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갑자기 무슨 소린가.”
칼리안의 단정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나는 개의치 않으려 애쓰며 답했다.
“어차피 일종의 계약처럼 한 약혼이었고, 파혼한다 하더라도 제가 저하의 편인 건 그대로일거예요.”
관심 수치가 절실했으면 약혼에서 나아가 결혼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암흑가를 평정한 상태라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꼭 던켈하이트가 아니더라도 마탑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가 형식적인 껍데기일 뿐이었던 약혼에서 벗어나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미래를 꾸려나가길 바랬다.
“제가 있기엔 너무 과분한 자리였죠.”
“그렇지 않아.”
“그동안 진심 없이 연기하는 거, 힘드셨잖아요. 저라도 가면을 벗겨드려야죠.”
“힘든 적 없었어.”
“계약을 끝낼 때가 온 것 같아요.”
“그런 때는 존재하지 않아.”
칼리안은 계속해서 거절의 답만 내뱉었다.
그렇다고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딱히 적극적으로 회유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완강하게 굴더라도, 켈른의 정체에 이어서 내 실상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주저하지 않고 날 버릴 수밖에 없겠지.’
나는 그의 일그러진 표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파혼해주세요, 저하.”
왜 약혼하는 것보다 파혼하는 게 더 어려운지 모르겠다.
아무리 거짓이었어도 이별은 이별이라 이건가.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게 머나먼 옛일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저하가 제 약혼자여서 기뻤고요. 그러니, 부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잘 살길 빌게요.”
“메이블린…….”
칼리안이 내 이름을 불렀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애달픈 목소리로.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켈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하는데.
오늘 끝내자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다음에, 다음에 하자. 말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나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원했던 대로 쿨하게 퇴장할 순 없었다.
막 일어서려는 나를 칼리안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나는 숨을 참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붙잡힌 손으로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아니. 우리는 파혼하지 않을 거다.”
마찬가지로 조그맣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잇새로 새나왔다.
“내가 그대를 놓지 않을 거니까.”
* * *
그녀의 말마따나 계약으로 시작한 관계였다.
베인은 죽었고, 칼리안의 오러 또한 개화했다.
더 이상 후계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번거롭기만 한 그깟 계약, 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명색만 결혼일 뿐인 일종의 계약에 불과하다고 먼저 말한 것도 그였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아득하게 조여들었다.
‘나는 정말 메이블린의 능력이 필요해서 그녀를 붙잡는 것인가? 뛰어난 사무관이자 마법사인 그녀를 놓치기 싫어서?’
스스로에게 물었고,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아니. 이건 포장을 위한 이유일 뿐이다.’
더 이상 이유를 찾고 명분을 덧대는 건 질렸다.
그러니 지금만큼은, 이유 좀 없어도 되지 않나.
그냥 끌리는 대로 행동해도 되지 않나.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기어이 돌을 던졌다.
“내가 그대를 놓지 않을 거니까.”
풍덩-
잔잔한 호수에 짙은 파문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본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칼리안을 떨리게 했다.
그러나 메이블린은 대답대신 조용히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로 포갰다.
전해오는 따듯한 온기에 그녀는 입술을 떼기가 더 고통스러웠다.
남녀 간의 애정은 없었을지언정 나름 군신으로서의 정은 들었는데.
‘결국 오늘 끝내게 되는구나.’
그녀는 제 팔을 붙든 칼리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아뇨. 저하는 절 놓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니. 그럴 일은 없어.”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메이블린이 아프게 웃었다.
“죄송해요, 저하. 그동안 말씀을 못 드렸어요.”
불안정한 목소리가 가냘프게 흔들렸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칼리안의 전신을 강타했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켈른이 떠오르는 것일까.
칼리안은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켈른이 그의 치부를 자신에게 들켰을 때 보였던 얼굴과 똑같았다.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메이블린이 그를 마주했다.
“암흑가의 존재에 대해선 이미 알고 계시겠죠.”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칼리안은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가 없었다.
“베인 에스카로트가 죽고 난 뒤, 암흑가는 새로운 수장을 받아들였고 무너지지 않았어요.”
“지금 무슨 말을…….”
항상 생기로 빛나던 메이블린의 호박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주인이 저예요, 칼리안.”
기어코 방아쇠가 당겨졌다.
쿵, 쿵.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칼리안은 온몸의 뼈가 심장 박동에 맞춰 하나하나 곧추서는 기분이었다.
‘메이블린이… 암흑가의 수장이라니?’
