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불가항력
#58
오늘은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씨가 외출하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던켈하이트는 어제 갔다 왔고… 오늘은 마탑이나 갈까.’
지난번에 피곤해서 루치펠을 문전박대 한 것이 떠올랐다.
그래도 내가 걱정돼서 찾아왔다는데, 그렇게 보낸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다.
나는 가게에 들러 케이크까지 싸들고 마탑 문을 두드렸다.
“다들 잘 지냈어요?”
“선생님!”
마탑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반갑게 날 맞이했다. 나는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디스도 안녕, 벤 아저씨도 안녕, 머스클은 오늘도 근육이 생동감이 넘치… 엇.
머스클의 튼실한 이두박근을 한 번 건드려보려던 찰나에 시야가 홱 바뀌었다.
그리고 보이는 익숙한 풍경.
‘뭐야?’
내가 온 건 어찌 알았는지 루치펠이 자기 방으로 날 텔레포트 시켰다.
제발 예고 좀 해주면 좋으련만. 그래도 꼭대기 층까지 기어갈 수고를 덜어준 건 고마웠다.
“오랜만이야, 졸부님.”
그가 마탑주 전용 탁자에서 턱을 괸 채 인사했다.
졸지에 소파에 앉아있게 된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손이 허전했다.
“어, 내 케이크.”
“이디스랑 애들 먹으라고 가져온 거 아니야?”
“오늘은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건데…….”
루치펠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턱을 괴었던 손을 뗐다.
“정말?”
“응.”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생각해보니 루치펠 준다고 가져온 게 처음이긴 했다.
…괜스레 미안해지네.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반대편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벤과 이디스가 갑작스레 허공에서 나타냈다. 그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멀뚱하니 서서 눈만 끔벅거렸다.
둘은 막 케이크를 입에 넣으려던 중이었는지 생크림이 묻은 손으로 포크를 들고 있었다.
둘을 향해 루치펠이 턱짓했다.
“그거 여기 내려놔.”
벤이 애처로운 눈망울로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하지만 탑주님… 아직 한 입도 못 먹었는데요…….”
“잘했어. 한 입이라도 먹었으면 네가 한 입거리가 됐을 테니까.”
상냥한 어조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다.
눈치 빠른 이디스가 벤의 옆구리를 포크로 쿡 찔렀다.
결국 벤은 울상을 지으며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그럼 저흰 이만.”
이디스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케이크를 잘라 대령하는 것이 임무였다는 듯, 둘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사실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벤을 이디스가 질질 끌고 간 것에 가까웠다.
루치펠은 무자비하게 강탈한-원래 그의 것이긴 했다만-케이크 조각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도 되는 양 입에 넣었다.
‘쟤가 평소에 케이크를 즐겨 먹었던가? 단 걸 썩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나도 한 입 크게 떠 우물거리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
“욕심쟁이.”
좀 나눠주면 어디 덧나냐. 하지만 루치펠은 태연했다.
“맞아, 나 욕심쟁이야.”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그의 붉은 시선이 내 입술로 향했다.
뭐가 묻었나? 내가 닦기도 전에 그가 먼저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입술을 스쳤다. 그는 내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닦은 손가락을 그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혀가 야살스럽게 손가락을 핥았다.
“욕심이 많아서, 원하는 것도 많아.”
시선은 줄곧 내게 꽂혀 있는 채였다.
허미,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 보면 더러워서 저걸 어떻게 먹어 했는데.
막상 당해보니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먹어주면 안 되냐고 하고 싶었다.
똑같은 손가락을 빨아도 벤이랑 느낌이 전혀 달랐다.
‘벤한텐 미안하지만… 정말 그런 걸 어째.’
상황을 설레게 만드는 건 행동이 아니라 얼굴이었다.
자발적 모태솔로 27년차인 내 스톤하트가 순간 두근거릴 정도로 잘생긴 얼굴.
그런데 그 기막히게 잘생긴 얼굴로 이놈이 이어서 대뜸 하는 말이,
“너희 왕궁, 부수면 안 돼?”
라는 청천벽력이라니.
나는 스톤하트를 진정시키기 위해 움켜쥐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취소다. 설렜다는 거 취소. 주책맞은 심장은 방금의 설렘을 보상하라!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미처 여과시키지도 못하고 대꾸했다.
“갑자기 그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요즘 졸부님이 바쁜 거 같아서. 궁이 무너지면 일 안 해도 되잖아.”
“야 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낌새를 눈치챘는지 루치펠이 처연한 얼굴로 날 응시했다.
흥, 얼굴 써도 이젠 안 돼. 얼굴 찬스 방금 다 썼어. 안 넘어가. 면역 생겼어.
…라고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욕망에 충실한 두 눈동자는 아직 꽃미모 어택을 방어할 만큼 두껍지 못했다.
