당하게 될지 몰랐다.
서로 웃으며 대화하고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은밀한 권력의 구도가 존재했다.
그 힘을 누구보다도 잘 이용할 줄 아는 젤러스는 제법 예민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여인의 의무는 등한시하고 왈가닥처럼 다닐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저하께서도 어지간히도 질린 모양이죠. 거기다 외모가 특출나지도 않고, 그렇다할 특색도 없어,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앗!”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그치지 않고 말을 뱉어내던 젤러스가 별안간 허우적대다 앞으로 엎어졌다.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던 누군가 발을 건 탓이었다.
그녀는 씩씩대며 고개를 쳐들었다.
“누구야! 누가 감히 내 앞길을 막아!”
잔뜩 성이 난 외침에, 늘씬하게 큰 인영이 그녀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정갈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비스듬히 눌러 쓴 모자 아래로 눈부신 은발이 살랑였다.
비켜달라는 말 한 마디 흘러나오지 않았으나, 젤러스의 곁을 지키고 있던 영애들이 좌우로 길을 텄다.
이윽고 젤러스 앞에 선 여인이 모자를 제대로 고쳐 쓰며 사붓이 웃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군요.”
입은 웃고 있었음에도, 일말의 미동조차 없는 싸늘한 눈은 아래를 내려다 본 채였다.
“한데 흘러 다니는 말들이 너무 가벼운지라, 무어 영애라면 이 정도는 가볍게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금방이라도 터질 듯 달아올라 있던 젤러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제가 너무 과대평가를 했나 봅니다.”
한숨 비슷한 웃음이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새나왔다.
그 선득함에 젤러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고, 공작님. 그런 게 아니라…….”
눈앞의 여인은 무엇이든 다 휘두를 듯 굴던 제 신분도 얄팍한 종잇장으로 만들 수 있는 자였다.
슈타커 에스카로트. 불리한 위세를 뒤집고 공작위를 거머쥔 여자.
이 자리에서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준 사람이 바로 메이블린 슈트레커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 내뱉은 말을 그녀가 들은 것만 해도 큰일인데, 그녀의 면전에서 더 할 말이 남아있을 리가.
젤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연거푸 고개를 꾸벅였다.
“실례했습니다, 공작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일행들을 이끌고 황급히 달아났다.
그리고 며칠 후, 무어 후작가는 에스카로트 공작가와의 모든 거래가 끊겨 한동안 그와 파생된 갖은 문제로 허덕여야만 했다.
* * *
‘날 면박이라도 주고 싶은 건가? 뭐 하러 이런 얘길…….’
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끔벅거렸다.
느닷없이 찾아온 슈타커는 오는 길에 들었다며, 귀족 영애들이 내 험담을 했노라고 얘기해주는 중이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얘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얼굴이 답지 않게 신나보였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제가, 몰래 발을 걸어줬습니다. 넘어졌을 때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그 얼굴을 영애도 봤어야 했는데요.”
한창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잠시 얘기를 멈추고 세상 후련한 듯 웃었다.
청아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잠깐, 뭐? 청아한 웃음소리?’
슈타커가, 웃었다. 그 철혈의 공작님이.
나는 턱이 벌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그러나 슈타커는 그것만으론 부족했는지 내 미래보다 밝을 게 분명한, 빛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폭탄을 터뜨렸다.
“제가 이런 얘기까지 하는 이유는요. 어필하는 겁니다, 영애한테. 저 이쁜 짓 했으니까 예뻐해 달라고.”
“그렇군요. 제게 예쁨 받… 예에?”
내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혹시 이거 꿈인가?
‘그래, 바쁘신 공작님이 대뜸 찾아오신 것부터가 이상했어.’
나는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더럽게 아팠다.
하지만 통증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꿈이 아니라면, 저 천상의 미소가 실체라는 건데. 더불어 그녀가 내게 던진 폭탄발언도.
나는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애쓰며 되물었다.
“왜요…?”
“저는 당신이랑 친구가 되고 싶거든요.”
명쾌하고도 단호한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그날이 생각나는 눈빛이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는 눈.
“나랑 해요, 친구.”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엔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내 손을 잡는 거,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를 지금 이 자리에 올려주겠노라 약조했었을 때 내가 던졌던 말이었다.
정말로 그럴 자신이 있었기에 나 스스로를 걸고 한 말.
그때보다 돈독해진 관계 위에 서서, 이젠 슈타커가 단언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를 걸고.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묘한 기대감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었지만 텅 비었던 곳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럼 나도 응당 그에 맞는 대답을 해줘야겠지.’
어차피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아요.”
웃었다. 있는 힘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