잔혹한 현실을 목도했을 때의 심정은 앞으로 백 번, 천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변명하듯 성급히 말을 덧붙였다.
“저하에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요즘 나쁜 짓은 안 하니까요. 그… 수배 중이던 흉악 범죄자들 있죠? 걔네들도 저희 쪽에서 알아서 처리했고, 왕궁에 남아있는 잔당들도 전부 철수시켰고…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정말 깔끔하게 싹 다 조졌, 아니 처리했으니까요. 또…….”
확실히 칼리안의 숨통을 죄는 어둠의 손길이 어느 순간부터 싹 끊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따질 재간이 지금 그에겐 없었다.
메이블린이 뭐라 뭐라 말을 이었으나 말소리가 안개처럼 부옇게 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 기분은 뭐지?’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피어오른 희한한 감정이 점점 부풀어 그의 사고를 잠식했다.
화가 나야 하는데, 화가 나긴커녕 열이 오르지도 않았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배신감을 느끼고 등을 돌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따위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왜지? 어째서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뭐지?’
칼리안은 말없이 메이블린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초조한 낯빛이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저하.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계속 궁에서 일할 거고, 전하 곁을 지킬 거예요. 신하로서.”
그녀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고작 군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화를 참는 것인가?
암흑가의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뛰어나기에 그녀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인가?
적이 아닌 아군이 될 수 있어서?
-아니. 이건 포장을 위한 이유일 뿐이다.
조금 전 내린 답에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엇을 포장하기 위한 이유였더라?
칼리안은 다시 한 번 더 답을 내려야만 했다.
‘얄팍한 군신관계를 유지하고자 함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나는…….’
거기까지 스스로를 파헤치던 그는 더 이상 생각하길 관두었다.
‘그래, 이유는 그만 찾자. 더는 외면할 수 없다.’
그냥, 이유 없이 좋아해도 되지 않나. 네가 그런 사람인데.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도출된 사실 하나.
“그대를 좋아하는 것 같군, 메이블린.”
“네…?!”
전전긍긍 그의 눈치를 보던 메이블린은 입을 떡 벌렸다.
칼이 심장에 박히더라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꺼이 박혀줄 각오도 되어있었는데.
들리는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정정하지. 그대를 좋아한다.”
“……진심이세요?”
“그 어느 때보다도.”
칼리안이 메이블린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녀는 참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꾸만 막아도, 아니 분명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차려보면 밀려와있었다.
약혼을 발표하던 연회장에서도, 삶의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공허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피할 틈도 안 주고 가차 없이 밀려왔다.
“그러니 가지 마. 내가 더 잘 할게. 나는 너를 놓을 수 없어.”
칼리안이, 한 나라의 왕세자가. 체통도 버리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럼에도 메이블린은 틈을 줄 수 없었다.
“저하…….”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그를,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칼리안을 좋아하긴 했으나 아이돌이나 연예인에게 표하는 애정의 범주. 딱 거기까지였다.
메이블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흐려지는 말꼬리에서 저의를 이해한 칼리안이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그 자식보다 못한 게 뭔데.”
묻고 싶은 말이 수백 가지였지만, 정작 나오는 말은 치졸하게도 이뿐이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메이블린이 미간을 좁혔다.
“그 자식이라뇨?”
“항상 그대 곁을 맴돌던 마법사 말이다. 검은 머리에 눈이 붉던.”
“그런 사이 아니에요.”
“거짓말.”
칼리안이 실소를 터뜨렸다.
너는 아니라지만, 적어도 그놈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저 역시 같은 감정을 품고 있는 남자로서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메이블린을 쳐다보던 그 눈은, 결코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은 눈이 아니었다.
하지만 칼리안이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메이블린은 그를 다독이듯 조곤조곤 말했다.
“칼리안. 칼리안은 칼리안 자체로 멋진 사람이에요. 다만 제 마음이 누군가를 받아들일 여유가 안 되는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절대 칼리안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차분하고도 명확한 어투였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칼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대는 정말…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군.”
“미안해요.”
“미안할 것 없다. 그대는 아직 내 신하고,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았어. 그리고 포기하지도 않았고.”
“…….”
아직 기회는 있었다. 그 마법사 놈도 완전히 그녀의 눈에 들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대를 완전히 용서할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줘.”
어설픈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놓치는 게 더 바보 같았다.
한 발 물러나더라도 선전포고는 해야 했다.
“그 시간이 끝나면, 영애의 선택을 따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