나는 차라리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젓는 척 시선을 피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말하면 꼭 진담 같단 말이야.”
“진담인데.”
“그럼 진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왜, 왕궁 무너지는 게 싫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응. 차라리 서류 산에 파묻히는 게 나아.”
“알았어, 그럼 안 할게.”
하지 말랬다고 그는 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크 없는 탱크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또 영락없이 말 잘 듣는 강아지 같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뭐, 그런 점이 또 귀엽긴 했다.
사실 뭐니뭐니해도 루치펠의 가장 큰 매력은 저 어마무시한 미모지만.
그가 가지런한 흰 치아를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나 잘했어?”
“으, 응…….”
방 안이 순식간에 환해질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야이씨, 그만해! 그만 하라고! 나 더 이상 깰 대가리가 없단 말이야!
내 절규가 들리지도 않는지 그는 급기야 눈까지 반달로 휘었다.
“그럼 칭찬해줘.”
“어떻게…?”
“머리 쓰다듬어 줘.”
얘가 왜 이래, 정말 개가 되어가나. 물론 루치펠이 뜬금없지 않았던 적이 드물긴 했다만.
어처구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욕망을 따르고 있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갔다.
어머머, 얘는 무슨 머리카락도 이렇게 비단결이야.
분명 그를 강아지 취급을 하고 있는 건 나임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드는 것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고 있었다.
자꾸만 서슴없이 다가오는 그를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 * *
출근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저택을 나섰다.
‘콜린은 잘 지내고 있겠지?’
요 며칠 안 봤다고 그새 발이 근질거렸다.
신수 가족의 정체에 대해 란슬롯이 발설할까 하는 염려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더 덮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정말 부탁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들의 실체를 똑똑히 본 사람.
어디 보기만 했나. 직접 타서 하늘도 날고 서로 말도 섞었다.
그가 세간에 함부로 말을 쏟아낼 작자는 못 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불안한 씨앗은 처음부터 키우지 않는 게 나았다. 확답을 받고 싶었다.
더불어 켈른의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걸 던켈하이트를 다녀온 날 알게 되어서 털어버려야 할 문제도 있었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출근길이었다. 궁에 도착한 나는 곧장 칼리안을 찾았다.
켈른의 부재로 며칠 간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렸을 그는 예상외로 낯빛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덕분에.”
칼리안은 항상 봐오던, 일전의 멀끔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시녀가 차를 내왔다.
“끌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저하도 그걸 원하시는 것 같고. 우리 아마 할 얘기가 좀 많죠?”
“그런 것 같군.”
그도 동의하는 바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때라면 이런저런 근황이나 하다못해 시답잖은 날씨 얘기라도 하며 서두를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풀어야할 얘기가 상당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칼리안이 시종들을 향해 손짓했다.
은밀한 주제니 만큼 듣는 귀를 전부 물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시종들이 나가고, 곧 방 안엔 그와 나만 존재했다.
‘먼저 용용이랑 실버부터 해결하자.’
나는 둘밖에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를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일단 며칠 전에 봤던 두 사람에 관해선데요. 어느 정돈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드래곤과 늑대 신수가 맞다는 거군.”
“…네.”
나는 그간의 사정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요약해서 설명했다.
간간이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얘기가 다 끝나도록 큰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비밀로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간곡하게 부탁드릴게요.”
“알겠네.”
덤덤한 표정만큼이나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너무 쿨한데?
살짝 당황해하는 나와 그가 눈을 마주쳤다.
“대신, 내 부탁도 들어줬으면 하는데.”
그럼 그렇지.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였다. 그래도 비밀 함구값이라면야.
“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들어드릴게요.”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야. 곧 약혼식이니, 앞으로 어딜 갈 때에는 얘기를 해주고 갔으면 좋겠어. 약혼자로서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왕이면 돌아오는 휴일에 약혼식도 바로 진행했으면 하는데.”
저기, 잠깐만 타임. 약혼은 빼고 들어드리면 안 될까요?
나는 속으로 불과 10초 전까지 촐싹거렸던 입을 사정없이 때렸다.
팔꿈치를 혀로 핥아라까진 팔을 골절시켜서라도 들어주겠는데 약혼은 무리였다.
그러나 칼리안은 상당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인지 서슴없이 말을 내뱉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만 하려 해도 사라지는 탓에 통 상의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약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잖나.”
“저… 그게 말이에요. 하하…….”
방심한 사이 파고든 주제에 나는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그동안 그를 많이 피해 다니긴 했다. 눈에 안 띄려고.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약혼 얘기도 피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평생 도망치며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언제가 되었든 매듭지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 까짓 거 오늘 끝내자.’
나는 머쓱하게 흘리던 웃음을 추스르고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 약혼, 없던 걸로 하면 안 될까요?”